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14일 여름밤,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미켈롭 울트라 아레나 3점 라인에 선 사브리나 이오네스쿠(26·뉴욕 리버티)는 기계 같은 슛폼으로 포물선을 찍어냈다. 2구부터 21구까지 20개의 슛이 연달아 그물을 통과했고, 전체 27개 슛 중 2개만이 빗나갔다. 40점 만점에 37점. 전미여자프로농구(WNBA)는 물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부터 올스타전 3점슛 콘테스트를 해온 미국프로농구(NBA)까지 통틀어도 최고점 신기록이었다. 경기장은 뒤집혔다. 프로 데뷔 4년차였고 3점슛 대회는 첫 출전이었다. 이오네스쿠는 엑스(옛 트위터)에 해시태그를 달아 전설을 소환했다.
“슛 아웃(Shoot Out)? #스티븐커리”
스티븐 커리(36·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소개하기 위해 이 지면을 새삼 할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최소한의 요약을 하자면, 그는 경기당 평균 10개의 3점슛을 던져 4개를 성공시키는 선수다. NBA에 3점슛이 처음 도입된 1979년에는 경기당 평균 2.8개의 3점슛이 시도됐고, 이 가운데 0.8개가 림을 갈랐다. 그런데 강산이 서너 차례 변하고 나니, 혼자서 평균 10개를 던지는 선수가 등장했다. 커리 이후 농구의 기본 원리 몇 가지가 재정립됐고, 다시는 커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그러므로 우리가 궁금한 점은, 사브리나 이오네스쿠가 누구냐는 것이다.
이오네스쿠의 부모는 냉전의 끝자락, 루마니아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넘어왔다. 루마니아계 이민자 집안의 차녀 이오네스쿠는 세 살 때부터 농구공을 잡았고, 남자 형제들과 어울리며 농구를 배웠다. 남자아이들은 여자아이에게 좀체 패스하려 하지 않았기에, 그는 공을 쟁취하고자 리바운드 잡는 법부터 배워야 했고, 체격적인 열세에 대응하기 위해 패스 뿌리는 법을 연마해야 했다. 대학 농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오네스쿠의 대표 기록으로는 남녀 통합 최다 트리플더블(24회)이 있다. 어린 시절 남다른 훈련 비결에 비춰보면 수긍이 가는 지표다.
대학 시절의 이오네스쿠는 이미 스타였다. 11년 동안 전미대학체육협회(NCAA) 토너먼트는 구경도 못했던 오리건대학 여자농구팀은 이오네스쿠 입학 이후 8강(2017년), 8강(2018년), 4강(2019년)을 달성했다. 평균 관중 수는 1600명에서 1만 명으로 뛰었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멘토를 자처했고, 르브론 제임스가 경기 클립을 염탐했다. 나이키는 사상 처음으로 여자 대학 농구 선수의 유니폼 레플리카를 제작했고, 물량은 하루 만에 동났다. 오리건대학은 ‘사브리나 복음’이라는 특집 기사를 냈다. 이 기사는 ‘오리건대학 졸업생용 러시모어산(미국 대통령 4명의 얼굴이 새겨진 석상으로 유명한 산)이 있다면 이오네스쿠를 새겨넣어야 한다’는 학내 여론을 전하고 있다.
2020년 WNBA에 입성한 이오네스쿠는 2023시즌 128개의 3점슛을 넣었다. 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3점슛 기록이었다. 성공률은 44.8%.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 2연패 시절의 커리(44.3~45.4%)와 엇비슷하고, 이번 시즌의 커리(40.5%)보다 높다. 마침 3점슛 대회에서도 커리의 종전 기록(2021년 31점)을 깨고 정상을 꿰찼으니, ‘계급장 떼고 한판 붙읍시다’ 소리가 나올 만했다. 무엇보다 커리는 이오네스쿠의 우상이었고, 커리 또한 이오네스쿠의 팬이었다. 이오네스쿠가 3점슛 대회 신기록을 세우던 날, 커리가 먼저 “말도 안 돼!”라며 ‘해시태그 사브리나’를 달았다.
‘커리 대 사브리나’는 꿈의 매치업이 됐고, NBA 올스타전이 임박한 2024년 1월 급물살을 탔다. 연습경기 중 커리가 이오네스쿠의 3점슛 도전장을 언급하며 “이거 손 좀 봐야겠다”며 씩 웃는 장면이 스포츠방송 <이에스피엔>(ESPN) 카메라에 포착됐고, 곧장 이오네스쿠가 “해봅시다! 3점 라인에서 만나요”라며 의욕적인 트위트를 띄웠다. 이 매력적인 이벤트를 놓칠 리 없는 NBA 사무국이 발 빠르게 움직이면서 대결이 성사됐다. 선수 출신 방송인 제이제이 레딕은 그 기대감을 이렇게 전했다. “우리 집에 애가 둘 있는데요, 7살이랑 9살. 얘네들의 올스타전에 대한 관심사는 오로지 ‘커리 대 사브리나’뿐이었어요.”
사상 첫 NBA-WNBA 맞대결을 앞두고 말잔치가 무성했다. ‘누가 이길 것 같으냐’는 질문에 커리의 팀 동료 클레이 톰프슨과 드레이먼드 그린은 각각 사브리나와 커리로 갈렸다. 카이리 어빙은 사브리나 승을 점쳤고, 케빈 듀랜트는 커리를 골랐다가 사브리나로 바꿨다. 음지에선 ‘WNBA는 NBA보다 3점 라인이 짧지 않으냐’는 식의 도발이 줄을 이었는데, 이오네스쿠가 당초 계획된 WNBA 라인이 아니라 NBA 라인에서 던지겠다고 밝히며 분위기를 달궜다. NBA 3점 라인은 WNBA보다 49㎝가량(가운데 기준) 골대에서 더 멀다.
2024년 2월17일. 마침내 이오네스쿠와 커리는 같은 라인에 섰다. 한국 시각으로는 2월18일 일요일 아침, 나는 두 사람의 단판 승부를 시청했다. 생중계 이후에도 여러 차례 돌려봤지만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위대한 대결이었다. 앞서 펼쳐진 덩크 콘테스트도, 남자 선수들의 3점슛 콘테스트도, 다음날 열린 올스타전 본게임도 모두 잊히고 이 대결만이 사람들 뇌리에 남았다. 첫 순서로 나온 이오네스쿠는 27개 중 19개(26점)를 넣었고, 커리는 27개 중 20개(29점)를 넣었다. 3점 차이로 커리가 이겼고, 둘은 환하게 웃으면서 포옹했다.
1973년 테니스에서도 ‘세기의 성 대결’이 펼쳐진 바 있다. 양상은 전혀 다르다. 당시의 스토리라인이 여성을 멸시하고 헐뜯던 바비 릭스를 응징하는 빌리 진 킹의 복수극이었다면, 이오네스쿠와 커리는 상호 존중과 진지한 경쟁, 순도 높은 엔터테인먼트로 승부를 채워넣었다. 다시 제이제이 레딕의 평가를 인용한다. “남자 농구, 여자 농구가 아니라 ‘농구’의 위대한 순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잃을 것은 많고 얻을 것은 희박한 승부였는데, 끝나고 나니 둘 다 챔피언처럼 보였다.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너무나 좋았다.”
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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