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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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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됐다

사고 발생 처음으로 돌아가 살펴본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 8가지
등록 2014-04-22 08:42 수정 2020-05-02 19:27
4월16일 아침,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물밑으로 가라앉은 여객선에서 탈출한 승객들을 해양경찰 등이 구조하고 있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4월16일 아침,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물밑으로 가라앉은 여객선에서 탈출한 승객들을 해양경찰 등이 구조하고 있다. 서해지방해양경찰청 제공

제주 귀촌을 준비하는 이아무개(39)씨는 인천∼제주 간 여객선에 자주 몸을 싣는다. 지난해 2월부터 출항한 세월호도 두세 번 탄 적이 있다. 여객선을 이용할 때마다 그는 단 한 번도, 사고시 대피 요령이라든가 구조용품 사용법을 안내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해양경찰청이 고시한 ‘여객선 안전관리지침’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선장은 출항 후 가급적 빠른 시간 내에 모니터 및 선내 방송시설을 이용하거나 선원의 직접 시범 등을 통해 기상상태, 출항 전 점검결과 내용·구명동의 사용법 등을 알려야 한다.” 그뿐만 아니다. 여객실·통로 등 승객이 보기 쉬운 장소에 구명조끼 착용법 등을 게시해야 한다. 이러한 지침은 휴짓조각이었다. 정부는 관리·감독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이씨는 또 세월호를 탈 때마다 선실 내 소음을 피해, 화물칸에 있던 자신의 차 안에 머물렀다고 했다. 안전을 위해 승객이 화물칸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씨가 화물칸으로 들어가는 것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4월16일 오전, 인천에서 제주도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대형 사고가 일어날 때마다 접하게 되는 익숙한 상황이 다시 펼쳐졌다. 여객선을 책임졌던 선장은 ‘1호’로 탈출했고, 사고를 대비해 구비된 안전장치는 하나도 작동되지 않았다. 매뉴얼도, 실행력도 부재한 한국 사회의 위기 대응 현주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은 여객선이 침몰한 최초의 시간으로 되돌아가 대형 참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목조목 짚었다. _편집자

짙은 안개가 내려앉은 4월16일 아침, 여객선 세월호는 전남 진도 관매도 인근 바다를 지나고 있었다. 전날 밤 9시쯤 승객 476명을 태우고 인천을 출발한 세월호는 제주도로 가는 길이었다. -아침 7시30분-부터 3층 식당에서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는 경기도 안산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은 1반부터 차례로 줄을 섰다. 빨리 아침을 먹은 몇몇 학생은 갑판에 나가 바다를 보며 셀카를 찍었다. 나머지는 4층 객실에 머물렀다.

늦은 걸 만회하려 속도를 높이다

아침 8시- 교대시간에 3등 항해사 박아무개(25·여)씨가 조타실 키를 잡았다. 박씨는 입사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은 ‘신참’이다. 선박직원법 시행령을 보면, 세월호(6825t) 같은 3천t급 이상 연안 여객선은 1급 또는 2급 항해사가 선장을 맡도록 돼 있다. 하지만 안전한 구간에서는 3급 항해사에게 선장이 키를 맡길 수도 있다. 문제는 여객선이 ‘맹골수도’(진도군 조도면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 해역)라는 위험한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섬 사이를 누벼야 하고 조류가 빨라 운항하기 힘든 곳이다. 선장이나 경력이 많은 항해사가 지켜봐야 했다.”(조타수 오아무개씨) 하지만 당시 선장 이준석(69)씨는 조정실에 없었다. 이 선장은 3~4시간마다 상황을 점검하러 잠시 들렀을 뿐이다. 사실 선장 이씨도 ‘대리’였다. 세월호의 원래 선장은 1급 항해사 신아무개(47)씨였다. 하지만 신씨가 휴가를 떠나자 2급 항해사인 이 선장이 이날 여객선 운항을 대신했다.

여객선의 속도는 빨랐다. 당시 속도는 19노트(시속 약 36km)로 닷새 전(4월11일)보다 2노트 빨랐다. 인천~제주 간 정상 운항 시간은 13시간30분. 예정대로라면 이날 오전 10시30분께 제주항에 닿아야 했다. 하지만 전날 짙은 안개 탓에 출발이 2시간30분 늦은 데다 연착까지 예고된 상태였다. 여객선은 보다 빨리 도착하려고 달렸다.

