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는 타자에게 연루되었다 소설을 읽나요? 사람들에게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걸 읽나.” “독서클럽까지 결성해 소설을 읽다니 노력이 가상하다.” 이런 대답을 들을 때면 소설을 즐겨 읽는 나는 사회의 잉여 존재가 된 기분이 든다. 하지만 한편으론 상대방에게 이런 걸 ...2010-04-15 18:37
서울의 눈으로 터키의 눈을 알 수 있으려나 때아니게 흥청망청 쏟아지는 하얀 눈에 깜박 홀려서 오르한 파무크의 (민음사 펴냄)을 떠올린 건, 물론 나의 실수였다. 그 연상의 철없음이란, ‘발리 상표가 붙은’ 여행 가방을 들고 독일 백화점에서 산 두툼한 털코트를 입은 채, 눈에 대한 순수한 감정을 좇아 터키에서도...2010-04-01 11:52
불안이라는 어두운 힘불안도 힘이 된다. 그것은 어둠의 힘이며, 그 에너지는 불온하다. 극대화된 불안의 힘에 영문도 모른 채 교살당할 수밖에 없었던 (윤용호 옮김·민음사 펴냄) 속 여자 매표원처럼.연극 의 희곡작가로 더 잘 알려진 페터 한트케의 이 소설 작품은 1970년대에 발표됐지만 요즘...2010-03-19 14:25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금서’어떤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면 읽고 싶은 마음이 반감된다. 그 정도 대중성과 상업성을 갖춘 책이라면 구태여 나까지 읽어줄 필요는 없잖아, 라는 반감이 작용한다. 그와 반대로 어떤 책이 금서가 되었다 하면 기필코 읽어야겠다는 호기심이 증폭된다. 금서는 읽으라고 권하...2010-02-25 15:40
장기이식용 복제인간의 ‘집’삶은 여행에 비유된다. 집을 떠나왔다는 점에서 그럴 것이다. 가장 안전한 집인 엄마 뱃속에서 끄집어내지는 순간, 험난한 삶의 시작을 알리는 호각 소리가 귓속을 아프게 울린다. 삶의 여행길에서 모르는 타인들을 만나고, 물건과 말을 주고받고, 타인으로부터 어떤 존재인지 확...2010-01-28 15:35
한 망명자의 영혼가오싱젠의 (북폴리오 펴냄·2005)은, 아마도 한마디로 서술하기가 가장 어려운 책에 속할지 모른다. 처음 부분을 읽을 때 나는 이 책이 무척이나 단순하고 쉬운 언어로 쓰인, 어느 정도는 도식적인 틀을 유지하는 문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2010-01-07 18:49
이 세상 마지막 여자이 여자, 수컷은 모두 죽거나 죽이고 암컷들만 평화롭게 사는 낙원을 건설해놓고서,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세상에 종말이 왔기 때문이었노라고 능청을 떤다. 집 앞 샘터에서 세수를 하던 할아버지가 오른손을 둥글게 오므린 채 화석으로 변해버리고, 하늘을 날던 참새도 풀숲에 떨...2009-12-17 17:50
‘흰 가면’ 에 숨은 인도 지식인인도 히말라야 산중 칼림퐁의 한 저택에 소년병들이 침입한다. 소년들은 물건을 강탈하고 집주인인 퇴직 판사에게 모욕감을 안겨준 뒤 돌아간다. 언뜻 단순하게 보이는 이 사건에는 인도의 계층·민족·역사·정치 등 모든 문제가 섞여 있다. 이 장면을 매개로 작가는 식민지 시절 ...2009-11-27 13:48
늙어간다는 것, 이 무력감한 멋진 남자가 있다. 가족주의와 종교에서 자유로운 미국의 유대인 이민자 3세대로, 유명 광고회사의 아트디렉터로 성공했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며, 타고난 예술적 감수성을 가져 그림을 잘 그리고, 매력적인 외모에,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라 많은 여자들이 따랐던 그런 남...2009-11-05 14:53
제국의 도시는 거기 있는가나는 어느 날 시인지 산문인지, 산문인지 소설인지, 단편인지 장편인지, 그리고 그 안에 묘사된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그림자인지 실체인지 알 수 없는 책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이탈로 칼비노의 (민음사 펴냄)이다. 그리고 그 책을 다 읽은 다음, 이것은 인간의 여행과...2009-09-10 11:51
마비된 도덕을 내려치는 도끼‘살인하지 말라.’ 이 절대적 계명이 인간의 살인 행위를 막을 수 없음은 이미 입증된 지 오래다. 웬만한 살인은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세상에서, 이 계명은 그저 ‘분명 살인은 일어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인하지 않는다’는 분열증적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2009-08-21 18:16
올드보이 판타지, 사랑받고 싶어라살만 루슈디의 (문학동네 펴냄·7)는 ‘분노를 장착한 어른 아이, 가출했다 돌아오다’로 요약된다. 소설 서두에서 주인공 솔랑카는 ‘학자, 인형 제작자, 독신자, 은둔자’로 소개된다. 이는 소설적 트릭일 뿐, 읽다 보면 진술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주인공을 발견하게 된다....2009-07-23 12:58
다양성을 유지하는 진정한 방식갑작스러운 남자의 부고. 그리고 여자에게 위임장이 날아든다. 여자를 유산관리인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위임장이다. 중산층 주부였던 에디파는 한때 애인이었던 남자의 유서에 따라 일상을 내팽개치고 유산 관리를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난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와 맞닥...2009-07-02 18:42
나비가 되어 사라진 사람들간혹 신간 번역 소설들을 살펴보다가, 그 자리에서 놀라움과 감격으로 가슴이 뛰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물론 흔하게 있는 일은 아니지만, 행복하게도 근래에 그런 경험을 두 번이나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지난해 베를린에서 한 평론가의 추천으로 빈프리트 게오르그 제발트(1...2009-05-28 11:51
우리는 얼마나 휘황한 언어에 중독되었나 한밤중 도심의 상가. 손에 휴지통을 든 소녀가 서 있다. 나이에 맞는 인형이 아니라 휴지통을 들고 서 있는 소녀라니. 뜬금없고 기괴하다. 소녀는 부모가 누군지, 집이 어딘지, 자기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소녀는 직무상 이것저것 물어보는 경찰에게 자기 나이가 열네 ...2009-05-07 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