뱃살을 좀더 빼서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속옷부터 쫙 갖춰 입고 다니고 싶다. 원하는 곳 어디서든 탈의해도 가뿐한 상태를 좋아한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입고 벗는 과정의 즐거움은 마치 간략한 의식을 나를 위해 하는 것과 비슷하다. 마음에 드는 다른 관객을 두는 것도 때로 즐겁지만, 필요조건은 아니다. 집 안을 마음에 들게 정리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청결히 지내기를 좋아한다.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은 드물다. 정리는 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안락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남자도 유두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남자들</font></font>
그렇다고 단정한 일상을 지켜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는 않다. 날씨가 변하듯 내 상태도 삶의 모습도 달라진다. 천지개벽이 일어나듯 한꺼번에 달라지는 일은 드물다(감당치를 벗어나는 변화에 상태 복구와 심신 회복을 위해 비상 모드로 살아간다). 대체로 삶의 품이 넓어질수록 끌어안기 벅차지 않은 변화고 너그럽게 스스로 변화에 스며들고자 한다. 삶을 지키는 것은 일상이지만, 또 삶을 깨우는 것은 변화다. 게으르고 싶은 날은 다정한 게으름으로 나를 포대기에 감싸듯 쉬게 해주려 한다. 흐트러지고 싶은 날은 바닥을 흐르는 액체처럼 나를 흐르게 한다.
속옷을 갖춰 입고 싶다고 말했지만, 언제나 그렇다는 건 아니다. 대개는 편안한 팬티 한 장만이 내가 입는 속옷의 전부다. 아니, 속옷을 갖춰 입는다는 의미는 자유롭게 변화한다. 어떤 날의 갖춤은 브라에서 팬티까지겠지만, 어떤 날은 팬티 한 장일 거고 어느 날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리고 나의 이런 선택은 도로를 알몸으로 거닐지 않는 한 주위 눈총도 받지 않고 간섭 대상도 되지 않는다. 나의 삶도, 나의 몸도, 남의 시선과 판단의 대상이 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간단하고 명확한 명제가 있을 뿐이다.
브라를 갖춰 입어도, 그것이 얇은 천 제품이면 유두의 존재가 옷 바깥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두툼한 패드를 덧대지 않으면, 아이 두 명을 모유만 먹여서 2년 넘게 키운 엄마의 도드라진 유두는 티가 날 수밖에 없다. 더운 여름에 두꺼운 패드가 든 브라를 착용한다는 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경험이다. 여름마다 한국에 돌아가 두어 달을 지내는데, 한국의 더위와 습기에서 미국에선 입은 적 없는 답답한 브라를 따로 해야 한다는 건 히잡을 두르고 다니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내 두 딸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녀들이 자기 몸에 가장 편안한 사람이 되길 바란다.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몸을 검열하고 불필요한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기를 원한다.
한국 거리를 다니다보면, 유두가 도드라지는 대부분의 사람은 남자다. 젖 먹인 적도 없을 터인데(먹일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아직 아는 사례가 없다) 유두가 왜 그리 커졌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들의 몸은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의문을 품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두 개의 젖을 달고 태어난 건 여자만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남자도 제각기 가슴 사이즈를 가지고 있음은 옷 너머로도 짐작할 수 있다. 지방이 두툼히 올라 봉긋하게 솟거나 축 처진 이도 있고, 납작하게 꺼진 이도, 근육으로 탄탄하게 살아난 가슴도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욕망의 주체임을 드러내는 순간</font></font>
그들 중 일부는 신기하게도, 자기 가슴보다 여성의 가슴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서 단속까지 하려고 한다. 보기에 불편하다는데 그 내용을 듣다보면, 머리칼이 성욕을 자극하기에 가려야 한다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슴을 보면서 나와 별 상관 없이 느끼는데(혹시나 해서 밝히는데, 여자도 남자 가슴을 애무하길 좋아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것은 그들이 내 성적 대상으로만 존재한다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도 나처럼, 각자 욕구가 있고 취향이 있고 삶의 상태가 다를 것이다.
매력적인 누군가라도 자동적으로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존엄이 그에게 있다. 나의 쾌락 혹은 불편보다 그의 선택과 자유가, 그의 몸에 관해서라면, 우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존중하는 만큼 나 역시 존중되길 예상한다. 존중받지 않으므로 알아서 조심할 의무는 내게 없다. 존중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는 있어도. 하지만 욕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순간, 또 다른 장벽에 부딪힌다. 욕망의 주체임을 주장하는 걸 넘어서서 욕망의 대상마저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그들의 오만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욕망의 대상이 도드라진 차림과 행동을 보일 때 불편하다고 호소하며, 주체가 되기엔 자질 부족임을 스스로 드러내면서도 부끄럼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 한편, 욕망을 드러내면 손쉬운 욕망의 대상이나 조롱 대상으로 추락할 위험을 감수해야 마땅한 내가 있다.
