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3)는 고등학교 대회를 마치고 미국에 진출한 송태섭(미야기 료타)이 역시 바다를 건너온 정우성(사와키타 에이지)과 이국땅에서 재대결을 벌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슬램덩크’ 타이틀이 올라갈 때부터 흘린 눈물로 이미 눈가가 퉁퉁 부은 오랜 팬도 실은 이 라스트 신에서는 진지한 감동을 받긴 어렵다. 명실상부 작중 최강자인 정우성이야 ‘아메리칸드림’을 다음 이정표로 삼는 일이 이상하지 않지만, 가나가와현 ‘넘버원’도 의심스러운 송태섭이 미국이라니. 영화판 주인공으로 발탁된 포상인 셈 치더라도, 168㎝ 일본인 가드가 미국에서 농구를? 가당키나 하겠느냐 이 말이다.
마음 한편에서 솟구친 생트집을 다독이며 영화관을 나온 것이 약 1년 전 일인데, 그사이 현실이 만화를 따라잡았다. 2024년 11월8일 멤피스 그리즐리스와 워싱턴 위저즈의 2024~2025시즌 미국프로농구(NBA) 경기가 열린 미국 테네시주 멤피스의 페덱스포럼. 4쿼터 후반 116-92로 크게 앞선 멤피스가 가와무라 유키(23)를 투입했다. 이미 가비지(사실상 승패가 결정 난) 게임이었으나 멤피스 홈팬들은 아직 중대한 볼거리가 남은 양 들떠 보였다. 가와무라는 상대 골 밑을 깊게 파고든 뒤 비하인드 백 패스를 내빼서 제이 허프의 덩크를 도왔고, 곧이어 외곽 일대일에서 스텝백(뒤로 한두 걸음 물러선 뒤 쏘는) 3점슛을 작렬했다.
페덱스포럼 장내는 열광했다. 이날 고작 5분을 뛰며 3득점 1도움을 기록한 선수치고는 과분한 흥분을 받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평균 신장이 2m에 육박하는 리그에서 172㎝의 동양인 가드가 코트를 쏘다니며 노룩 패스를 흩뿌리고 외곽포를 꽂아 넣는 모습은 그 자체로 경이로움을 선사한다. 가와무라는 앞서 10월30일 브루클린 네츠와의 경기에서 1분 남짓한 NBA 데뷔전을 치렀고, 11월6일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경기에서 첫 득점(자유투 2점)을 올렸다. 최근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원정(11월10일)에서는 8분간 3득점 4도움을 기록했다. 출전 시간과 경기 기록 모두 완만한 상승세다.
가와무라는 현재 NBA에서 가장 작은 선수고, 역사적으로 봐도 그보다 작은 선수는 10명 정도다. 여느 단신 선수와 마찬가지로 그도 순발력과 기동성, 드리블 기술, 넓은 시야와 농구 지능, 정밀하고 감각적인 패스로 신장의 한계를 보완한다. 영락없는 송태섭인데, 송태섭에게는 없는 장점이 있다. 그는 3점 라인 안팎에서 언제고 림을 조준할 수 있는 엘리트 슈터이고, 위기의 순간 해결사를 자처할 줄 아는 클러치 플레이어이며, 잰걸음으로 끈질기게 들러붙는 성실한 수비수다. 요약하면 에이스의 자질을 두루 갖췄다. 이런 점은 사실 정우성에 더 가까워 보인다. 즉, 송태섭이 미국에 가려면 가와무라만큼은 해야 한다.
가와무라는 NBA 코트를 밟은 일본인으로는 네 번째지만, 일본프로농구인 B리그가 배출한 선수로는 최초다. 후쿠오카 다이이치고등학교 시절부터 일본 농구계의 눈도장을 받아 ‘특별 지정 선수’(대학생 신분으로 프로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예외 규정)로 B리그에 입성했으나, 성에 차지 않았는지 2022년 대학을 중퇴하고 ‘올인’을 선언했다. 이후 두 시즌 연속 B리그 베스트5, 시즌 최우수선수(MVP·2022~2023), 신인왕(2022~2023)을 거머쥐며 국내 무대를 제패했다. 성인 국가대표팀에 승선한 것도 2022년부터였는데, 가와무라는 여기서 일생의 목표였던 NBA 도전을 잠시 미루고 대표팀에서 제 역량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가와무라가 합류한 이후 일본 농구의 성취는 두드러진다. 아사히신문은 이를 “가장 작은 선수가 국제무대의 높은 벽을 넘을 수 있게 도왔다”고 표현했다. 일본은 2023년 8월 국제농구연맹(FIBA) 월드컵 첫 경기에서 유럽의 강호 핀란드를 상대로 역전승을 거뒀다. 다채로운 공격 패턴과 조직적인 공수 전환이 일품이었는데, 단 한 개의 턴오버도 없이 25득점 9도움을 기록한 가와무라가 그 중심에 있었다. 여세를 이어 일본은 48년 만의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냈고, 2024년 7월 파리올림픽에서 개최국 프랑스를 상대로 연장 초접전 대결을 벌이며 다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가와무라는 29득점 6도움으로 양 팀 최다 득점을 올렸다.
파리에서의 여름을 불태운 뒤 가와무라는 멤피스의 초청을 받아 태평양을 건넜고, 프리시즌 5경기 분투(평균 15분 출전 3.4득점 4.2도움) 끝에 ‘투웨이 계약’까지 따냈다. NBA 팀들은 정규 로스터에 15명을 두고, 추가 3명을 투웨이 계약자로 채울 수 있다. 투웨이 계약 선수들은 NBA와 그 산하 성격의 마이너리그인 G리그를 오가며 경기를 뛴다. 최대 45일 안에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면 꿈의 무대에 진입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G리그에 남아 다음 시즌을 기약해야 한다. 가와무라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투웨이 계약을 따냈다”며 “덩치가 크지 않아도 NBA에서 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일본에는 사무라이 재팬(야구), 사무라이 블루(남자 축구), 나데시코 재팬(여자 축구) 등 구기 대표팀에 별명을 지어주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전통이 있다. 농구 대표팀의 이명은 ‘아카쓰키 재팬’이다. 아카쓰키(あかつき)는 일본말로 새벽을 뜻하는데, 예스러운 용법에 따라서는 ‘장래 어떤 일이 실현되는 그날’을 칭하기도 한다. ‘슬램덩크’에는 “영감님의 전성기는 언제였습니까, 저는 지금입니다”(강백호)라는 뜨거운 명대사가 있지만, 적어도 가와무라의 ‘그날’은 지금이 아닐 것이다. 멤피스와 투웨이 계약을 체결한 10월21일도, NBA 첫 3점을 넣은 11월8일도 아닐 것이다. 가와무라의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으나, 아주 멀지도 않은 것 같다.
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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