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탁기형 선임기자
초등학생인 딸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과목이 ‘즐생’이라고 한다. 아이의 알림장을 보면 ‘내일 슬생 책 준비’ ‘가통 한 장 부모님 보여드리기’ 이런 말들이 쓰여 있다. 과목 이름이 좀 길긴 하다. ‘슬생’은 ‘슬기로운 생활’, ‘가통’은 ‘가정통신문’이다. 남편은 “피곤할 때는 가끔 ‘다커’가 당겨”라고 말한다. 다방 커피라나…. 직장에서 만나는 젊은 아가씨들은 ‘고터’(고속터미널)로 쇼핑하러 가고 ‘뿌염’(뿌리 염색) 할 때가 되었으니 미장원에 들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내가 대학 시절에도 줄임말들이 있었다. ‘학생회관’을 ‘학관’이라고 한다거나 ‘중앙도서관’을 ‘중도’라고 했다. 요즘 줄임말에 비하면 귀여웠던 것 같다. 다들 줄임말을 쓰는 것에 눈살을 찌푸리는 내가 시대에 뒤떨어진 건가 생각하다가도, 나는 뭔가 좀 마음에 안 든다. 심각하게는 초등학교 저학년 선생님들이 먼저 ‘슬생’이라고 말하는 것을 직업정신이 부족하다고 비판하고 싶기도 하고, 가깝게는 세 글자밖에 안 되는 ‘얼음땡’을 ‘얼땡’이라고 줄여 부르는 딸아이에게 무성의하다고 한마디 해주고 싶다. 뭐 대개는 그저 만만한 남편에게 ‘어린애들같이 뭐냐’고 퉁을 주는 정도다.
줄임말이 더 흔하게 된 것은 온라인 대화와 스마트폰을 통한 짧은 문자가 확산됐기 때문일 것이다. 이모티콘과 더불어 이런 줄임말이 편리하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마치 한참 전 ‘사글세’라고 쓰는 것이 표준어가 되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상실감이 든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 복합어 ‘삭월세’를 발음에 충실한다는 이유로 ‘사글세’로 만들어버린 것이 나는 못내 불만이었다. ‘사글세’는 심지어 발음을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한다. 발음을 중시했다면 ‘사궐세’ 정도가 맞지 않나 싶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 ‘사글세’는 그저 게으름의 반영이다.
나는 언어가 변화되더라도 들으면 쉽게 의미를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변화했으면 한다. 그런 정확한 의미 전달을 위해서 또박또박 한자 한자 소리 내어 이야기하는 것은 작은 성의가 아닐까. ‘즐거운 생활’ 이렇게. 순전히 주관적인 느낌에 불과할 수 있지만, 이렇게 한자 한자 소리 내는 것이 더 우아하게 들린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요즘 세상. 말이라도 천천히, 원래의 의미를 생각하며 한자 한자 소리 내어 이야기해보자. 어쩌면 나 같은 아주머니가 줄임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되물어보고 설명해야 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대화는 오히려 간결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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