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이 막을 내렸다. 2023년 9월19일 남자축구 예선 1차전으로 시동을 걸어 10월8일 폐막식까지 22일 동안, 45개국에서 출두한 1만1970명의 선수가 건투했다. 이 수는 2년 전 도쿄올림픽 때(1만1430명)보다 많다. 오늘날 메가 스포츠 이벤트는 그 지정학적·정치경제학적 부작용에 대해 회의하는 시선 앞에 떳떳하지 못하나, 그와 별개로 땀방울의 가치를 믿고 정진해온 이들은 자신의 필드에서 정직한 드라마를 썼다. 2021년 도쿄(올림픽)와 2022년 카타르(월드컵)가 그러했듯, 2023년 항저우 역시 이야기의 산실이었다.
아시안게임을 결산하며, 올가을 그들이 빚은 수백 편의 작품 가운데 세 편을 추렸다. 선별에 고심이 깊었지만, 순서를 정하는 데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첫 번째는 당연히, 안세영(21)이다.
안세영은 10월7일 배드민턴 여자단식 결승에서 중국의 천위페이(25)를 2-1로 누르고 우승했다. 이 승리로 그는 ‘방수현 이후 29년 만의 금메달리스트’라는 기념비를 세웠지만, 경기의 진가는 기록 속에 요약돼 있지 않다. 이번 아시안게임을 즐겨 시청한 한국인 중에는 전 종목을 통틀어 이 한 판을 최고로 꼽는 이가 많았다. 코트 밖에서 수년간 쌓인 라이벌리(경쟁), 코트 안에서의 처절한 기승전결, 새로운 챔피언의 대관식 등 스포츠에 기대할 수 있는 모든 서사가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안세영은 1세트 막판 오른쪽 무릎 힘줄이 찢어졌다. 테이프를 동여매고 코트로 돌아왔으나 욱신거리는 통증에 연신 눈을 질끈 감는 모습이 클로즈업됐고, 날렵한 점프 스매시도 전매특허 다이빙 수비도 여의치 않은 몸 상태로 2세트를 내줬다. 그의 어머니는 관중석에서 “그만 포기하라”며 울었다. 패색이 짙어 보였는데, 3세트 초입부터 별안간 승기가 넘어왔다. 포기하지 않고 이어온 안세영의 질긴 연쇄 리턴에 천위페이의 다리 근육이 먼저 항서를 띄웠다.
이날 결승전은 90분 동안 치러졌다. 90분은 이번 대회 남녀 단식 전 경기를 통틀어 가장 긴 경기 시간이었고, 2023년 안세영이 치른 77번의 경기 중에서도, 천위페이가 치른 56번의 경기 중에서도 가장 길었다. 공격력이 반감된 상황에서 자기 체력과 수비 실력을 믿고 극단적 지구전을 감행한 안세영의 전략적 승리였다. 3세트 18-8 랠리 도중 천위페이는 다리에 쥐가 나면서 실점했고, 이후 추가점을 내지 못했다. 마지막 매치포인트를 따낸 뒤 안세영은 허물어지듯 누웠다.
천위페이는 오랜 세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 1회전에서 탈락한 뒤 분루를 삼키며 “앞으로 하루도 쉬지 않겠다”고 작심했던 안세영은 2021년 도쿄올림픽 8강에서 다시 패퇴했다. 두 번 모두 상대는 천위페이였다. 안세영은 그에게만 내리 일곱 번 진 끝에 2022년 7월 첫 승을 올렸다. 이후 한국인 최초로 세계선수권을 제패하고 27년 만에 세계 랭킹 1위에 오르는 등 커리어에 새 지평을 열었다. 2023년에는 천위페이와 아홉 번 맞붙어 일곱 번 이겼다.
안세영의 천재성을 구성하는 숱한 재능 가운데 핵심은 집념일 것이다. 여기서 집념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패배는 아프고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데, 벽 앞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기보다는 ‘두고 보자’는 결의를 심부 가장 깊은 곳에 새긴 뒤 다음날부터 연습량을 늘리는 길을 택하는 능력이다. 정신력, 투혼, 꺾이지 않는 마음 등 여러 표현형이 있지만 가리키는 대상은 같다. 그 의지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온 천위페이는 패배 뒤 안세영의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썼다.
“수디르만컵(2023 세계혼합단체선수권대회) 때 내가 너한테 ‘울지 마, 넌 정말 잘해’라고 했지. 아시안게임 뒤에 네가 나를 위로해줬고. 넌 챔피언이 될 자격이 있어. 축하해.”
황선홍호는 2022년 벤투호가 카타르에 입성하기 직전까지 받아냈던 의심의 눈총보다 훨씬 커다란 물음표를 떠안은 채 항저우에 상륙했고, 전대미문의 아시안게임 남자축구 3연패를 이룩했다. 이들의 성공이 갖춘 가장 독특한 미덕은 주·조연을 쉬이 분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득점왕(8골)을 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정우영부터, 두 차례 실점을 부른 실책으로 속앓이가 심했을 주장 백승호까지 고른 활약만큼이나 사연도 풍성한데, 여기에 박진섭(27)을 빼놓을 수 없겠다.
박진섭의 행적을 일언지하에 포착하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는 ‘기구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파란만장하다’고 하는데,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결국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저 최선을 다했다’라고. 박진섭은 대학 시절 U리그 권역 득점왕 출신 ‘공격수’로 시작해, 3부·2부 리그의 ‘미드필더’를 거쳐 지금은 전북 현대의 붙박이 ‘중앙 수비수’를 맡고 있다. 포지션에서는 점점 내려섰고 소속팀은 점점 올라섰는데, 어느 팀 어느 자리에서든 축구는 잘했다.
