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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살 라민 야말은 ‘제2의 메시’를 꿈꾸지 않는다

획일화된 순위표로 줄 세울 수 없는 ‘위대함’… ‘위대한 야말’은 계속 갱신될 것
등록 2025-03-14 21:14 수정 2025-03-17 08:56
바르셀로나의 공격수 라민 야말(사진 위)이 2025년 3월5일(현지시각)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벤피카와 경기를 뛰고 있다. AFP 연합뉴스

바르셀로나의 공격수 라민 야말(사진 위)이 2025년 3월5일(현지시각)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 벤피카와 경기를 뛰고 있다. AFP 연합뉴스


2022년 나이키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전부 다 봤어’(Seen It All)라는 제목의 기념 광고를 내놓는다. 연출자는 할리우드의 거장 스파이크 리. 뉴욕의 한 공원에서 손녀뻘의 십 대 소녀 지미와 체스를 두던 중 수세에 몰린 스파이크 리가 대뜸 자세를 고쳐 잡으며 입을 연다. “이봐, 이봐, 이봐, 지미… 넌 네가 한 수 위라고 생각하나본데”로 시작하는 그의 일장연설을 적당히 윤색하여 옮기면 다음과 같다.

 

누가 누가 대단해? ‘고트 논쟁’의 고질적 한계

“그거 알아? 나는 다 봤거든. 스티브 프리폰테인(1970년대 나이키가 최초로 후원한 스타 러너)이 채 24살이 되기 전에 11개의 기록을 경신하는 모습이며 타이거 우즈(골프)가 최정상에 오르는 과정을 봤고, 마이클 조던이 금목걸이 휘날리며 덩크를 꽂아 넣던 그날 밤(1985년 NBA 올스타전) 바로 그 자리에 있었어. 그뿐인가. 이름이 똑같은 세 명의 선수(호나우두, 호나우지뉴, 호날두)가 축구사에 각자의 족적을 새겨 넣는 여정, 코비 브라이언트가 뉴욕 매디슨스퀘어가든에서 경기장 역사상 최다 득점(61점) 기록을 세우는 장면, ‘흑인 여자애는 안 된다’던 사람들을 입 닫게 만든 세리나 윌리엄스(테니스)의 커리어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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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2000년대생 앞에서 ‘2002 한·일 월드컵’을 운운하듯, 환갑을 훌쩍 넘긴 리가 떠벌리는 자랑질에 약이 바짝 오른 스포츠 팬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오랜 세월 팬덤 내부에서 세대 간 반목을 유발해온 유구한 스포츠 논쟁이 깃들어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혹은 순간)는 과거에 이미 존재했으며 앞으로 누가 나오든 변치 않으리라는 주장, 이른바 ‘고트’(GOAT·Greatest Of All Time) 논쟁이다. 기록은 경신돼도 ‘위대함’은 경신되지 않는다는 그들의 논변 앞에서 많은 엠제트(MZ) 스포츠팬이 애타는 마음으로 이런저런 반례를 떠올리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떻게든 반박해야 한다는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숨을 고르며 라민 야말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도 좋겠다.

FC바르셀로나의 공격수 라민 야말이 2025년 3월11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FC 바르셀로나와 SL 벤피카의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에서 팀의 두 번째 골을 넣은 후 자신의 3, 0, 4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FC바르셀로나의 공격수 라민 야말이 2025년 3월11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FC 바르셀로나와 SL 벤피카의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에서 팀의 두 번째 골을 넣은 후 자신의 3, 0, 4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2025년 3월 현재 17살인 야말은 모로코 출신 아버지와 적도 기니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난 스페인의 축구 선수다. 카탈루냐 남동쪽 해안의 작은 마을 로카폰다에서 자란 그는 동네 유소년 경기장 잔디 한번 밟아본 일이 없다. 지역 클럽 등록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야말은 바로 옆 콘크리트 축구장에서 형편이 비슷한 친구들과 공을 찼다. 그러던 중 7살에 FC바르셀로나로 스카우트됐고, 15살에 성인 무대에 데뷔했으며, 그로부터 채 2년이 되지 않아 세계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라섰다. 매년 가장 뛰어난 축구 선수를 가리는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2024년 야말은 십 대 선수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상위 30명에 들었고, 최종 8위를 기록했다. 콘크리트 바닥부터 발롱도르까지, 질풍가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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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카폰다 공터’ 시절로 세리머니 하는 소년