성적 욕구가 있고 남자들이 당연시 여기는 성적 활동을 나 역시 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어색함이나 당황스러움을 불러일으키거나 유혹의 신호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나의 성은 방어적인 성이어야 하고, 욕망의 주체인 남자를 불편하게 하지 않을 만큼만 매력적인 성이어야 하며, 그 한계를 벗어나면 대가를 치러 마땅하거나 그래도 별수 없는 성이어야 한다. 여자 인생은 남자 한번 잘못 만나면 돌이킬 수 없이 망쳐질 수 있다고 믿어지며, 실제로도 남자들의 숱한 살인과 폭행의 대상이 되거나 이후 그 여파로 자살이나 자해의 주체가 된다. 유명한 남자 연예인이나 권력자들은 성범죄의 주체가 되어 언론에 오르내리는 반면, 여자 연예인은 성범죄 피해자가 되어 등장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어지는 2차 가해로 삶을 마감하려 했다는 뉴스가 나오기도 한다. 여자의 삶은, 성적 대상으로서 가치 평가되고 제한되며 피해자 위치임에도 보호는커녕 관음의 대상이 된다. 거듭되는 외부 검열은 견고한 자기 검열의 틀을 짓는다. 남들 보기에 거리낌 없이 살아가는 듯해도,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을 안팎으로 겪는다. 욕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순간, 곧바로 누구나의 욕망을 받아들일 만한 상대로 다시 대상화하는 현실을 미리 두려워한다. 욕망 있음은 취향이 있고 선택을 원한다는 것임에도, 나의 욕망은 지속되는 검열로 살아남기조차 위태롭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화도 저항도 모멸스러워</font></font>
언젠가 참으로 지질한 방식으로 나를 좇아 숙소까지 들어온 남자가 있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그와 나는 두 차례 모임에서 만난 게 다였고 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술자리가 끝난 뒤 모임에 있던 사람을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해서 모두 그의 차에 올랐다. 대리기사가 이미 차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특별한 분위기가 조성된 건 없었다. 노선이 좀 애매했는데, 굳이 그가 나를 맨 마지막에 데려다주기로 한 건 신경 쓰이는 지점이긴 했지만 따지고 들어가긴 구차했다. 당시 묵고 있던 오피스텔 건물 지하주차장에 도착하자 인사하고서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승강기 앞에 서서 기다리던 중 그의 차에 있던 대리기사가 유리문 밖에서 나를 불렀다. 급한 용건이 있는 듯해 문 가까이 다가서서 이유를 묻는 순간,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통과해서 들어왔고 질문에 답을 주긴커녕 나를 지나쳐 가버렸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라 어리둥절한 터에 열린 문을 틈타 어느새 내 곁에 차 주인이 서 있었다. 화가 치밀어올랐다. 차갑게 노려보니 그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라도 한잔 주세요.”
역겨웠다. 그의 뻔뻔한 얼굴을 바닥에 처박고 짓밟아주고 싶었다. 한심함을 넘어서서 비열한 수작이었다. 대리기사를 이용해서 문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짓이라니. 그는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았고, 남자로서의 존재감은 애초에 내게 없는 이였다. 나는 그로 인해, 나의 밤과 삶의 평온을 흔들 의사가 없었다. 화내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결국 그를 상대하는 일이기에 모멸스럽게 느껴졌다. 살의의 뜨거움보다는 존재 무시의 차가움이 그에게 걸맞았다. 그가 보이지도 않는 듯이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오피스텔 문 앞까지 이르렀다. 그는 스스로 무시당함조차 알아차릴 능력이 없을 만큼 어리석었고, 문을 열어주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 내가 지나간 틈을 비집고서, 엘리베이터에 오르고 방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나는 평소처럼 내 하루의 마지막 일과를 수행했다. 화장실로 직행해 세수하고 이를 닦고 옷을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의 눈을 피해 옷장 문으로 몸을 가리지도 않았다. 보든 말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내가 내 공간에서, 내 자유를 누릴 권리를 초대받지 않은 침입자로 인해 제한할 이유는 없으니까.
“사람이 왔는데 커피 한잔도 안 주나요?” 그가 더듬더듬 물었다.
“알아서 뽑아 마시든가. 난 잘 거니까 마시면 불 끄고 나가요.” 나로서는 그에게 베푼, 최대한의 호의였다. 가까스로 제시한 출구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너에겐 나쁘고 싶지도 않아</font></font>
나는 그대로 침대로 들어갔고 바로 잠을 청했다. 어렴풋이 샤워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스르륵 침대 곁으로 다가오는 그를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인생 한번 조져볼래? 지금 신고한다.”
그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줄행랑쳤다.
나는 그가 나를 두고 어떤 해석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그는 내 세계를 흔들 만한 어떤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떠나면서 내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정말 나쁜 여자예요. 남자를 이런 식으로….” 코웃음이 나왔다. 너에겐 나쁘고 싶지도 않아.
“불 끄고 가.”
대답은 그뿐이었다.
여자는 항상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 여자의 옷차림과 행동을 모조리 자신만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어리석은 남자들아, 죄다 불 끄고 나가줄래.
이서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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