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멋진 남자가 있다. 가족주의와 종교에서 자유로운 미국의 유대인 이민자 3세대로, 유명 광고회사의 아트디렉터로 성공했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며, 타고난 예술적 감수성을 가져 그림을 잘 그리고, 매력적인 외모에, 지성적이고 합리적이라 많은 여자들이 따랐던 그런 남자. 뉴욕에 살면서도 9·11 사건의 피해자는 되지 않았고, 폭행이나 강도사건에 휘말리지도 않았으며, 안정된 가족 속에서 부침 없이 성장해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산 그런 남자. 그런데 이 남자가 혹시 찌질해질 수도 있을까?
미국의 유명작가 필립 로스의 소설 중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된 소설 <에브리맨>은 이런 평범한 남자가 굴복당하는 이야기이다. 무엇에? 시간에.
째깍째깍 흐르는 시간에 거칠게 잠식당하는 남자의 몸에 대한 이야기가 이 소설이다. 이 남자의 장례식부터 시작된다. 그 뒤, 소설은 시간을 되돌려 그의 생전 몸의 기억에 따라 그의 일생을 짚어나간다. 특별한 중심 사건 없이 그저 소소한 기억들을 통해 나아간다. 어릴 때 탈장으로 수술을 받았던 기억, 옆 침대의 아이가 밤새 죽어나갔던 기억, 큰 바다를 향해 수영을 하며 자신의 몸이 전능하다고 느꼈던 기억, 그리고 건강했던 수십 년들….
그의 몸과 연관되는 것은 유대인적 특성을 띤 끈끈한 ‘가족’이란 단어다. 그는 보석상이던 아버지, 평온한 어머니, 재능이 뛰어나고 건강한 형 밑에서 자랐다. 보석가게의 이름은 그의 아버지가 지은 ‘에브리맨’이다. 에브리맨 보석상은 노동계급인 보통 사람도 다이아몬드를 소유할 수 있다는 기치 아래 미국의 한 도시에 자리를 잡고 40여 년간 운영된다. 이곳은 두 아들을 훌륭하게 길러내는 진지가 된다. 아버지의 말은 그의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다이아몬드는 불멸한다.” 아버지는 늘 몸에 지니고 다녔던 루페를 눈에 대고 다이아몬드의 결함을 관찰한다. 에브리맨, 보통 사람도 불멸의 다이아몬드를 가질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이 어릴 때 보석상에서 일을 돕던 그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서일까. 그의 머릿속에는 죽음 따윈 없다. 모든 보통 사람들이 젊을 때는 불멸에 관심 있을 뿐, 죽음에 대해 진정으로 생각할 수 없듯이.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유품 중에서 루페나 다이아몬드를 담는 주머니가 아닌, 무의식적 의지처럼 손목시계를 고른다. 그는 세 번이나 결혼하지만 가족 해체가 그의 전공이기도 하다. 그는 첫 번째 결혼을 파투 내고, 헌신적이던 두 번째 부인과도 헤어지고(엄청나게 후회한다), 50살에 바람을 피워 26살 차이 나는 모델과 세 번째 결혼을 하지만, 결국 이혼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에게 몸을 주었지만, 정작 그가 만든 가족은 그의 몸의 추구에 족쇄가 된다. 그는 예술가처럼 자기 욕망에 충실하다. 하지만 그의 몸은 ‘몸’이므로, 노쇠를 피해갈 수 없다. 심장이 고장나기 시작하면서 그는 약해지고 하나둘 가족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제 가족은 죽었거나, 멀리 있다.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세 번째 부인이 될 덴마크의 모델과 여행지에 가서 바람을 피우는 장면이다. 그는 모델과 항문성교를 즐기고, 밤의 택시 안에서도 야한 행동을 일삼는다. 그런데 이 야한 행동 사이에 긴 괄호가 삽입되는데, 그가 불륜 상대에게 값비싼 다이아몬드를 사주는 내용이다. 야한 대목 안의 괄호는 50살의 그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몸의 완전한 충족을 위해 지금까지의 안정된 삶을 일거에 차버리는 값비싼 대가의 상징처럼 보인다.
그는 큰 바다로 멀리 헤엄쳐나가듯 자기 욕구가 좌절되지 않으려고 삶에서 발버둥을 쳤건만, 어김없이 심각한 질병과 노쇠는 닥쳐온다. 그 또한 9·11보다 더 두려운 죽음이란 테러, 노년이란 ‘대학살극’을 피해갈 도리는 전혀 없다. 그는 부모의 무덤에서 자기의 뼈이기도 한 기원과 마주치며, 그 옆에 자신이 묻힐 구멍을 바라보고 서 있다.
늙어간다는 것의 무력감, 우스꽝스러움, 외로움, 축소됨의 적나라한 보고서인 이 소설은 정교한 구성, 아름다운 문장들, 통찰력 있는 유머로 정말이지 훌륭하다. 적나라한 욕망과 견딜 수 없는 찌질함 사이의 커다란 간극에서 좌절하는 남자의 모습을 이만큼 잘 드러낼 수 있을까. 단, 상기할 점은 소설 <에브리맨>은 지적인 중산층 에브리‘맨’의 이야기이지, 에브리‘우먼’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
채윤정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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