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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가면’ 에 숨은 인도 지식인

윗세대 내면의 열등감과 이후 대물림되는 비천한 삶, 키란 데사이의 <상실의 상속>
등록 2009-11-27 04:48 수정 2022-12-15 06:51
〈상실의 상속〉

〈상실의 상속〉

인도 히말라야 산중 칼림퐁의 한 저택에 소년병들이 침입한다. 소년들은 물건을 강탈하고 집주인인 퇴직 판사에게 모욕감을 안겨준 뒤 돌아간다. 언뜻 단순하게 보이는 이 사건에는 인도의 계층·민족·역사·정치 등 모든 문제가 섞여 있다. 이 장면을 매개로 작가는 식민지 시절 영국과 현재의 미국, 그리고 인도의 칼림퐁을 종횡무진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렇게 키란 데사이의 <상실의 상속>(이레 펴냄)이 그려내는 건 서구 사회에 내던져지듯이 버려진 인도인의, 충격과 상실로 점철된 삶이다.

일제강점기의 ‘현해탄 콤플렉스’와 마찬가지로 식민지 시절 인도의 지식인 역시 ‘영국 콤플렉스’가 있었다. 영국식 신교육을 받은 수많은 인도 지식인의 내면은 자의식과 열등감, 선망과 좌절감 등으로 얼룩져 있었다. 퇴직 판사 제무바이가 그런 사람이다.

판사의 모습은 염상섭의 <만세전> 주인공 ‘나’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아내를 전적으로 무시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냉혹한 판사와, 아내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도 갖가지 해찰과 여유를 부리다 마지못해 귀국하는 <만세전>의 ‘나’의 모습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제무바이는 유학 뒤 인도에 파견돼 철저히 제국의 법을 인도인에게 불리하게 적용한다. 작가는, 지배국의 속성을 너무 철저히 내면화한 나머지 조국 인도는 물론 스스로조차 혐오하는 유형의 인물을 판사의 모습을 통해 구현한다. 그는 자신의 피부색을 가리려고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다. 먹고 입고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영국식을 고수하는 검은 얼굴 흰 가면의 사나이의 모습은, 칼림퐁에서 방귀깨나 뀌고 산다는 사람들의 영국 선망과도 일치한다. 노니와 로라 자매가 마크스앤스펜서 속옷 페티시를 통해 영국 여왕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모습이 신세대 작가의 눈에 너무나 기이하고 창피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흰 가면’ 에 숨은 인도 지식인. REUTERS

‘흰 가면’ 에 숨은 인도 지식인. REUTERS

구세대 지식인을 통해 정체성의 상실을 그려낸 작가는 요리사를 내세워 인도 내부의 신분질서 문제를 부각한다. 작가는 인도의 복잡한 신분질서 역시 누대에 걸쳐 상속된 악습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요리사의 가장 큰 불명예는, 백인을 주인으로 섬기는 대신 같은 피부색을 지닌 인도인을 주인으로 섬긴다는 사실이었다. 요리사는 비굴성을 정치화한다. 저택에 소년병들이 침입했을 때 요리사의 태도야말로 하층민의 생존방식을 제대로 보여준다.

“제발 나를 죽이지 마세요, 제발. 나는 불쌍한 가난뱅이랍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작가는 이 대사에 주목한다. ‘몇 세기 동안 갈고 다듬어져 대대로 전해내려온, 가난한 자들이 자신의 자손들에게 상속한 이 대사’야말로 폭력을 부추기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어떠한 비판이나 판단도 유보한 채, 그저 외할아버지와 요리사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주는 것으로 코믹한 상황을 연출하며, 이로써 윗세대 인도인의 삶을 조롱한다.

요리사는 자신의 희망을 아들의 삶에서 찾고자 아들 비주를 미국에 보낸다. 그러나 요리사의 아메리칸드림과는 달리, 비주는 세계화의 하인으로서, 철저하게 벌거벗은 생명으로 생존에 허덕인다. ‘그린카드’(영주권)조차 없이, 불법 이민자를 착취하는 지하의 노동세계를 전전한다. 그는 모은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오건만, 이마저 폭도들에게 강탈당하고 빈털터리로 다시 아버지와 조우하게 됨으로써 요리사의 꿈은 철저히 상실되고 만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다시 쓰여야 할 듯하다. 요리사의 아들 비주나 제무바이 판사의 외손녀 사이와 같은 현대의 인도 젊은이들이 인도 내부에서, 혹은 세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다시는 상실을 상속하지 않을 수 있을지, 그것이 남은 문제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과연 상실을 상속받아 가난하고 비천하고 열등감에 시달리는 삶을 지속할까, 아니면 다른 방식의 삶을 선택할까? 작가는 좀처럼 희망을 주지 않는다. 다만, 상속을 상실해버리려는 사이의 의지를 통해 일말의 여지는 남겨놓는다.

문영희 도서출판 밈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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