1. 6천t급 여객선을 4개월 신참이 홀로, 그것도 고속으로 운항했다. 운항도 만만치 않은 구간이었다. 초보 운전자가 대관령 고갯길을 100km로 달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게 높아졌다.

단원고 2학년 9반 김아무개(17)양은 식당칸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배가 흔들렸지만 파도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갑자기 배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식탁 위의 식기가 떨어지고, 친구들이 소리쳤다. 가판에 나와 있던 승객 박아무개(57)씨는 ‘쾅’ 하는 소리를 들었다. 곧이어 배가 기울어지더니 화물이 쏟아져내렸다. 큰 소리에 놀란 단원고 학생이 -아침 8시52분- 전남소방본부에 첫 조난 신고를 했다.

여객선은 -아침 8시48분- 갑자기 항로를 남서쪽(오른쪽)으로 거의 90도 꺾었다. 이때 화물이 반대편인 왼쪽으로 쏠려 배 왼쪽 부분이 가라앉았다. 4분 뒤인 -아침 8시52분- 에는 다시 북쪽으로 한층 예리하게 방향을 확 틀었다. 배 안 화물은 더 심하게 쏠렸다. -아침 8시55분- 해상관제센터 제주센터에 긴급 무전을 쳤다. “본선(세월호)이 위험합니다. 지금 배 넘어갑니다.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빨리 좀 와주십시오.” “인명 피해는 없습니까.” 관제센터가 물었다. “확인 불가합니다. 선체가 기울어져 이동 불가합니다.” “인명들 구명조끼 확인하시고 ‘퇴선’(배에서 하선)할지 모르니 준비 좀 해주십시오.”

첫 조난 신고자는 승객

2. 첫 조난 신고자는 승객이었다. 선원의 긴급 무전은 그보다 3분이나 늦었다. 무전 내용도 엉망이었다. 승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함에도 인명 피해를 확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비상상황 대응 매뉴얼을 담은 ‘세월호 운영관리 규정’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규정을 보면,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인명이 최우선이다”라고 돼 있다.

오전 9시13분- 여객선은 정반대의 안내방송을 시작했다. “안심하세요. 움직이지 말고 방 안에서 기다리세요.” ‘승객을 안심시키는 방송을 하라’는 윗선의 지시 때문이었다. 이후 30분간 “방 안에 가만히 있으라”는 똑같은 방송이 일곱 차례나 되풀이됐다. “구명조끼를 입으라. 구명정이 오고 있다고 한다”는 내용도 있었지만 퇴선 명령은 없었다. 여객선에 물이 절반 이상 차올랐다. 22살 승무원 박지영(사망)씨가 스스로 판단해 안내방송을 했다. “여객선 침몰이 임박했으니 승객들은 바다로 뛰어내리십시오.” 사고 발생 1시간이 훨씬 지난, 오전 10시15분이었다.

3. 기울어져 가라앉는 배에서 선실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해상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침수가 확인됐다면 승객을 전원 갑판으로 대피시킨 뒤 구명정을 이용해 탈출시키는 게 기본”이라고 지적한다. 해외 주요 선사의 매뉴얼은 그렇다. 갑판에 구명조끼와 구명정이 준비돼 있어 승객을 빨리 모을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월호 승무원이 “방 안에 가만히 있으라”는 지침을 내린 것은 대응 훈련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해사 출신인 해운업계 관계자는 “선원들이 타는 배에선 팀을 짜 ‘퇴선 훈련’을 하지만 여객선의 경우는 그러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잘못된 안내방송을 곧이곧대로 믿고 대다수 승객은 선실에 그대로 머물렀다. ‘퍽’ 실내등까지 꺼졌다. 컴컴한 어둠에 휩싸였다. 불안한 마음을 가족에게만 소식으로 전한다. 단원고 2학년 신아무개(17)군은 어머니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엄마 말 못할까봐 미리 보내놓는다. 사랑해.” 김아무개(17)군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배가 가라앉으려 해. 구명조끼 입고 침대에 누워 있어. 살아서 만나요.” 울먹이는 음성을 남기고 전화가 끊겼다. 박아무개(17)군도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배가 반쯤 기울어져 아무것도 안 보여요. 나 아직 구명조끼 못 입었어요”라고 말했다. 안내방송을 잘 따랐던 오른쪽 선실의 학생들이 대부분 탈출에 실패했다.

