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자, 수컷은 모두 죽거나 죽이고 암컷들만 평화롭게 사는 낙원을 건설해놓고서,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세상에 종말이 왔기 때문이었노라고 능청을 떤다. 집 앞 샘터에서 세수를 하던 할아버지가 오른손을 둥글게 오므린 채 화석으로 변해버리고, 하늘을 날던 참새도 풀숲에 떨어져 꼼짝하지 않는 걸 똑똑히 보았단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인간과 동물이 모두 죽어버린 이 세계와 여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어서 여자는 바깥세상으로 넘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덮친 정체 모를 재앙 또한 여자가 있는 이쪽 세상을 침범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잡화점처럼 온갖 물건이 저장되어 있는 사촌 부부의 산장을 독차지한 것도, 충직한 개와 젖소와 고양이만 데리고 온전히 세상과 단절한 것도,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를 총으로 쏘아죽인 것도 전부 세상에 종말이 왔기 때문이란다.
아무리 별별 종말론이 다 있다지만, 이건 좀 심하다. 거대한 벽이 오직 여자가 있는 산 주변에만 둘러쳐져서 온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간 재앙을 막아주었다니. 그토록 굳건한 벽을 사이에 두고 공기는 잘도 통하고(물론 오염되지 않은!) 개울은 잘도 흘러가다니. 게다가 어디선가 젖소가 나타나 신선한 우유를 제공해주고 텃밭에선 감자와 콩까지 자라난다니. 이쯤되면 우리는 여자의 이야기에 의혹의 눈길을 던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어쩌랴. 고양이나 젖소는 글을 쓸 수 없고 여자의 총에 맞아 죽은 남자 역시 말을 할 수 없으니, 우리가 믿을 거라곤 오직 그 여자가 남긴 기록뿐인걸.
어찌되었든 남들처럼 학교를 마치고 두 딸을 키우고 남편과 살다가 사별하며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 여자는 2년 반 동안 외부 세계와 어떤 접촉도 하지 않은 채, 남자의 도움 없이 밭도 갈고 소도 돌보고 음식도 만들면서 꿋꿋이 살아간다. 개와 고양이, 젖소는 그녀가 날마다 돌봐야 할 무거운 짐이자 삶의 동반자이며 그녀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적으로 생존을 그녀에게 의존하는 이 동물들이 있는 한 그녀는 결코 절망에 빠져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산속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살아 있는 한 나는 사랑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되는 날, 나는 삶을 멈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와 같은 부류였다면 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자의 상세한 해설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출신 작가 마를렌 하우스호퍼의 <벽>(박광자 옮김·문학동네 펴냄)은 1963년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1980년대 초반 핵전쟁에 관한 공포와 여성문학 붐과 더불어 새롭게 재조명되었다. 특히 독일어권 페미니즘 학자들에게서 열광적인 찬사를 받았다고 하는데, 느닷없이 도끼를 들고 나타나서 사랑스런 수송아지와 개(충직하지만 성별이 분명치 않은)를 죽인 남자(여자의 주장에 따르면 지구상에 남은 단 한 명의 남자였을)를 여자가 미련 없이 총으로 쏘아죽인 마지막 장면은 페미니스트들의 지지를 얻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이 여자의 무한한 사랑은 만물의 어머니이자 풍요로운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여성 이미지를 보여주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나의 사랑에는 분별력이 없다. 꿈속에서 나는 아이들을 낳는다. 사람의 아이도 있지만 고양이, 강아지, 송아지, 곰, 처음 보는 짐승의 아이도 있다. 모두 내 몸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여자의 이 놀라운 사랑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남자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게 세상에 종말이 찾아왔기 때문이라는 여자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암고양이와 암소와 암까마귀만 살아남는 이 여자의 유토피아는 어딘지 찜찜하다. 범우주적인 여자의 사랑이 유독 인간에게는 예외인 것 같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여자는 자기 목숨이 다할 때까지 개를 사랑하고 고양이를 사랑하고 까마귀를 사랑하고 벌레까지도 사랑하겠지만, 만약 살아 있는 마지막 것이 인간이라면? 더구나 그것이 여자에게 의지할 필요 없는 성인 남자라면? 대답이 무엇이 되었든,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남자는 벌레 다음이라는 것이다.
최인자 번역가·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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