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신간 번역 소설들을 살펴보다가, 그 자리에서 놀라움과 감격으로 가슴이 뛰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물론 흔하게 있는 일은 아니지만, 행복하게도 근래에 그런 경험을 두 번이나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지난해 베를린에서 한 평론가의 추천으로 빈프리트 게오르그 제발트(1944~2001)의 첫 작품인 <자연을 따라, 기초시>를 읽고 그에게 열광하게 되었는데, 지난해 말 <이민자들>이 번역되어 나온 것을 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의 작품 <아우스터리츠>가 한국어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문학이 살고 있는 주된 영토 중 하나가 ‘지나간 시간의 왕국’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제발트는 그 왕국의 풍경을 가장 아름답고 인상 깊게 다룰 줄 아는 작가의 한 사람이리라. 우리가 “책에 매혹당했다”고 고백할 때,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릴 수 있는 그런 작가. 나중에 나는, 우연히도 내가 처음 독일에 간 해인 2001년에 그가 영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었음을 알게 되었는데, 작가의 죽음에 개인적으로 마음이 절실히 아파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민자들>은, 작가 자신인 것처럼 보이는 일인칭 화자가 살아오면서 만나게 된 네 명의 이민자가 차례로 등장하는 연작 산문, 혹은 연작 단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각각 화자가 한때 세들어 살던 집의 주인인 셀윈 박사, 화자의 초등학교 교사인 파울 베라이터, 화자 어머니의 외삼촌인 암브로스 아델바이트 할아버지, 그리고 화자가 맨체스터에서 우연히 알게 된 화가 막스 페르버이다. 특히 마지막의 막스 페르버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작가의 마지막 장편인 <아우스터리츠>와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민자들>과 <아우스터리츠> 모두, 과거의 시간에 관한 회상이며, 사라져버린 존재들을 위한 뛰어난 문학적 환기이다. 독일 문학의 애호가들이라면 이 부분에서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으리라. 그렇다, 고향을 떠났거나, 더 이상 고향이 없거나, 고향을 잊었거나, 고향에서 추방된 이민자들은, 비록 작가가 이들의 출신에 대해 직접적인 누설을 최대한 피해가고, 그래서 더더욱 큰 울림을 갖게 되지만, 대부분 유대계 독일인이다. 기억과 시간은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주된 정조이자 모티브이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언어와 서정성으로 인간의 고통과 존재의 망각을 독자 앞에 펼쳐 보이는 이 책의 풍경이 된다.
제발트의 작품에서 독자가 주목하게 되는 성격은, 문장이나 줄거리 자체라기보다는, 다름 아닌 그만의 독특한 진술 유형이다. 작가의 개인적 자서전이 상당 부분 녹아 있는 주인공들의 이력, 마치 목적 없는 산책처럼 시작했으나 어느덧 고요하면서도 격렬한 감정의 클라이맥스로 독자를 이끄는, 그러나 끝까지 나직함을 유지하는 목소리들, 마치 한 편의 산문시처럼 흐르는 독백들, 무엇보다도 한없이 아름답고 길게 이어지는 자연의 묘사들, 내면의 심리와 어우러진 세계의 묘사들, 긴 대화와 기록, 일기와 사진첩, 그리고 타인의 회상으로 진술되는 어느 한 사람의 삶, 이른바 ‘제발트식 사운드’라고 불리는 그것들을 읽다 보면 불현듯 독자는 떠올리게 되는데,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삶의 서사나 내용이 아니라 진술의 형태 그 자체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며, 그것을 다른 곳이 아닌 제발트의 글 속에서 선명히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델바이트 할아버지가 비망록에 써놓은 표현대로, “기억이란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치솟은 높다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임을.
이 책의 또 다른 독특한 점 두 가지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집어넣은, 주인공들이 우연인 듯 나비채를 든 사람들과 자주 조우하는 장면과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아무런 설명이 없고 개인의 사진첩에서 꺼내온 것이 분명해 보이기 때문에 더욱 강렬한 흑백사진들이다. 이 장면, 이 사람, 이 비망록의 페이지, 이 하루, 이들이 어느 한 시절의 세계를 말없이 이루고 있었다가, 어느 날 나비가 되어 허공으로 날아가버렸고, 지금 우리가 그들의 부재를 시간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려는 것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배수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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