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살펴보면 자유시장과 자유주의 정치 시스템이 있는 곳에서 번영과 풍요가 꽃을 피웠습니다. 저는 무너진 헌법 가치를 바로 세우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복원하여 더욱 강화하는 것이 대통령의 가장 큰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2024년 총선을 20여 일 앞둔 3월20일 서울 여의도 63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상공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대통령 윤석열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 책으로 밀턴 프리드먼(1976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의 ‘선택할 자유’를 꼽을 정도로 ‘자유’와 ‘시장’을 강조했던 윤석열은 그러나, 2024년 12월3일 내란의 밤을 지나면서 철저하게 ‘반자유’ ‘반시장’적인 모습을 마음껏 드러내고 있다.
12·3 내란사태 당시 윤석열이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박안수(전 육군참모총장) 명의로 발표한 계엄사 포고령은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하고’(1항),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으며’(3항), ‘포고령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할 수 있으며, 계엄법에 따라 처단한다’고 경고했다.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의 계엄사 포고령이 그 자체로 위헌·불법이기도 하지만 경제·산업계에서는 윤석열의 계엄이 “반시장, 반경제적이기도 하다”고 평가한다. 세계적인 석학 아마르티아 센(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은 “지금까지 인류 역사를 돌이켜보면 정기적으로 선거가 실시되고, 비판적 야당이 있으며, 언론의 자유가 보장돼 검열제도가 없는 나라에서는 기근이 발생한 적이 없다”고 단언하면서 “정치 지도자 개인의 역량에 의존하면 한 번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는 어떤 실수가 발생해도 대중의 참여를 통해 시정할 수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센의 관점에서 보면 윤석열의 계엄은 ‘경제적 자해’와 다름없다.
한국의 경제상황과 시장을 평가하는 대표적인 지표인 원-달러 환율은 윤석열의 계엄 선포 직후 치솟기 시작했다. 계엄 전인 2024년 11월까지 환율이 1300원 후반대에 머물렀지만 계엄 직후 1446원대까지 급등했다. 여야가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의 탄핵을 놓고 씨름하면서 정치적 불확실성이 높았던 12월 말에는 1486원을 넘겼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쳤던 2009년 3월16일(1488.5원) 이후 15년9개월 만에 최고치다. 2024년 12월 한 달을 놓고 보면 엔화와 유로화 등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화의 가치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DXY)는 1.5% 높아진 데 견줘 원화 대비 달러화의 가치는 4.8%나 뛰었는데 이는 원화의 가치가 주요 6개 통화에서 크게 하락했음을 의미한다.
국책연구원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25년 1월8일 발간한 ‘KDI 경제동향 1월호’에서 “2016~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국면에서 원-달러 환율 증가폭이 7%였던 것에 견주면 윤석열 계엄·탄핵 국면의 5%는 상승폭이 제한적”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지만, 박근혜 탄핵 국면을 보더라도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뒤 안정적으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진행되고, 황교안 국무총리의 대통령 대행체제가 자리잡은 뒤에야 환율이 안정을 되찾았다. 피의자 윤석열의 체포를 놓고 수사기관과 대통령 경호처가 신경전을 벌이며 최상목 기획재정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겸직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선 섣불리 안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1월8일 국민연금의 위험 분산으로 추정되는 달러 매도로 인해 일시적으로 환율이 1440원대로 내려왔지만, 저녁이 되면서 다시 1460원대로 오르는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KDI는 앞서 언급한 보고서에서 “우리 경제는 불확실성 확대에 따른 경제심리 위축으로 경기 하방 위험이 높아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며 “대외 불확실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국내 정치 상황으로 경제심리가 악화됐고, 가계와 기업의 심리지수가 큰 폭으로 하락했다”고 분석했다.
윤석열의 불법 계엄 선포와 탄핵·수사 국면, 정치 불안정성 증대가 원화의 가치를 떨어트리고 경제를 위축시킨 것인데 적게는 수조원에서 많게는 수십조원에 이르는 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경제경영 전문 매체인 포브스는 계엄 이후 ‘윤석열의 기행이 대한민국 국내총생산(GDP) 킬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기사에서 “윤석열은 남한의 김정은”이라고 혹평했다. 기사를 쓴 윌리엄 페섹 기자는 “윤석열은 임기 동안 기록적인 가계부채를 줄이는 데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성 불평등 해소, 세계 최저 수준인 출산율 하락, 지나치게 수출 의존적인 경제 구조 개선에 성과를 내지 못했다”며 “윤석열은 외국인 투자자로 하여금 한국의 과거 군사정부를 떠올리게 했고, 앞으로 아시아의 계엄을 이야기하면 인도네시아, 미얀마, 필리핀, 타이에 이어 한국도 꼽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업과 산업계가 받은 충격의 진원은 비상계엄이 초래한 불확실성의 극대화에서 비롯됐다. 1월8일 한국거래소 자료를 보면 계엄 직전인 2024년 12월3일 2500.10이었던 코스피 지수는 12월30일 2399.49로 4.02% 하락했다. 계엄 이후 연말까지 증발한 시가총액이 82조9300억원에 이른다.
