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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 시스템을 거부하는 제2 커뮤니케이션망을 향한 추적,
토마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
등록 2009-07-02 09:42 수정 2022-12-15 06:47
<제49호 품목의 경매>

<제49호 품목의 경매>

갑작스러운 남자의 부고. 그리고 여자에게 위임장이 날아든다. 여자를 유산관리인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의 위임장이다. 중산층 주부였던 에디파는 한때 애인이었던 남자의 유서에 따라 일상을 내팽개치고 유산 관리를 위해 무작정 길을 떠난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제와 맞닥뜨린다. 일종의 수사관이 되어 그 문제를 풀어나간다.

1960년대 출간돼 포스트모던 문학의 신화가 된, 놀랍게 잘 쓴 이 미국 소설은 흥미를 유발하는 추리 형식을 차용한다. 주인공 에디파가 남자의 재산이 전시돼 있는 샌나르시소라는 거대 자본주의적 공간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은 세계의 감춰진 진실이며, 그것을 풀 열쇠인 낯선 단어 ‘트리스테로’이다.

트리스테로는 비주류 우편 시스템을 나타내는 암호이다. 남자가 남긴 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에디파는 트리스테로를 추적한다. 트리스테로는 소리를 줄이는 약음기가 달린 나팔로 표현되고, 화장실 벽에 낙서된 트리스테로를 발견한 에디파는 그 의미를 ‘편집증적’으로 좇는다. 에디파 앞에 여러 남자들이 나타나 단서를 주는데, 정보가 모이면 모일수록 급속히 더 많은 정보들이 생겨나 에디파의 혼란은 증폭된다.

에디파가 알게 된 트리스테로는 미국 정부의 공식 우편제도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은밀한 우편제도를 통해 교류하는 제2의 커뮤니케이션망이다. 트리스테로 위조 우표에는 공식 우표를 비틀어 패러디한 그림이나 문자가 담겨 있다. 트리스테로는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개념으로 설명된다. 분자들의 상태가 모두 같아지면 흐름이 없어지고 운동이 정지하게 된다. 이에 따라 엔트로피가 극에 달하게 되고 결국 계가 죽게 된다. 중앙집권적인 정부의 억압적 우편 시스템은 엔트로피가 극에 달한, 닫혀 있는 시스템이다. 이런 중앙 시스템이 트리스테로에 의해 교란된다. 트리스테로는 그 주체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퍼져 있는지, 그들의 공간은 어디인지 알 수 없어서 중앙정부가 통제할 수 없다. 오직 계가 닫히지 않으려면, ‘수많은 주체들이 스스로의 정보를 발산해야 한다’.

트리스테로에 대한 단서들은 건널 수 없는 강 앞에 서 있는 에디파 앞에 돌다리가 여기저기 솟아오르는 것처럼 우연히, 지속적으로 주어진다. 인터넷 하이퍼링크처럼 단서들이 또 다른 정보를 몰고 오는 식이다. 의도된 이 소설의 산만한 형식은 서로 다른 에너지 분자들이 계속 존재하게 하려는 트리스테로의 의미를 구현한다. 에디파는 흑인 아이, 무정부주의자, 창녀, 걸인, 중독자들, 광신도, 죽어가는 노인처럼 소외된 사람들이 약음기 나팔 기호를 몸이나 옷에 새기고 있는 것을 본다. 에디파는 청각장애인의 파티에서 음악 없이 함께 춤춘다.

에디파는 트리스테로의 역사를 추적해 들어가지만 역사는 다양하게 복사·수정되고 추가된 판본에 불과하다. 트리스테로는 역사 속에서 암살자로, 혁명가로, 그리고 현대의 소외된 자로 얼굴을 바꾼다. 트리스테로의 실체는 선과 악 너머에 있다. 트리스테로는 다양성으로 존재하는 알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러나 토마스 핀천은 다양성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가령 무정부주의가 트리스테로라면, 무정부주의가 하나의 주된 이념이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또 다른 갇힌 시스템이 되어, 이에 대한 또 다른 트리스테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디파의 결말은 의미심장하다. 에디파는 단서를 주던 남자들이 냉소하거나 달아나버리거나 혹 유서를 남기고 떠나버렸을 때, 모두 사라진 자리에서 혼자 경매장에 남아 49호 품목의 경매물인 위조 우표를 사가게 될, 트리스테로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기다린다. 이것이 소설의 끝이다. 순수하게 우연에 이끌려 집을 나섰던 에디파는 이제 경매장에 남는 것을 혼란 속에서 ‘선택’한다. 소설은 에디파의 추구의 과정이다. 트리스테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며, 중요치도 않다. 텅 빈 것을 두렵게 목도하는 자신이 있을 뿐이다. 경매장의 문은 굳게 닫혔지만, 계를 늘 열어두려면 심연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듯.

채윤정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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