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이 비처럼 떨어진다. 로켓이 무시로 날아든다. 멀쩡한 건물이 가뭇없이 무너지고, 연기 자욱한 거리에 주검이 널려 있다. 엄습하는 죽음의 그림자를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안간힘을 쓰며 탈출을 시도한다. 팔레스타인 땅 가자지구에서 일상으로 자리잡은 낯익은 풍경이 새롭게 펼쳐지는 곳은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레바논이다. 2024년 10월7일이면 시작한 지 1년이 되는 가자지구 전쟁을 멈출 생각이 없는 이스라엘이 그예 또 다른 전쟁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9월17일 레바논 무장 정치세력 헤즈볼라 대원들이 사용하는 삐삐(무선호출기) 수천 대가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했다. 9월18일엔 헤즈볼라 대원들이 사용하는 워키토키(휴대용 무선 송수신기) 수백 대가 역시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했다. 첫날 사건으로 12명이 숨지고 2750명이 다쳤고, 둘째 날엔 30명이 숨지고 750명이 다쳤다. 민간인이 포함된 숫자다. 명백한 테러다. 모든 증거가 이스라엘 정보기관을 겨냥하고 있다. 이스라엘 쪽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헤즈볼라 최고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9월19일 “이스라엘이 넘어선 안 될 모든 ‘적색선’을 넘어섰다. 전쟁 선포와 다름없는 행위에 대한 처벌이 뒤따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9월20일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를 공습했다. 헤즈볼라의 특전사 격인 라드완부대 이브라힘 아킬 사령관을 노린 표적공격이었다. 아킬 사령관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전쟁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9월22일 헤즈볼라의 미사일과 로켓, 무인기가 이스라엘 북부 거점도시 하이파로 날아들었다. 헤즈볼라의 ‘2인자’ 격인 나임 카셈은 아킬 사령관 장례식에 참석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전쟁’에 돌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은 9월23일 이른 아침부터 레바논 일대 1300여 곳에 공습을 퍼부었다. 이스라엘 군당국은 “헤즈볼라의 로켓 공격 정황이 있어 선제 타격에 나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공습으로 적어도 49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스라엘은 9월24일과 25일에도 공습을 이어갔다. 레바논 보건당국은 사흘간 지속된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사망자가 620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아랍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이스라엘의 공습을 피해 피란길에 오른 레바논인이 이미 약 50만 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지붕에 가재도구를 실은 피란민이 탄 차량이 몰리면서 베이루트는 물론 중남부 일대까지 레바논 곳곳이 극심한 교통체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레바논 정부는 한꺼번에 피란민이 몰릴 것에 대비해 임시수용소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파국을 막기 위해 국제사회가 나섰다. 9월26일 카타르·아랍에미리트·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국가와 미국·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일본, 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연합(EU) 회원국은 공동성명을 내어 “이스라엘-레바논 국경지대에서 3주간 잠정 휴전에 즉각 들어가자”고 촉구했다. 이스라엘 쪽 반응은 신통찮다. ‘타임스 오브 이스라엘’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9월25일) 각료회의에서 정전협상 촉진을 위한 잠정 휴전안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현지 매체 ‘와이넷’도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네타냐후 총리가 안보 관련 장관 회의에서 ‘전투를 지속하면서 협상에 나설 것이며, 헤즈볼라에 대한 전면 타격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2023년 10월7일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 직후부터 이스라엘과 헤즈볼라는 ‘저강도 전쟁’을 이어왔다. 그 전쟁의 강도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 레바논 정부는 이스라엘의 기습 테러에도, 무차별 공습에도 ‘비난 성명’만으로 대응하고 있다. 레바논 정부는 헤즈볼라를 통제할 힘도 없다. 레바논과 가자지구 전쟁은 연계돼 있다. 향후 전쟁의 수위와 강도는 압도적 무장능력을 갖춘 이스라엘이 결정할 것이다. 지난 1년간 가자지구가 감내해야 했던 일이 레바논에서 고스란히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9월17일 가자지구 보건당국이 649쪽 분량의 자료를 표로 정리해 공개했다. 2023년 10월7일부터 2024년 8월31일까지 이스라엘군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가자지구 주민의 신상정보를 담은 자료다. 자료에는 8월 말까지 숨진 사망자의 약 80%에 이르는 3만4344명의 이름과 생년월일, 성별과 신분증 번호가 담겨 있다. 나머지 사망자 7613명은 병원과 안치소에 주검이 접수됐으나 아직까지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 가운데 169명은 전쟁 발발 이후 태어났다. 자료 1~14쪽까지 이름을 올린 사망자 710명의 나이는 ‘0살’로 표시됐다. 첫돌을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아기들이다. 인터넷 매체 알마야딘 등이 전한 무함마드 아부 쿰산과 그의 아내 주마나 아라파의 사연을 들어보자.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의 알리말 지역에 살던 부부는 전쟁 발발과 함께 최남단 라파의 사보라 지역으로 피란을 떠났다. 이스라엘군이 라파에서 지상군 작전을 개시(5월6일)하자, 가족은 중부 데이르알발라로 다시 피신했다. 아내의 출산을 앞두고 쿰산은 처가 식구들과 함께 아파트 한 채를 얻었다. 이스라엘군이 ‘안전지대’로 지정한 지역에 포함된 곳이다. 8월10일 누세이라트의 알아우다 병원에서 쌍둥이가 태어났다. 쿰산은 아이들을 ‘아이살’과 ‘아세르’라고 이름 지었다.