수십조원이 시장에서 빠져나간 것도 문제지만, 기업 관계자들은 정치적 불안이 시장경제에까지 옮겨붙은 상황에서 계엄·탄핵 국면이 언제 마무리될지 가늠할 수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우려한다. 당장 2025년 1월20일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전세계 국가와 기업이 향후 미국의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통상적으로 미국의 대통령이 바뀌면 기업들은 한국의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력과 함께 콘택트 포인트를 찾고 교감하면서 관세 등의 정책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교섭을 이끌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이어지면서 한국 기업들은 이 같은 대응을 전혀 못하고 있다. 장재훈 현대차그룹 부회장은 1월6일 경기 고양시 현대 모터스튜디오에서 열린 신년회에서 트럼프 행정부 출범과 현대차그룹의 대응 방안을 묻는 기자에게 “아직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접촉하지 않았다. 그런 부분은 전체적인 (정책) 방향을 고려해 차분히 준비해야 할 상황”이라고 조심스럽게 답변했다. 2025년 1월부로 대표이사가 된 호세 무뇨스는 “정책을 설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정치인이고, 우리의 역할은 어떤 정책이든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 상황이라는 변수에 개의치 않고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는 다짐으로 언론은 분석했지만 기업의 속내는 좀더 복잡하다. 국내 한 자동차 수출기업 해외사업팀 관계자는 한겨레21에 “미국 대통령 교체 전후로 전세계 기업들이 차기 미국 행정부 관계자들과 미팅을 갖고 교감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 기업들은 접촉하려고 해도 그쪽(정부 관계자)에서 만나주지 않는 상황”이라며 “제발 만나달라고 읍소해도 ‘한국은 어차피 곧 대통령이 바뀌고 정부 내각도 모두 바뀔 것 아니냐, 바뀌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차갑게 답하고 사실상 무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기업 인사 가운데 트럼프 당선자 쪽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은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뿐이다. 정 회장은 2024년 12월 중순께 트럼프 당선자와 만나 식사하고 10분 정도 대화를 나눈 것으로 알려졌지만, 현지 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대화 내용은 공개할 수 없다. (트럼프가 한국에 대해) 특별한 언급은 없었다”고 했다. 산업계 분위기로 미뤄보면 정 회장도 경제 현안을 논의할 수는 없었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자동차 산업과 함께 한국 경제의 두 기둥으로 꼽히는 반도체 업계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내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대기업들은 원-달러 환율이 올라도 제도적으로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장치를 갖고 있어서 당장에 위협이 되지는 않지만, 정치적 불안이 장기화돼 2025년 계약 갱신 시점까지 계속되면 결국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결국 한국 시장의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한국의 반도체 관련 정책과 제도가 정체되면 빠르게 변하는 글로벌 반도체 업계에 발맞추지 못하는 것도 걱정된다”고 했다.
이렇게 국내 시장과 경제의 불확실성이 커진 가운데 기업 활동이 위축되면 2025년엔 기업들이 채용 규모를 줄이면서 구직난으로 이어질 우려도 있다. 한 대기업 건설사 관계자는 “2024년 하반기 건설사들의 키워드는 인원 감축과 비용 절감이었다”며 “현재의 정치·경제 분위기가 계속된다면 많은 기업이 신규 채용 인원을 대폭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 경제활동인구의 25%를 차지하는 자영업자·소상공인은 계엄과 탄핵, 비행기 사고 참사 등으로 얼어붙은 소비심리에 잔뜩 긴장한 시선으로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서울 은평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아무개(35)씨는 “윤석열의 계엄 선포 이후와 그 전년도(2023년 12월~2024년 1월) 매출을 비교하면 35% 정도 감소한 것으로 확인된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회식하는 사람들도 눈에 띄게 줄었고, 환율과 물가가 오른다고 언론에서 계속 보도하면서 배달 수요도 크게 줄어든 상황”이라며 “문제는 이 상황이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인데, 주변 상인들 사이에선 업종 변경과 폐업을 고민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는다”고 했다.
2024년 12월16일 중소기업중앙회가 소상공인·자영업자 505명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비상계엄·탄핵 사태의 영향으로 직간접적인 피해를 봤다”고 답한 소상공인·자영업자는 전체 응답자의 46.9%에 이르렀다. 2024년 12월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전달보다 12.3 하락한 88.4를 기록했는데 2020년 3월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 18.3 하락한 것에 이어 가장 큰 낙폭이다.
경제와 국제통상 전문가들은 하루라도 빨리 윤석열을 탄핵하고 새 대통령을 뽑는 것이 시급한 과제라고 입을 모은다. 만약 헌법재판소가 윤석열의 대통령 탄핵안을 기각하면 글로벌 시장은 ‘윤석열이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한국 시장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게 될 것이란 전망이다.
이정호 고려대 국제대학원 연구원(전 블룸버그 기자)은 “윤석열이 비민주적인 계엄 선포로 대한민국과 세계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동시에 외국인 투자자와 국내 기업 모두에 거대한 불확실성을 초래한 것에 대해 거의 모든 외신이 규탄하는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며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이 인용되지 않고, 새 대통령이 선출되지 않는다면 한국 경제가 치명상을 입고 국가신용등급도 하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이 떨어지면 경제는 더 큰 어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말했듯 한번 떨어진 국가신용등급은 다시 올리기가 쉽지 않다.
장영욱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취임을 앞두고 전세계 시장이 자국 우선주의로 선회하면서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새로운 경제체제에 적응해야 하는 시기인데, 헌법에 반하는 비상계엄을 선포해 경제적 불확실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비용은 숫자로 환산이 안 될 만큼 막대하다”며 “헌법재판소는 윤석열의 탄핵심판 과정에서 이런 경제적인 비용까지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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