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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조정합시다!

등록 2014-04-22 17:23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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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번호부 속에는 정리되지 못한 삶이 구겨져 있다. 부지런히 발품 팔며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더니 어느새 연락처만 한가득이다. 그중에는 더러 낯선 이름도 보이고, 꼼꼼히 챙기지 않아 헷갈리는 동명이인도 있다. ‘그런들 어떠하리오!’ 하는 심정으로 관대하게 넘어가기 일쑤지만, 아주 가끔 그것들이 불편해지는 날이 있다. 왠지 너무 많은 장신구를 걸친 듯한 느낌,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무겁게 내려앉는 날. 그런 날에는 전화번호부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책상에 앉는다. 휴대전화 속 전화번호부를 열어 가나다순으로 가지런히 정렬된 이름들을 살펴본다. 나름의 정리해고 원칙을 세운다. 1순위는 당연 ‘옷깃만 스친 당신’이다. 가벼운 뒤풀이 자리에서 술기운 반, 예의 반 섞어 주고받은 연락처가 여기에 속한다. 물론 이들과 추후에 나눈 메시지나 통화는 전무하다. 그 사실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그들과 결별할 수 있는 힘이요 근거다. 다음으로 약간의 고민과 갈등을 더해 동아리 선후배를 숙청하고, 학창 시절 동창들 번호까지 검열을 끝마친다. 전화번호의 구조조정은 이렇게 관계의 무게를 재는 일이다. 나와 그 사람을 이어주는 인연의 끈이 얼마나 단단하고 팽팽한지 따져보는 일인 것이다. 그러고 나면 한결 가벼워진 전화번호부가, 한껏 밝은 빛으로 반짝인다. 성에를 지우고 난 거울 같은 느낌.

마음속 용해되지 않은 침전물로 남은 전화번호부. 세상 사는 일이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함께 그리는 거대한 그림이라면, 연락처가 늘어나는 것도 대수로운 일은 아닐 게다. 시간과 자리에 따라 새로운 이름을 소개받는 기쁨도 분명 없지 않다. 그럼에도 아쉬운 건 만남은 잠깐이요 이별은 순간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사실. 거기에는 인맥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풍토가 한몫한다. 혈연·지연·학연을 필두로 온갖 지엽적인 소모임까지. 정으로 합심했다기보다 혹시 모를 미래의 일들을 염려해 의기투합하곤 한다. 전화번호만 있으면 수일간 연락 없이 지냈던 날들도 거뜬히 넘어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다. 마치 그러라고 있는 것처럼 경조사 때마다 모든 연락처가 동원되곤 한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또 하게 된다. 이 많은 인연들 사이에 내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세상을 꼭 이기심으로만 살피지 않는다면 어쩌면 수많은 전화번호부는 외로움의 표시일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연결돼 있다는 위로, 이 거친 세상을 적어도 나 혼자 감내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 우리의 내면이 부지불식간에 그런 것들을 쫓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의구심의 끝에서 또 다른 길을 모색해본다. 간편해진 연락처를 들고 오랜만에 어릴 적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자. 아무런 전제도 달지 않았던 순수한 우정. 그 때 묻지 않은 인연에 안부를 물어보는 건 어떨까.

이주형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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