아무도 본 적 없는 매뉴얼

4. 승객들이 잘못된 지시에 복종한 이유도 선원과 다르지 않다. 위기 대응 훈련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서해훼리호 참사 20주기를 맞아 지난해 7월 한국해운조합은 구명조끼 착용법 등을 담은 매뉴얼을 제작해 연안 여객선 180여 척에 배포했다. 하지만 그 안전 매뉴얼을 세월호에서 봤다는 생존자는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 구명조끼의 위치조차 알지 못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일까. 페이스북에 올라온 크루즈 유람선 경험담을 들어보자. “베네치아에서 9만2400t급 규모의 ’뮤지카’호를 탔다. 선원까지 3천 명이 승선하는 배였다. 탑승한 모든 승객은 반드시 대피 훈련을 받아야 했다. 대피 훈련이 시작되면 승객들은 객실에 ‘예쁘게’ 보관된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객실별로 지정된 갑판 근처의 1차 집결지로 이동한다. 거기서 대피 절차에 대한 영상을 상영했다. 선원들이 구명조끼 착용법, 구명정 탑승법 등을 시범적으로 보여줬다. 비상훈련을 끝마쳤음을 승객들은 의무적으로 확인받아야 한다. 만약 참여하지 않으면 강제로 하선시키기 때문이다.”

오전 9시30분- 해경 함정과 헬기가 도착해 구조 작업을 시작했다. 군청색 제복을 입은 10명이 제일 먼저 여객선을 탈출했다. 선장 이씨를 포함한 세월호 선원이었다. 그들은 최초의 ‘생존자’로 기록됐다. 다른 선원은 ‘직원’이라고 밝혔지만 선장은 직업란에 ‘일반인’이라고 썼다. 이들이 전남 진도 팽목항에 도착한 시각은 10시30분이었다. 여객선이 완전히 전복된 시간보다 1분 빨랐다. 이씨는 진도 한국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다. 그때 바닷물에 젖은 5만원짜리 돈을 치료실 온돌 침상에 말리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됐다. 다음날(4월17일) 오전 전남 목포해양경찰서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한 이씨는 “승객과 피해자 가족과 승객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배가 기우뚱한 뒤 갑자기 가라앉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탈출한 이유를 묻자 “배가 가라앉기 시작했고 구조대가 선수로 와서 급한 마음에 올라탔다”고 했다.

앞으로 닥쳐올 끔찍한 사고를 예상하지 못한 채 4월16일 아침, 세월호 승객들이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왼쪽). 왼쪽으로 기울어져 바다로 가라앉는 세월호에서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승객들. 생존자 제공

앞으로 닥쳐올 끔찍한 사고를 예상하지 못한 채 4월16일 아침, 세월호 승객들이 평화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왼쪽). 왼쪽으로 기울어져 바다로 가라앉는 세월호에서 몸의 중심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승객들. 생존자 제공

5. 선장의 도주는 매뉴얼을 넘어 현행법 위반이다. 선원법 제10조(선장의 재선의무)는 “선장은 여객이 다 내릴 때까지 선박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돼 있다. 제11조는 “선장은 선박에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에는 구조에 필요한 조치를 다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위험시 선장이 인명을 구조할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재선의무 위반은 처벌 조항이 없지만 제11조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검경 합동수사본부는 4월18일 이씨 등 3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선장의 임무를 다하지 않고 승객을 다치거나 숨지게 했다는 이유에서다.

왼쪽으로 기운 여객선은 -오전 9시40분-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비규환’의 사고 현장에서 승객들은 뒤늦게 바다로 뛰어들었지만 구명정은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 갑판 양쪽에는 하얀 원통형 캡슐 속에 구명정 46척이 장착돼 있다. 이 가운데 단 한 대만 침수 사고 이후 펼쳐졌다. 이럴 경우 선원들이 인위적으로 띄워야 하지만 그런 조처는 없었다.

