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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드릭 러마, 미 슈퍼볼 1억 시청자 앞에서 ‘혁명’ 라이브

시적 장치 가득 채운 ‘디스곡’으로 그래미 5관왕, 새로 쓴 힙합 역사
등록 2025-02-14 20:31 수정 2025-02-15 18:05
켄드릭 러마가 2025년 2월9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시저스 슈퍼돔에서 열린 미국프로풋볼(NFL) 59회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 공연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켄드릭 러마가 2025년 2월9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시저스 슈퍼돔에서 열린 미국프로풋볼(NFL) 59회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 공연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슈퍼볼은 미국프로풋볼(NFL) 시즌 챔피언을 가리는 제전이지만 경기가 전부는 아니다. 생중계로만 1억 명이 지켜보는 초국적 시장을 대상으로 거대기업들이 브랜드의 사활을 걸고 준비하는 광고 경연, 당대를 대표하는 팝스타가 자신의 음악 경력을 집약하여 펼쳐놓는 하프타임쇼 같은 볼거리에 본게임보다 이목이 쏠리기도 한다. 2025년 2월9일(현지시각)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시저스 슈퍼돔에서 열린 ‘59회 슈퍼볼’도 마찬가지였다. 현존 최강의 쿼터백 패트릭 머홈스의 슈퍼볼 역사상 첫 3연패 달성 여부(실패했다) 못지않게, 현존 최고의 래퍼 켄드릭 러마의 첫 단독 하프타임쇼를 궁금해한 이가 많았다. 그들의 기대감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켄드릭 러마는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 ‘낫 라이크 어스 ’(Not Like Us)를 부를 것인가.’

 

낫 라이크 어스를 불렀다

누가 뭐래도 지난 1년은 러마의 해였다. 러마는 2024년 5월4일 싱글 ‘낫 라이크 어스’를 발표했고, 빌보드 핫100 차트에 1위로 데뷔, 랩송 차트에서는 역대 최장 기간 1위 기록(21주)을 경신했다. 이 곡은 현재까지 세계 최대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만 10억 회 재생됐고, 피치포크(1위), 빌보드(1위), 롤링스톤(2위) 등 유력 음악 잡지에서 ‘올해 최고의 노래’ 상위권을 휩쓸었으며, 기어코 얼마 전 그래미 시상식에서 2개의 본상(올해의 레코드, 올해의 송) 포함 5관왕을 기록했다. 러마는 힙합을 넘어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을 명반을 몇 개나 내고도 번번이 그래미에서 고배를 마셔왔다. 뒤늦게 주어진 보상이라면 수긍할 만한 일이다. 다만 공교로운 점은 이 노래가 ‘디스곡’이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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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일상어로도 쓰이는 ‘디스’(Diss)는 힙합의 하위문화를 가리키는 용어로 간단히 말해 누군가를 씹는 노래를 뜻한다. 랩으로 벌이는 길거리 싸움이고, 판이 벌어진 뒤에는 여론 추이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이자 승자와 패자 모두 막대한 관심을 수확하는 비즈니스다. 힙합 장르의 역사는 디스의 역사로도 요약되기도 하는바, 1990년대 미국 동·서부 힙합의 거장이 모두 총격을 당해 사망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던 ‘투팍 대 비기’(1994~1997), 뉴욕의 왕을 두고 겨루며 디스의 상업적 효과를 몸소 입증해 보인 ‘제이지 대 나스’(2001~2005) 같은 이름을 여러분도 들어보았을 것이다. ‘낫 라이크 어스’는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투팍 대 비기’ ‘제이지 대 나스’로 기록될 디스전의 타이틀곡이다.

필라델피아 이글스 선수들이 2025년 2월9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시저스 슈퍼돔에서 열린 미국프로풋볼(NFL) 59회 슈퍼볼에서 캔자스시티 치프스를 꺾고 우승한 뒤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를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필라델피아 이글스 선수들이 2025년 2월9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시저스 슈퍼돔에서 열린 미국프로풋볼(NFL) 59회 슈퍼볼에서 캔자스시티 치프스를 꺾고 우승한 뒤 빈스 롬바르디 트로피를 들고 있다. AP 연합뉴스