8월13일 쿰산은 쌍둥이의 출생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 이른 아침 식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데이르알발라 시내 알아크사 병원에 마련된 민원실에서 그가 막 출생증명서를 받아들었을 때 이웃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웃은 그에게 “집이 폭격당했다”고 말했다. “집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알아크사 병원으로 실려갔다”고도 했다. 손에 출생증명서를 든 쿰산이 울부짖었다. 병원 안치소에서 그는 아내와 갓 태어난 쌍둥이, 그리고 장모를 주검으로 만났다.
649쪽 자료에는 10살 이하 어린이 사망자 이름이 100쪽 넘게 길게 이어졌다. 어린이 사망자는 모두 1만1355명이었다. 첫 성인 사망자 이름은 자료 215쪽에 등장한다. 여성 사망자가 6297명이고, 60살 이상 노인이 2955명에 이른다. 1922년 태어나 한 세기 이상 전쟁과 격동의 세월을 견뎌낸 노인도 사망자 명단에 포함됐다. 적어도 이들은 하마스 등 무장단체 조직원이 아닐 터다. 이스라엘 쪽은 그간 가자지구에서 무장단체 조직원 1만7천여 명을 사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증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가자지구 보건당국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려 주검조차 수습하지 못한 사망자가 약 1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감염병, 무너진 의료체계 탓에 적절한 돌봄을 받지 못해 죽어갔다. 통계조차 없는 사망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가자지구 보건당국 관계자의 말을 따 “언젠가 총성이 멎고 나면 이들 희생자에 대한 통계자료를 수집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지난 1년 가자지구는 봉쇄된 채 철저히 고립됐다. 그 땅에 갇힌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가자지구의 고립과 봉쇄는 2023년 10월7일 이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번 전쟁 전에도 가자지구는 봉쇄된 채 매를 맞고 있었다.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했다. 시리아한테서 골란고원을, 요르단한테서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동예루살렘을, 이집트한테서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 일부를 빼앗았다. 이스라엘의 ‘점령지’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주둔 병력과 거주 정착민을 일방적으로 철수한 것은 2005년 8월이다. 병력은 물렸지만 점령은 계속됐다. 가자지구의 땅과 하늘과 바다를 이스라엘이 통제했다. 가자지구로 가는 모든 길목도 이스라엘이 통제했다.
2006년 1월 팔레스타인 자치의회 선거에서 하마스가 압도적 승리를 거두며 다수당이 됐다. 하마스의 급부상을 경계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갈등이 증폭되던 같은 해 6월25일 이스라엘 병사 길라드 샬리트가 가자지구에서 납치됐다. 이스라엘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작전명 ‘서머 레인’(6월28일~11월26일)을 단행했다. 약 5개월간에 걸친 이스라엘군의 공세로 가자지구 주민 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7년 6월 총선 패배에도 정권을 내놓지 않던 파타당에 맞서 하마스가 물리력을 동원해 가자지구를 장악했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를 강화했다. 물자와 인력의 출입이 차단되면서, 가자지구의 실업률이 단기간에 70%까지 치솟았다. 같은 해 9월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적대 지역’으로 선포했다. 전면 봉쇄의 시작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핫 윈터(2008년 2월29~3월3일) △캐스트 리드(2008년 12월27~2009년 1월18일) △리터닝 에코(2012년 3월9~14일) △프로텍티브 에지(2014년 7월8~17일) 등의 작전명으로 무시로 가자지구를 때려댔다. 2023년 10월7일 이전에도 가자지구의 상황은 지난 1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1967년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주민의 거주민 등록과 신분증 발급 권한을 쥐고 있다. 1993년 오슬로협정에 따라 이듬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출범한 뒤에도 마찬가지다. 팔레스타인 주민의 여권과 신분증, 출생증명서가 공식 인정을 받으려면 자치정부는 물론 이스라엘 당국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팔레스타인 주민의 신분증에는 지정된 거주지가 명시돼 있다. 자치정부는 이를 변경할 수 없다. 자치정부는 1948년 5월 이스라엘 건국 이후 국외로 흩어진 약 600만 명의 팔레스타인 실향민에게도 신분증을 발급해줄 수 없다. 가족을 만나기 위해 방문한 외국 거주 팔레스타인 주민도, 지정된 거주지가 아닌 지역에 사는 주민도 이스라엘은 ‘불법 체류자’로 간주한다.
