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떠나기 전 집주인인 그녀가 계단을 올라가는 내 뒷모습을 보고 말했다. “발목의 힘줄이 참 예뻐.” 발목의 힘줄을 누군가 예쁘다고 말해준 건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수년 전 처음 만난 날부터 나의 구석구석, 내 안의 무용한 아름다움을 발견해준 사람이었다. 나의 실수와 부끄러움조차 괜찮다고 거듭 다독여준 사람이기도 했다.
지난여름, 덜컥 그녀가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했고 미국으로 돌아가던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 그녀가 내게 말했다. “내가 고향이 되어줄게요. 여기를 고향으로 삼아요.” 겨울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와락 껴안았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내가 아는, 가장 섬세하고 아름다운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고 존재마저 시선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어느 화창한 오후 그녀에게 말했다. “상처를 깊이 입은 사람일수록 극도로 섬세한 감각을 발달시키는 듯해요. 고통을 통과하는 방법으로 감각에 집중하는 길 말고는 보이지 않아서요. 존재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절박하게 그것을 아름다움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릴 만큼 내밀해지기도 하고요. 선생님의 시선이 그래요.”
“서희씨는 어떻게 그걸 알았어요? 서희씨도 그런 사람인 거 난 잘 알아요.”
한때 사랑했던 것은 지워지지 않아한국에서 여름을 보내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갈 집이 생기자 미국 생활이 예전보다 편안해졌다. 양쪽의 삶을 단정히 꾸리며 잘 지낼 수 있을 듯한 예감에 들뜨기도 했다. 용기 내어 전남편에게 평소보다 오래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는지 물었고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덕분에 한달 남짓 체류할 요량으로 한국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리운 이들 곁에 좀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모든 것이 너무 완벽했다. 여행사에 전화를 마치고 일정을 다시 확인하는데, 설렘으로 가슴이 뛰면서도 슬픈 예감이 마음 한 자락을 붙잡았다. 너무 깊고 너무 멀리 바라는 건 좋지 않다는 걸 인생은 내게 등불처럼 알려주곤 했으니까.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비행기표를 끊고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돌아갈 고향이 되기로 한 그녀의 부음을 받았다.
전남편이 평소보다 한결 여유로워진 까닭은 11월이면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 덕분이었다. 아이들도 새로 태어날 남동생에 대한 기대로 잔뜩 부풀어올랐다. 함께 한국에 가자고 아이들에게 제안했지만, 꼬마 남동생과 겨울을 보내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갓 태어난 생명을 맞이하는 한 가족의 흥분과 기쁨이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덩달아 설레었다. 겨울이면 한국을 2주 정도 짧은 일정으로 어렵사리 방문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가볍게 부푼 마음으로 한 달을 훌쩍 넘게 계획할 패기마저 생겼다.
딸들에게 오래전 했던 말이 사실로 증명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엄마와 아빠가 헤어지더라도 한때 사랑했던 것이 지워지는 건 아니라고. 각자의 삶을 살아가더라도 너희를 통해, 그리고 지난 시절을 통해 이어진 거라고. 따로 그러나 같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이니 서로의 행복이 따로의 행복을 지켜주는 거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건 말뿐인 이야기가 아님을 나 또한 확인하게 되었다. 새로운 가정을 꾸리고 삶이 안정될수록, 나를 대하는 전남편의 태도에는 여유로움이 깃들었다. 나는 희망을 품듯 그의 행복을 세차게 응원해야만 했다. 그래야 내 행복도 단단히 커갈 수 있으니까. 새로 태어날 생명을 기다리는 마음이 나 또한 벅차고 황홀한데, 그들 부부에겐 얼마나 감사할 일일까. 우리의 아이들이 새로운 가족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통합되는 것 또한 얼마나 큰 축복인가.
더욱이 내게는 덤으로서의 기쁨도 있었다. 아이들을 두고 한국에 돌아갈 생각에, 약간의 그늘도 마음에 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내가 행복한 만큼 너희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잠시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은, 주양육자가 나 혼자인 외로운 미국 생활에선 쉽게 얻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기쁨과 슬픔의 총량은 누구나 비슷하지만 너무 기뻤던 탓일까, 오후의 끝 무렵이 되자 한국집 입주자들의 단체 카톡방에, 그리운 이의 이름으로 문자가 떴다. 반가운 마음에 바로 열었지만, 송신인은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집 창문을 대신 열어 그녀가 떠났음을 알리는 상주의 소식이었다. 여전히 찬란한 오후의 햇살 아래 올해 겨울을 함께 보내기로 한 약속만이 덩그러니 남아버렸다.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따르고 좋아했던 첫째 딸에게도 부고를 전했다. 소식을 듣자마자 열다섯 딸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잠시 둘이 끌어안고 있다가 함께 산책을 나갔다. 길을 조금 걷다가는 근처 식당에서 아이와 마주 앉아 저녁을 먹었다. 내 앞에는 유난히 맛이 없는 새우파스타가 놓여 있었다. 아이는 시금치샐러드를 시켰다. 입맛이 없다면서도 꾸역꾸역 입안으로 집어넣다가, 아이가 말했다.
“엄마는 카르마(업)를 믿어?” “글쎄, 아마도?”
“엄마, 얼마 전 나한테 새 전화기가 생겼잖아.” “응.”
“그래서 가지고 있던 걸 어떤 러시아 친구에게 줬어.” “그애가 누군데?”
“볼더링짐(실내 암벽등반)에서 알게 된 선수인데, 정말 뛰어난 애야. 열두 살인데 실력이 엄청나.” “왜 그 애에게 주기로 한 건데?”
