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 루슈디의 <분노>(문학동네 펴냄·2007)는 ‘분노를 장착한 어른 아이, 가출했다 돌아오다’로 요약된다.
소설 서두에서 주인공 솔랑카는 ‘학자, 인형 제작자, 독신자, 은둔자’로 소개된다. 이는 소설적 트릭일 뿐, 읽다 보면 진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주인공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학자도 독신자도 은둔자도 아니다. 조신한 아내와 딸 같은 젊은 피,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자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싶은 올드보이다.
1980년대, 영국 대학의 폐쇄성과 치열한 내부 경쟁에 염증 난 그는 케임브리지대학 교수직을 버리고 인형 제작자로 전신한다. 텔레비전의 세계에 뛰어들었지만 오래지 않아 인형들이 자신을 배신하는 상황에 마주친다. 자신의 창조물이 대중적으로 재탄생돼 인기를 독차지하는 상황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던 그는 미국으로 줄행랑친다.
그는 ‘분노’ 때문이라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안 살기 위해서’라고 변명한다. 애초의 목적은 모든 사회적 관계의 절연과 은둔이었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안 된다. 기억상실과 해리성 장애에 시달릴 정도로 분노 가득한 미국 생활은 3세계 지식인으로서 1세계의 모든 것에 대한 선망과 질시, 무능과 자기혐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런 폭발 직전의 상태는 그를 ‘알아보아’주는 어린 여자 밀라를 만남과 동시에 해소된다.
엄마가 없던 꼬마 밀라는 시인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위로했다. 너무나 적극적으로 위로한 나머지 어느 사이 엄마의 위치에까지 이른 밀라를 버리고 아버지는 전쟁 중인 조국 세르비아로 도망가버렸다. 이는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마치 처벌받으려는 듯한 제스처로 도망쳐온 솔랑카의 모습과 흡사하다. 솔랑카는 인형 리틀 브레인과도 같은 아이를 통해 위무받고 분노를 잠재우며, 밀라의 신세대적 아이디어에 힘입어 인터넷 세계의 인형 조종자로 등극한다.
딸 같은 밀라와의 근친상간적 아빠놀이는 또 다른 성적 대상, 닐라의 등장으로 종료된다. 친구의 애인이었던 닐라는 미모가 하늘을 찔러 뭇 남성을 발 아래 꿇게 하는 여신과도 같은 존재. 이런 존재의 파트너가 되려면 그에 걸맞은 권위와 능력이 있어야 할 터, 작가는 게임 세계의 ‘능력자’처럼 솔랑카를 유사 창조자로 만든다. 소설의 중간에 솔랑카가 작성한 공상과학(SF) 서사를 삽입하는데 이 SF 서사와 꼭 같은 상황이 닐라의 고향 릴리푸트블레푸스쿠에서 발생한다. 릴리푸트 사람들은 솔랑카 인형의 캐릭터를 철저히 모방하면서 영토분쟁을 일으킨다. 현실을 지배하는 상상력의 소유자 솔랑카. 이런 능력자 솔랑카는 매력과 지성과 전략을 겸비한 닐라의 사랑과 희생에 힘입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난다.
할리우드식 SF 영화적 상상력으로 짜깁기된 후반부의 이런 스토리야말로 점입가경의 올드보이 판타지다. 하기야, 의붓할아버지가 손녀와 결혼하고, 의붓아버지가 딸과 결혼하는 세상에 어차피 거짓말인 소설에 묵은 남성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분노한다면, 분노가 아까운 것이 되나? 어쩌면 작가는 이 지점을 노린 것인지도. 마치 솔랑카가 조종하는 인형처럼 독자마저 조종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인지도. “짜증나지? 그럼 분노를 터뜨려. 그게 내가 원하는 바야” 하면서.
솔랑카는 가상 세계의 지배자이자 창조자가 아니라, 지식과 담론들이 이끄는 대로 조종되는 인형이다. 80년대 학자, 90년대 텔레비전, 2000년대 디지털의 담론과 논리를 스펀지처럼 흡수해버리는 지적 호기심에는 판단, 비판, 통찰 등의 덕목이 빠져 있다. 지혜를 지식으로, 통찰을 무비판적 수용으로 대체하는 미성숙한 어른일 뿐이다. 따라서 주인공에게서 일관된 모습을 찾는다면 그것은 어린아이 정서다.
올드보이의 너절한 욕망의 적나라한 분출. 혹자는 바로 이 지점을 작가의 솔직한 면모로 볼 수도 있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루슈디의 궁극적 관심과 철학, 상상력이 너무 빈곤하다고 하면 소설을 잘못 읽은 것일까?
문영희 도서출판 밈 기획실장·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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