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날 시인지 산문인지, 산문인지 소설인지, 단편인지 장편인지, 그리고 그 안에 묘사된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그림자인지 실체인지 알 수 없는 책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이탈로 칼비노의 <보이지 않는 도시들>(민음사 펴냄)이다. 그리고 그 책을 다 읽은 다음, 이것은 인간의 여행과 몰락에 관한, 더없이 아름답고 독창적인 글이라고 받아들였다.
13세기 베네치아 출신의 동방여행자 마르코 폴로는 어느 고요하고 한가로운 저녁, 베이징 궁정의 뜰에서 원나라 세조인 쿠빌라이 칸에게 그동안 자신이 칸의 명령으로 돌아보고 왔던, 그러나 칸 자신은 결코 보지도 알지도 못하며 앞으로도 가보지 못할 광대한 제국의 머나먼 도시들을 하나하나 묘사해준다. 55개에 이르는 각 도시의 스케치는 짧으면 겨우 반 페이지, 길어야 서너 페이지에 불과하다. 디오미라·이시도라·도로테아 등 미지의 여인의 이름을 가진 이 도시들은 모두 가상이다. 마치 베일에 가려진 여인을 묘사하듯 섬세한 언어와 그리움으로 일렁이는 문체, 짧고도 순간적인 인상,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초현실적인 묘사들, 시와 산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진술, 혼재된 현재와 과거의 모습, 번영과 쇠락과 소멸이라는 수순을 밟아가는 도시와 꿈들…. 이 책의 줄거리를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하다. 그리고 반드시 순서에 따라 읽을 필요도 없다.
최근에 나는 칭기즈칸이 등장하는 소설을 한 권 읽었는데, 유목민의 전쟁과 삶의 형태가 우리와 같은 정착 민족의 습성과 다른 점을 인상 깊게 느꼈다. 그들은 밀을 경작하지 않는 대신, 가을까지 기다렸다가 이웃 부족을 침략해 그 밀을 약탈해간다. 쿠빌라이 칸은 그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마찬가지 방식으로 제국의 영토를 넓힌 정복전쟁의 승자다. 그러나 이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보라! 여기서 몽고의 칸- 유럽인에게는 야만적인 타타르족으로 알려진- 은 너무나 다른 모습이다. 쿠빌라이 칸과 마르코 폴로의 대화는 그 자체로 장편의 시이며 칸의 관심사는 보이지 않는 도시들의 진정한 존재 여부다. 폴로는 대답한다. “우리가 그들을 생각하므로, 그들은 존재하는 것이다.” 쿠빌라이 칸은 체스를 두면서, 승리와 패배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지, 정복한 도시에서 올라온 공물이 과연 진정으로 그 도시의 존재를 입증해주는지, 마르코 폴로가 그 많은 도시들을 정말로 모두 방문한 것은 맞는지 회의에 빠진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거대한 대제국이 스스로의 무게에 짓눌려 썩어서 가라앉고 있음도 짐작한다. 그러한 칸의 회의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우리가 하나의 세계, 하나의 현실이 아닌, 수많은 시간의 겹으로 이루어진 역사를 동시에 통과하며 살고 있다는 느낌이다. 기록이 아닌 문학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어떤 시간과 나라가 있고, 책을 읽던 우리는 그곳의 궁정 비원에 불현듯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 있으면, 그 나라와 그 시간은 존재하게 된다. 그것이 이 책의 독서이다.
역사적 인물이 주인공이라고 해서 이 책이 역사소설류일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대단히 빗나간 추측이다. 이 책에서 공간이나 시간은 알레고리이며 상징이다. 이 책의 배경은 무(無)의 초원을 유목민처럼 이동하는 꿈이다. 트루데에 도착했으나 트루데를 떠나고 싶어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트루데와 완전히 똑같은 또 다른 트루데에 도착하게 될 것이라는, 세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하나의 트루데로 뒤덮여 있을 뿐이라는, 그러한 꿈.(제8부 ‘지속되는 도시들 2-트루데’에서)
배수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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