이삼중 은유·상징으로 ‘모욕·멸시’ 중화

상대는 캐나다의 팝스타 드레이크였다. 마이클 잭슨이나 테일러 스위프트를 호출하지 않는 이상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출중한 성공을 거둔 드레이크는 2023년 말엽부터 몇몇 래퍼와 시비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확전 양상을 보이던 전황은 2024년 4월19일 드레이크의 ‘푸시 업스’(Push Ups)와 4월30일 러마의 ‘유포리아’(Euphoria)가 잇따라 발표되면서 드레이크 대 러마의 맞대결로 치달았고, ‘낫 라이크 어스’는 그 승부의 마침표를 찍는 곡이었다. 5월3일 드레이크가 ‘패밀리 매터스’(Family Matters)에서 러마의 가족을 건드리며 선을 넘자, 곡 발표 몇 분 만에 러마는 예상했다는 듯 갑절은 더 살벌한 패륜적 수사가 담긴 곡 ‘밋 더 그레이엄스’(Meet the Grahams)로 반격했고,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낫 라이크 어스’를 내놓으며 쐐기를 박았다.

5일간(4월30일~5월4일) 발표된 러마의 디스곡들은 모두 드레이크를 겨냥한 인격모독과 사생활 폭로, 매도, 멸시로 점철돼 있다. 언어로 벼려낸 대전용 흉기. 이것뿐이라면 여느 디스곡과 다를 바 없겠으나, 이 트랙들의 작사가인 러마가 힙합 음악으로 퓰리처상(2018)을 받은 시인이자, 흑인 사회의 아픔과 모순을 대변해온 민권운동가라는 데 결정적 차이가 있다. 러마는 이중·삼중의 은유와 상징으로 노랫말을 가득 채워 험악한 주장을 재치로 중화했고, 문장의 행간에는 흑인 문화와 힙합 커뮤니티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흩뿌려놓았다. 이 정교한 문학적 장치는 캐나다 아역배우 출신의 팝스타(드레이크)와 콤프턴 빈민가 출신의 예술가(러마)라는 구도를 만들어냈고, 곡의 공감대를 사회적 층위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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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낫 라이크 어스’는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귀에 감기는 세련되고 흥겨운 비트에 맞춰 ‘그들은 우리와 달라’(they not like us)라고 후렴구를 외칠 때 ‘그들’은 비단 드레이크에 국한되지 않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이 노래에는 함께 따라 부르는 것만으로 모종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우리’의 자존감을 북돋는 효과가 있었고, 그 효능을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당연히 스포츠 업계였다. 콤프턴(러마의 고향)이 속한 로스앤젤레스 연고의 엘에이(LA) 다저스가 안방 구장에서 시즌 내내 틀어대고, 국제 친선전에서 캐나다(드레이크의 조국)를 꺾은 아르헨티나 남자축구 대표팀이 소셜미디어 계정에 포스팅하는 등 ‘낫 라이크 어스’는 ‘우리’의 단합과 승리를 자축하는 모든 이들의 찬가로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스포츠 경기장마다 울려 퍼진 이유

러마는 이번 하프타임쇼 도입부를 이렇게 열었다. “이제부터 혁명이 방송을 탈 거야. 당신들은 적절한 때를 택했지만 사람을 잘못 골랐으니까.” 이는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길 스콧헤론의 노래 ‘혁명은 텔레비전에서 중계되지 않을 것이다’(The Revolution Will Not Be Televised·1971)를 오마주한 대사다. 이 곡은 오직 백인들만 나오는 텔레비전에 유색인종의 투쟁은 중계되지 않으니 밖으로 나오라는 선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반세기가 흘러 슈퍼볼을 보니 한 흑인 아티스트가 1억 명의 시청자 앞에서 ‘이제부터 혁명을 중계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오랜 세월 천박한 문화라 손가락질받아온 장르에서 소외된 이들의 삶을 표현해온 예술가가 쇼비즈니스의 꼭대기에 서서 ‘당신들이 원하는 그 노래를 들려주겠다’고 말한다.

그 노래는 물론, ‘낫 라이크 어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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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

켄드릭 러마가 2025년 2월9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시저스 슈퍼돔에서 열린 미국프로풋볼(NFL) 59회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 공연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켄드릭 러마가 2025년 2월9일 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의 시저스 슈퍼돔에서 열린 미국프로풋볼(NFL) 59회 슈퍼볼 하프타임쇼에서 공연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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