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장의 사진이 긴 시차의 터널을 지나 나란히 놓였다. 사진 속 사람들의 옷차림은 하나같이 군복이고, 질서 정연하게 무리 지은 모습에 규모 또한 어금버금해 보인다. 그런데도 느낌은 전혀 다르다. 똑 닮은 피사체가 이렇듯 정반대 이미지로 다가온다면 그 의문을 풀 열쇠도 우선 두 사진 안에서 찾아야 할 터이다.
마이크 앞에서 조아리는 이는 웃옷 양쪽 깃에 별을 세 개씩 달았다. 중장이다. 별을 한 개씩 단 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다. 준장이다. 2024년 12월10일 국회 국방위원회 장면이다. 한자리에 수십 개 별이 뜨고 수십 송이 무궁화(영관급 계급장)가 피는 사태만 해도 초현실적인데, 50명 넘는 고위급 현역 군인은 잔뜩 주눅 들어 서로 눈치를 살피는 듯하다. 다들 어딘가 모르게 요의를 참고 있는 인상마저 감돈다.
또 하나의 사진은 34명이 3단으로 나란히 앉거나 서서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망점이 성긴데도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자세뿐 아니라 득의에 찬 표정도 어렵잖게 읽어낼 수 있다. 계급장까지는 식별되지 않는다. 사진 설명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합 28개의 별과 47개의 무궁화란다. 12·12 군사반란 주역들이 이틀 뒤인 1979년 12월14일 국군보안사령부(현 국군방첩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단체 기념사진이다.
두 사진의 대비는 45년이라는 물리적 시차만으로 온전히 설명될 수 없다. 12·3 내란 실패와 관련해 “21세기 군인은 다르다”는 말이나 ‘엠제트(MZ) 계엄군’ 같은 신조어가 돌고 있다.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으나, 인상평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간부급은 확신에 이르기가 훨씬 어렵다. 2023년 7월19일 채 상병 사망 이후 최고위급들이 보여준 적반하장뿐 아니라 당시 영관급 현장 지휘관들의 행태도 21세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두 사진의 배경에 상반된 서사가 드리운 것부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적어도 제 눈에 ‘성공한 거사’였다. ‘지금 이 사람들’에게 12·3 내란은 ‘실패한 거사’인가. 우두머리가 보기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사진 속에 없다. 피사체 가운데 상당수는 우두머리의 명령을 대놓고 거부하지 못한 죄를 고해한다. 여기에 쿠데타가 실패하는 데 나름 자신의 힘과 의지를 보탰다고 들림 직한 해명성 폭로를 이어간다.
결말이 달랐으면 어땠을까. 단언하기는 어렵다. 다만 21세기 고위급 간부들도 45년 전 사진 속 인물들과 맞붙었던 이들의 이후 삶을 모르지 않는다. 육사 출신의 한 예비역 장교는 현역 대령인 후배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는 명령을 받으면 거부할 수 있겠나?” 답은 질문이 되어 돌아왔다. “그랬다가 (친위 쿠데타가) 성공하면 정승화(12·12 당시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꼴이 나지 않을까요?”
당시 반란군 진압에 나섰던 대표적 인물로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소장), 정병주 특전사령관(소장) 등이 꼽힌다. 이들이 잃은 건 미래만이 아니었다. 장 사령관은 가족이 풍비박산 나다시피 했다. 1980년 강제전역 두 달 만에 아버지가 폭음 끝에 숨지고, 1982년에는 대학생이던 외아들이 행방불명 뒤 한 달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병주 사령관은 자신이 1988년 실종됐다가 넉 달 만에 야산에서 목맨 주검으로 발견됐다.
진압군의 적이었던 사진 속 인물들은 이후 삶에서도 진압군과 정반대의 길을 갔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피의 학살극을 벌인 끝에, 우두머리였던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소장)은 석 달 만에 대통령 자리에 올라 8개월에 걸친 쿠데타를 매조지고 7년간의 철권통치를 이어갔다. 2인자였던 노태우 제9보병사단장은 1987년 6·10 민주항쟁의 위기를 통과한 뒤 직선제 대통령이 됐다. 둘은 재임 기간에 천문학적인 부도 쌓았다. 휘하 일당은 노른자위 권력기관의 우두머리나 장관, 국회의원 같은 자리를 주거니 받거니 꿰찼다.
사진 속 무리가 다시 피사체가 된 건 9년이 지나서였다. 1988년 11월2일부터 두 달 동안 이어진 국회 ‘5공 청문회’였다. 전두환 정권의 비리와 5·18 학살 진상조사를 위해 열린 이 청문회에 무리 지어 불려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자세와 표정은 12·12 내란 성공 기념사진 속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시종 뻣뻣했고, 뻔뻔했다. 당시 대통령이 사진 속 일원이었기 때문이라는 건 세 번째 피사체가 되면서 입증됐다.
1996년 1월16일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음모 사건 항소심 선고가 내려지던 서울고등법원 법정.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해 모두 16명의 피고인이 섰다. 죄수복을 입은 자세와 표정에는 비굴함마저 엿보였다. 장기오(12·12 반란 당시 제5공수특전여단장)와 조홍(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장)은 이미 국외로 도피한 상태여서 그 자리에 서지 않았다. 과거 사진 속 득의에 찬 얼굴에는 기회주의자의 민낯이 가려 있었다.