팔레스타인 신분증 소지자는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동예루살렘 거주자는 파란색 신분증을 발급받는다. 파란색 신분증을 발급받으면 이스라엘 지역을 비교적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요르단강 서안지역과 가자지구에 사는 주민들은 녹색 신분증을 발급받는다. 일부 주민은 여전히 과거에 발급받은 신분증(서안지구 주민은 주황색, 가자지구 주민은 적갈색)을 사용하기도 한다. 신분증에는 지정된 거주지와 종교 등이 기재돼 있다.
가자지구 신분증 소지자는 서안이나 동예루살렘에서 노동을 하거나, 그곳으로 이주할 수도 없다. 치료 등 인도주의적 목적에 한해 이스라엘 당국이 사전 보안허가를 내줘야만 이들 지역 방문이 가능하다. 이스라엘 군사명령 1650호(2009년)는 서안지역에서 태어났거나 가자지구에서 서안으로 합법적으로 이주했더라도, 이스라엘 당국이 발급한 허가증 없이 서안에 거주하면 체포·추방 또는 7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반면 동예루살렘이나 서안지역 주민은 가자지구로 이주가 허용된다. 이스라엘은 2011년 10월 하마스가 5년간 포로로 붙잡아둔 병사 길라드 샬리트와 팔레스타인 수감자 맞교환에 합의했는데, 당시 서안지역과 동예루살렘 출신 수감자 131명을 가자지구로 추방한 바 있다. 가자지구를 ‘유배지’로 여긴 셈이다. 작가 겸 인권운동가인 무함마드 셰하다는 2022년 1월24일 인터넷 매체 뉴아랍에 보낸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더욱 심각한 것은 팔레스타인 주민은 영원히 이스라엘의 ‘비인도적 분류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자지구 출신 팔레스타인 주민이 독일 국적을 취득한 뒤 팔레스타인 국적을 포기했다고 하자. 그가 독일 여권을 이용해 서안지역이나 동예루살렘을 방문하려 하면 이스라엘은 이를 불허한다. 독일 국적을 취득했더라도 이스라엘 당국은 그 사람을 ‘가자지구 출신’으로 간주해 기존 방문 제한 조처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이는 가자지구 출신 부모를 둔 외국 국적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가자의 비극은 뿌리가 깊다. 제도화된 차별이 어제도, 오늘도 가자를 억누르고 있다. 가자는 대체 어떤 곳인가? 유대계 미국인 작가 마샤 게센은 2023년 12월9일 뉴요커에 보낸 기고문에서 이렇게 썼다.
“지난 17년 동안 가자는 인구가 초밀집되고, 지독히 가난하며, 장벽으로 둘러싸인 채, 극소수의 인구만 짧은 시간이나마 외부 출입을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달리 말해, 가자는 게토다. 나치가 점령한 동유럽 국가의 유대인 게토 말이다.”
가자를 ‘게토’에 비유한 건 게센뿐이 아니다. 극우 유대주의 정당 출신인 베자렐 스모트리치 이스라엘 재정부 장관도 2023년 12월31일 육군 라디오와 한 인터뷰에서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가자지구 주민들의 이주를 장려해야 한다. 가자지구에 지금처럼 아랍인 200만 명이 아니라 10만에서 20만 명 정도만 산다면, 전쟁 이후에 대한 논의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며 “그들도 떠나고 싶은 거다. 그 게토에서 75년을 살아왔으니”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모두 떠날 때까지 전쟁을 지속하려는가? 가자는 오늘도 봉쇄된 채 매를 맞고 있다.
팔레스타인 보건당국은 2023년 10월7일 개전 이후 전쟁 355일째를 맞은 2024년 9월25일까지 이스라엘군 공격으로 가자지구 주민 4만1495명이 숨지고, 9만6006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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