해상 크레인 12시간 만에 출발

6. 구명정이 ‘비정상’이었는지, 선원들이 단순히 작동시키지 않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지난 2월 세월호에 구비된 안전장비를 점검했던 관계자는 “구명뗏목·강하식 탑승장치·이탈기 등을 검사했는데, 결과는 이상이 없었다. 선원들이 작동을 시키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해운업계 관계자는 “선박에서 실제 사고 상황을 대비해 구명정을 바다에 떨어뜨려 터뜨리는 실습까진 잘 하지 않는다. 사고가 나야 구명정을 터뜨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구명정이 정상이라도 이를 적절히 사용할 수 있는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일부 선박에선 항해 중에 구명정이 떨어질까봐 밧줄로 묶어놓기도 한다. 이 경우, 위급한 상황에서 밧줄을 끊어내야 구명정을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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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0시31분- 여객선이 전복될 때까지 구조 작전은 선박 주변에서만 이뤄졌다. 차디찬 바닷물 속으로 기울어가는 여객선에 300명 가까이 남아 있는데 해경의 구조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이었다. 상황을 지휘하는 ‘관제탑’ 역할을 맡지 않았다. 배 밖으로 나온 사람들을 헬기나 보트로 건져올릴 뿐이었다. 더 많은 사람이 남아 있는 여객선 내부에는 진입하지 않았다. 훈련을 받고 장비를 갖춘 해경특공대가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다. 생존자 허아무개(51)씨는 “사고 초기 구조 활동에 투입된 장비와 인력이 형편없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당시 해군·소방·해경 등에서 헬기 16대, 선박 24척이 출동했다고 밝혔다.

서해지방경찰청의 해경특공대 7명은 오전 9시30분부터 목포항에 대기했지만 10시11분에야 이동하기 시작했다. 선체 진입을 처음 시도한 것은 여객선이 전복된 지 1시간 가까이 지난 -오전 11시24분-이었다. 이마저도 강한 조류 탓에 16분 만에 중단됐다. -오후 12시30분-에야 구조 헬기(28대), 선박(55척)의 수가 2배로 늘어난다. 대형 참사 가능성이 제기된 지 2시간 뒤였다. 게다가 생존자 구조에 아주 중요한 장비인 해상 크레인은 사고 발생 12시간 만에 출발했다. 해경이 선사 쪽에 요청 책임을 맡겼기 때문이다. ‘크레인 사용 부담’을 떠안지 않기 위한 조처다. 보험료와 절차를 해경이 고수하는 사이 생존자 구조는 더뎌졌다.

7. 사고가 발생하면 ‘최악’이 아니라 ‘최선’의 상황을 상정한다. 본능적으로 인간이 그렇다. 그래서 최악을 생각하는 훈련이 평소에 필요하다. 이러한 훈련이 안 되면 낙관론에 젖어서 결정적 순간을 놓칠 수밖에 없다. ‘세월호 운영관리 규정’에도 비상상황이 발생했을 때 “사태가 낙관적이어도 최악의 사태를 염두에 두고 행동하라”고 돼 있다. 선박 침몰을 앞둔 심각한 상황임을 짐작하면서도 해경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사고 수습을 책임져야 할 안전행정부는 오전 내내 ‘승객 대부분이 구조됐다’고 낙관했다. 구조자 수를 368명으로 발표했다가 164명으로 정정하기도 했다. 이 모든 일은 위기 대응 매뉴얼을 숙지하는 훈련을 평소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났다.

당연한 말이 이루어지는 세상은 어디에

8. 더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안전에 대한 고려 없이 규제를 완화하는 방향으로만 정책을 펴왔기 때문이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해상운송사업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20년으로 묶여 있던 여객선 선령 제한을 최대 30년으로 변경했다. 여객선 사용연한이 연장되면 연간 200억원가량의 비용절감 효과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 변경으로 청해진해운은 2012년 당시 선령이 18년 된 세월호를 인수한 것으로 보인다. 2011년 여객선 가운데, 선령이 25년 이상 된 배는 3척이었으나 2013년 6척으로 늘었다. 절반 이상이 자본금 10억원 미만인 영세한 여객선 업체들이 보유한 것으로, 경영수지 악화 등을 이유로 새 여객선을 확보하지 않는 상황이다. 낮은 운임을 빌미로, 안전운항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다. 국토해양부가 2008년 9월 내놓은 ‘연안여객선 선령제한제도 개선연구 최종보고서’에는 이러한 문구가 쓰여 있다. “정부는 민간 경제 활성화를 도모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완화하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전세계적으로 인간의 안전과 환경을 보호하고자 하는 규제는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추세다. 안전관리가 정착되면 선주의 편익을 비롯해 국민의 안전 편익 또한 증대할 것이다.”

이렇게 당연한 말이,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세상은 여전히 멀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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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1008호 주요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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