내셔널리그(K3리그 전신) 소속 대전 코레일 시절에는 리그 득점 2위(2017년)에 오르며 활약했고, 이듬해 K리그2 안산 그리너스로 적을 옮긴 뒤에는 주전으로 구단 역사상 최고 성적(5위)을 냈다. 2020년 대전 하나시티즌에 영입돼 다음 시즌 리그 베스트11에 들었고, 주장 완장을 차고 대전을 K리그1 승격으로 이끈 뒤, 2022년 ‘전주성’에 합류했다. 그리고 입단 첫해 센터백으로 K리그1 베스트11에 뽑혔다. 어떤 역할을 줘도 번듯하게 해치우는 그를 팬들은 사랑한다.
대학교 3학년 때 프로 직행의 길이 좌절되자 ‘당장 뛸 수 있는 팀’을 찾아 움직였고, 이때 정립된 절박할수록 강해지는 생존지향적 태세는 이후 그의 꾸준함과 성실함을 떠받치는 기틀이 됐다. K리그를 통틀어도 스스로를 가장 단단하게 길러냈을 그의 커리어가 암초에 부닥친 것은 2022년 12월이다. 국군대표 운동선수(상무팀) 최종 불합격. 리그 베스트에 들었던 수비수의 탈락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에도 충격을 안겼다. 1995년생으로 나이가 꽉 찬 그의 마지막 상무 입대 기회였다.
축구를 지속하면서도 임박한 병역 의무를 해결하는 길은 사회복무요원(공익)으로 4부리그(K4)를 뛰는 방안뿐이었다. 전성기에 진입한 축구선수로서는 청천벽력이다. 그러던 중 벼랑 끝에서 황선홍 감독이 손을 내밀어 대표팀에 셋뿐인 ‘와일드카드’ 자리를 제안했고, 박진섭의 축구인생은 다시 요동쳤다. 운동선수들의 병역 혜택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이 예전 같진 않지만 그의 우여곡절에는 마음이 동한다. 이번 대회에서 골키퍼 이광연 다음으로 많은 시간(509분)을 뛴 그는 결승전 승리 뒤 엎드려 오열했다.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가장 뜻밖의 이변은 반상에서 벌어졌다. 대만의 쉬하오훙(22)이 바둑 남자 개인전 챔피언에 오른 것이다. 쉬하오훙은 8강부터 결승까지 차례로 박정환, 신진서, 커제를 제압했다. 비공식이긴 하나 프로기사들의 국제적 기력을 비교하는 근거가 되는 고레이팅(바둑 통계 사이트) 세계 랭킹을 보면 대국 시점 기준 차례로 2위, 1위, 3위다. 쉬하오훙은 35위(현재는 20위)였다. 박정환과 신진서는 반집 패했고, 커제는 백을 잡고도 한 집 반 차이로 졌다. 바둑계는 아연실색했다.
한국은 2010년 광저우 대회 이후 13년 만에 아시안게임으로 돌아온 바둑에서 세 종목(남자 개인, 남녀 단체) 석권을 목표로 삼았고,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이 패권 다툼의 들러리로 치부됐던 대만이 난데없이 대마를 잡아낸 형국이었다. 대만이 세계 바둑대회 정상에 오른 것은 2007년 엘지(LG)배 세계기왕전(저우쥔쉰 우승) 이후 역대 두 번째이자 16년 만이다. 대만의 린제한 코치는 인터뷰에서 “누구도 쉬하오훙에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한국과 중국의 강자를 전부 물리치고 우승해 대만 사람 모두가 감동했다”고 말했다.
지고 이기는 일이야 병가지상사다. 이 통설이 바둑이라고 다르진 않겠지만, 톺아볼 가치가 있는 ‘사건’이라는 생각이다. 쉬하오훙은 바둑팬들에게 낯선 이름은 아니다. 입신(9단) 타이틀을 따낸 지는 아직 1년도 되지 않았지만 2022년 대만에서 국내 기전 9개 중 8개를 휩쓸며 대만 바둑의 비밀 병기로 부상했다. 그 스스로는 “나를 대만 역사상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며 “국제대회에서 한국과 중국의 정상급 기사를 이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느새 뜻한 바를 이뤘다.
아울러 또 다른 열쇳말은 인공지능(AI)이다. 중국 <신화통신>은 쉬하오훙의 소식을 전하면서 “인공지능은 프로기사 훈련의 필수 도구가 된 지 오래다. 인공지능 출현으로 인류의 바둑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졌고 선수 간 격차도 좁혀졌다”고 배경을 짚었다. 이 변화를 상징하는 슈퍼스타가 신진서인데, 쉬하오훙도 마찬가지다. 그는 “인공지능 덕에 포석 실력이 크게 늘었다. 지금은 바둑의 모든 단계에서 인공지능으로 복기하는데 명확하게 어디서 졌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쉬하오훙의 역습 이후, 한국은 전열을 정비했고, 단체전에서는 대만(5-0)과 중국(4-1)을 연거푸 완파하며 금메달을 쥐었다. 쉬하오훙은 단체전 4강에서 변상일을 만나 졌다. 중국 바둑의 자존심 커제 역시 단체전 결승에서 신민준에게 역전패했다. 개인전에 이어 결승전 2연패다. <신화통신> 등의 보도를 보면 이번 대회 기간 온라인을 중심으로 중국 내 바둑에 대한 관심이 뜨거웠는데, 그 부담감 때문인지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커제는 은메달을 눈물로 적셨다.
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