도합 28개의 별과 47개의 무궁화 가운데 상당수는 영원히 졌다. 천수를 누린 자연사였다. 일부는 여태 죽지 않았다. 정호용(제50보병사단장), 최세창(제3공수특전여단장), 박희도(제1공수특전여단장)는 군사반란 40 년이 되던 2019년 12월12일에 전두환과 함께 호화 만찬을 즐겼다. 박희도는 지금도 극우집회에 나타나 연설하고 있다. 박준병(제20보병사단장), 허화평(국군보안사령부 비서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권정달(〃 정보처장), 이필섭(제9보병사단 29연대장)도 장수하고 있다. 12·3 내란사태를 보는 그들의 눈빛은 아련할까.
12·12 당시 교전 과정에서 사망한 고위급은 한 명도 없다. 사망자는 세 명. 특전사령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당시 35살)이 그나마 가장 고위급이었다. 국방부 헌병대 정선엽 병장, 수도경비사 33헌병대 박윤관 일병은 20대 사병이었다. 사진 속 무리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존재였다. 영문도 모른 채 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5m 거리를 두고 누워 있다. 유족은 1995년 12월12일 그곳에서 만나 처음 손을 맞잡았다. 정 병장의 사인은 당시 ‘오인 사격’으로 조작됐다가 2022년에야 진상이 규명됐다. 43년 만이었다.
12·3 내란사태에서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교전 자체가 없었다. 교전이 없었던 건 윤석열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였기 때문이다. 국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점령 대상 기관은 비무장이니, 화기끼리 충돌할 가능성은 애초 없었다. 그럼에도 군 전체의 일반의지를 무시한 소수 엘리트의 패권 의지가 관철됐다는 점에서 12·12 반란과 다르지 않다. 45년 만에 재림한 하나회가 곧 충암파인 셈이다.
충암파가 하나회보다 훨씬 소수인 건 사실이지만, 친위 쿠데타에 핵심적인 라인업은 제대로 갖췄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박종선 국방부 정보본부 산하 777사령관의 충암파 라인에 경찰청을 관할하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까지 합치면, 12·12 반란 당시 전두환에 견줘 모양새가 크게 빠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국방부 장관이 한배를 탔고, 그 자신이 대통령이어서 재가를 받아야 할 상전이 없는 것은 전두환보다 외려 유리했다. 사실 전두환의 보직은 지금의 여인형 사령관과 같았다. 외려 직급(소장)은 낮았고 나이(48살)도 어렸다.
12·3 내란 실패의 원인을 군사적으로 한정해서 보면, 무력이 아니라 심리였다. 내란에 연루된 비충암파들은 비상계엄의 당위성, 필요성, 합헌·합법성 어느 것 하나도 공감하거나 확신하지 못했고, 이런 면모는 무력이 집중된 국회의 현장 지휘관들의 혼선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내란 가담자 가운데 최초로 내부고발과 대국민 사과의 모양새를 취한 특전사령관 곽종근의 양면적 모습은 상징적이다. 생방송에서 주장한 것과 달리, 그는 비상계엄 선포 계획을 이틀 전부터 알았던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위헌·위법한 명령을 즉시 거부하지 못한 지휘관들은 곽종근처럼 회색지대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12·12 군사반란에 뛰어든 하나회 신군부 세력과 근본적으로 다를까. 군 문화에 관해 비판적으로 연구해온 최병욱 상명대 국가안보학과 교수는 유보적이었다. 우리 군은 여전히 문화 지체 상태라는 진단이다. 최 교수는 “비상계엄 자체가 너무나 뜬금없었던 것이 결정적이었다”면서도 “‘국민의 군대’라는 기본정신이 우리 군에 얼마간 내면화된 것이 사태 악화를 막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016년 6월 제정된 군인의 지위 및 복무에 관한 기본법 제5조(국군의 강령)에는 ‘국민의 군대’와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가 명문화돼 있다. 또한 이 법 제24조(명령 발령자의 의무)는 법규에 반하는 명령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명령 복종의 의무(제25조)는 있어도 명령을 거부할 권리와 사유 등은 없다. 최 교수는 “미국 육군은 충성의 대상을 ①헌법 ②육군 ③부대 ④동료로 명확히 규정하고 있다. 우리 군이 반사적으로 생각하는 ‘직속상관’은 없다”며 “상관의 위헌·위법한 명령을 거부할 권리와 국가의 보호 의무를 법제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식을 사병으로 군에 보낸 부모들은 12·3 내란 때 가슴을 쓸어내렸다. 비상계엄 선포 직후 강원도 접경지에서 복무 중인 군인들에게 유서를 쓰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주장이 어느 부모로부터 제기되기도 했다. 시민들은 집회 현장에서 나라를 지키는 의무를 다하려는 청년들이 시민과 적으로 대면해야 하는 상황에 분개했다. 독일 연방방위부의 ‘국방정책 가이드라인’에 담긴 ‘제복 입은 시민’이라는 개념은 시민으로서 군인의 정체성과 권리, 책임을 담고 있다. 이에 따라 군인은 범죄적 명령 등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쿠데타의 재발을 막는, 낡은 사진을 영원히 묻기 위한 첫 단추는 군인의 시민적 권리 강화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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