지난 몇 시즌 야말의 경쟁자는 동년배가 아닌(리그에 몇 명 있지도 않다) 역사 속 위인들이었다. 16살 나이로 국가대표팀에 승선해 치른 2024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그는 스페인을 정상으로 이끌며 펠레의 최연소 국제 대회 우승(17살, 1958년 스웨덴월드컵) 기록을 경신했다. 프로 입문 뒤 야말이 첫 100경기에서 생산한 공격포인트는 도합 51점(21골 30도움)이다. 우리 시대의 전설들과 비교해보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36점(17골 19도움), 리오넬 메시가 53점(40골 13도움)으로 비등하거나 이미 넘어섰다. 코트디부아르의 축구 영웅 디디에 드로그바는 감탄한다. “17살 때 저는 파리에서 기차 타는 법을 몰라서 절절매고 있었는데, 야말은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탔네요.”

사정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야말에게서 각자 보고 싶은 것을 보며 ‘역사상 최고의 선수가 될 재목’이라는 찬사를 무람없이 쏟아낸다. 가장 자주 소환되는 인물은 물론 오늘날 축구팬의 다수가 합의한 ‘고트’이자 바르셀로나 직속 선배 메시다. 단순한 공격포인트 생산력을 넘어서서 고도의 축구 지능과 탁월한 기본기, 과감한 기술을 결합해 그라운드 위에서 늘 최적의 판단을 실천하고 경기의 향배를 결정짓는 야말의 플레이에서 메시의 오라를 감지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제2의 메시’라는 수식 속에서 스러져간 숱한 재능을 생각하면 이 기대는 일종의 저주이기도 하다. 보얀 크르키치부터 안수 파티까지, 수많은 이름이 부담에 짓눌려 날개를 펴지 못했다.

2022년 공개된 나이키 50주년 광고 ‘Seen It All’에서 스파이크 리(위)와 인디고 허버드 살크(지미)가 스포츠의 역사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모습. 유튜브 갈무리

2022년 공개된 나이키 50주년 광고 ‘Seen It All’에서 스파이크 리(위)와 인디고 허버드 살크(지미)가 스포츠의 역사를 두고 논쟁을 벌이는 모습. 유튜브 갈무리


무엇보다 야말은 자신을 메시의 그늘 아래 가둘 생각이 없다. 그는 2024년 9월 방송사 인터뷰에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와 비교되는 것은 기쁘지만, 나는 내 자신이고 싶다. 메시의 수준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는 겸양의 표현인 동시에, ‘나는 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잊지 않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야말은 골을 넣으면 양손을 겹쳐 숫자 3, 0, 4를 만든다. 그만의 셀러브레이션인데, 304라는 숫자는 고향 로카폰다의 우편번호를 뜻한다. 야말은 자신의 축구가 7할은 로카폰다 공터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던 그 시절로부터 길러졌다고 말한 바 있다. 뿌리를 언제까지고 소중히 여기는 한, 그가 꾸는 꿈의 최대치는 ‘위대한 야말’이지 ‘제2의 메시’일 수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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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고트 논쟁’의 고질적인 문제는 ‘위대함’을 일직선으로 줄 세우려는 경향성이다. 위대함의 본질은 획일화된 순위표가 아니라 삼차원 공간에 흩뿌려진 다채로운 경이로움의 총체에 가까울 것이다. 다시 나이키 광고로 돌아가자. 스파이크 리의 자랑을 담담하게 듣고난 뒤 “좋아요, 아저씨의 역사는 존중하는데요”라며 운을 뗀 지미는 킬리안 음바페, 야니스 아데토쿤보, 루카 돈치치, 오사카 나오미, 사브리나 이오네스쿠의 이름을 읊으며 ‘이런 선수 본 적 있느냐’고 되묻는다. ‘라떼는 말이야’ 열변을 토하던 어르신들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요즘 선수들이다. 지미는 덧붙인다. “아저씨는 다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이제부터가 진짜예요.” 3년 전 이 광고가 나왔을 때 야말은 바르셀로나의 이름 모를 볼보이였다. 우리는 정말이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이다.

 

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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