“새 전화기가 생겼다니까, 자기는 작동이 잘 안 되는 오래전 모델을 쓰고 있다며 내 옛 전화기를 갖고 싶다는 거야. 그래도 혹시나 부모가 원해서 그 전화기를 쓰는 건지 모르니까 우선 여쭤보고 말해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받아도 좋다고 허락했다고 해서 줬지.” “만족해?”
“응, 그 친구의 러시아 아버지가 그랬대. 카르마를 아느냐고. 내가 그 애에게 원하는 선물을 줬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3년간 좋은 일이 연속으로 생기는 카르마를 얻었대.” “너한테 3년 동안 좋은 일이 생긴다니 기쁘다.”
“그런데 엄마, 그 러시아 아빠가 그랬대. 삶에는 슬픔과 기쁨이 함께 있다고. 누구의 삶에든 비슷한 총량의 기쁨과 슬픔이 있대. 그래서 기쁨이 찾아오는 걸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이후 찾아올 슬픔에 왜 나여야만 하느냐고 부르짖으면 안 된대. 또 슬픔이 찾아오면 앞으로 내내 슬픔으로 가득 찰 거라고 절망하지만 말고 이후 찾아올 기쁨을 찾아내야 한대. 그러니까 엄마, 지금 엄마가 슬프더라도 내내 슬플 거라고 생각하지 마. 슬픔만큼 기쁨이 또 찾아올 거야.”
엉망인 내 요리 솜씨를 견뎌준 동지갑작스러운 딸의 위로에 숨이 턱 막혔다. 당장은 그 말에 부응할 수 없었다.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떠나서 느끼는 슬픔을 이후에 찾아올 기쁨으로 바꾸고 싶지 않아.”
아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그녀라면, 그녀처럼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면, 내 죽음으로 비록 슬픔을 줬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슬픔 덕분에 그들 삶에 슬픔의 총량이 덜어지고 더 큰 기쁨이 찾아오길 바랄 것 같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눈물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우리는 화제를 바꿔 새로 태어날 남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얼마나 행복한지 고백하는 아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오래도록 남동생이 생기기를 바랐는데 이제야 이뤄졌다고 했다.
“근데 그거 알아? 그애가 지금 내 나이가 되면 나는 서른이 되는 거야. 그리고 그때 아빠는 예순넷이야. 그러면 있잖아, 그때쯤이 되면 ‘요기’는 이 세상에 없겠지?(요기는 아이 아빠 집에서 함께 기르는 강아지 이름이다.)”
요기를 언급하자마자 아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뜨렸다.
“세상에, 요기가 없다니. 언젠가 요기가 세상에서 사라지다니. 그토록 사랑스러운 존재가 없어지는 거라니.” “그래.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강아지인데, 이 세상을 뜨면 가슴이 아플 거야. 많이 귀엽고 영리한 친구이기도 하고.”
“아니, 엄마. 요기는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멍청해. 그런데 엄마, 멍청해도 사랑스러운걸. 아니, 만일 요기가 사랑스럽지 않아도 난 요기를 사랑했을 거야. 내가 키우는 개니까.”
흘러내리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가끔 말이야, 삶이 오고 가는 것이 부질없이 느껴질 때가 있어.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 왔다 간다는 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결국은 들거든. 네가 말한 슬픔과 기쁨의 총량 이상의 것이 삶에 있는 것 같아. 엄마는 너를 이 세상에 맞이하고 이렇게 너그럽고 책임감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경이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삶이 충분하게 느껴져. 이건 슬픔과 기쁨의 총량 이상의 것이야. 이건 경이로움이야. 요기에게도 우리가 짐작하지 못하는 경이로움이 있을 거야.”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너그럽다고? 전혀 너그럽지 않아. 엄마, 그거 알아? 내가 친구에게 전화기를 준 건 내게 여분의 전화기가 생겼기 때문이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만약 세 개의 사탕이 있는데 셋 다 내가 좋아하는 거면, 아무에게도 안 줘. 점심시간에도 엄마가 싸준 점심, 보통은 절반 정도 안 싸온 친구한테 주곤 하는데, 너무 맛있으면 안 줘.” “다행이네. 대개는 너무 맛있는 정도는 아니잖아?”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 슬며시 웃었다. 내 엉망인 요리 솜씨를 평생을 견뎌준 동지답게.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한 번 너그러운 적은 있었어.” “언제?”
“엄마가 샌드위치와 핫도그를 둘 다 싸준 날이 있었잖아. 그때 친구가 하나만 달라고 하길래, 원하는 걸 선택하라고 했어. 난 핫도그가 먹고 싶었는데 친구도 핫도그를 달라는 거야. 그때 난 조금 너그러웠던 것 같아.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내가 샌드위치를 먹고 친구가 핫도그를 먹었어.”
식사를 끝내고 나와서 걷는데도 아이는 너그러움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기억나? 우리가 오래전에 같이 파리 갔을 때? 엄마가 나한테 노숙하는 여자에게 남은 동전들을 주자고 했잖아. 근데 사실, 그때 주머니 속에 동전 세 개는 남겨두고 줬어. 셋 다 다른 거고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엄마, 나는 너그럽지 않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나를 낳은 경이로 엄마의 삶이 충분하다고 하지 마. 엄마는 엄마라는 경이로 충분해. 그리고 충분했으면 좋겠어.”
참았던 눈물이 다시 터졌다. 아이가 전해준 말은 옳았다. 슬픔이 가면 기쁨이 온다. 이번에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우리의 삶은 여전히 태어나는 중그녀의 카카오톡 배경 사진에 걸려 있던 말을 떠올린다.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지금도 어디선가 눈부시게 태어나는 중일 당신, 선연히 아름다운 당신. 우리의 삶은 여전히 태어나는 중, 천천히. 더 아름답게, 더 경이롭게. 당신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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