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큰 조선소를 지은 사람은 정주영 회장뿐이었다. 나도 다롄에다 조선소를 세워서 한국 조선업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얘기를 듣고 싶었다. 유럽 조선소도 크루즈선과 잠수함을 만드는 곳이다. 한국 조선업이 못하는 것이다.”
박한울(가명)씨는 지난해 STX를 떠나기 한 달 전쯤,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과 점심을 함께 했다. STX 남산타워 24층 회장실 한쪽에 마련된 방에 식사가 차려졌다. 회사가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맺은 뒤 실질적으로 은행 관리에 들어가자, 강 전 회장은 식사 약속이 없는 날이 늘었다고 한다. STX는 조선소와 해운회사를 축으로, 중공업과 엔진, 에너지 기업을 계열사로 둔 한때 재계 순위 13위(공정거래위원회 자산 기준)에 오른 대기업 집단이었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2001년 사명 바꾸고 2008년 해외 진수까지</font></font>이날의 메뉴는 흰죽과 된장찌개. 강 회장은 죽을 삼키더니, “박 팀장, 이렇게 이해해줬으면 해요”라며 얘기를 꺼냈다. 그는 중국에 왜 조선소를 짓고 핀란드 조선소를 샀는지 박씨 등 직원들에게 설명했다. 직원들은 그동안 회사가 어려움에 빠지자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하는 의문이 많았다.
박씨는 그때 강 회장이 조금은 이해됐다고 한다. 박씨 역시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일하다가 STX로 전직했다. “대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다 알지만, 직원들은 그냥 거기선 머슴이에요. 특히 비서실이나 홍보실, 영업 쪽에서 일해보면 알죠.” 대신 그는 “주류를 깨보자”는 선택을 했다. “우리 경제가 전부 재벌 2~3세가 주무르는데, 재벌기업과는 다른 곳에서 일해보자는 생각이 컸어요. ‘나사’가 되지 않고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생각, 그런 게 좋았죠.”
그는 강덕수 회장도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같은 경제단체 회의에 가면 다른 총수들이 강 회장이 ‘운 좋게 돈 번 거 아니냐’고 강 회장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해요. 그러니 강 회장이 재벌들 사이에서 인정받아보려는 의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STX는 급격히 성장한 기업이었다. 2001년 강덕수 회장은 쌍용중공업을 인수해 회사명을 STX로 바꾼 뒤, 2001년 10월 법정관리 중이던 대동조선(현 STX조선해양)을 시작으로 2002년 산단에너지(현 STX에너지), 2004년 범양상선(현 STX팬오션)을 차례로 인수했다. ‘선박 엔진-조선소-해운회사’로 이어지는 수직계열화를 완성한 뒤, 국외로 눈을 돌려 2007년 노르웨이의 크루즈 건조업체 아커야즈(현 STX유럽)를 인수하고, 2008년에는 중국 다롄에 조선소를 만들어 국외에서 배를 진수하기에 이른다.
모두 10여 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강 회장이 회사를 일군 지 10여 년 사이에 STX그룹은 종업원 6만여 명에 매출액 18조원이 넘는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성장한 제조업종의 기업은 없었다. 2009년엔 강덕수 회장은 대기업 총수들의 모임인 전경련 부회장도 됐다. 이른바 ‘샐러리맨 신화’가 완성된 것이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타기만 하면 함께 오를 수 있는 ‘로켓’</font></font>거침없는 성장을 거듭하며 STX는 대학생이 가고 싶은 대표적 기업으로 꼽히기 시작했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해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2005년엔 순위에도 없던 STX조선해양이 2006년 69위로 처음 등장하더니 2007년 20위까지 점프했고 2008년엔 24위를 기록했다. 2007년 기준으로 보면 KT, 기아자동차,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등은 모두 STX조선해양보다 순위가 낮았다. 취업 선호도가 높은 전통의 대기업을 제친 것이다. STX그룹 계열사의 한 임원도 “6~7년 전에 입사했던 직원들 수준이 굉장히 높았다. 인재들이 들어왔다”고 했다.
2005년 STX에 입사한 김진우(가명)씨도 당시를 이렇게 기억한다. “기업 규모에 견줘 신입사원의 처우가 좋았어요. 중국에 2주 연수도 보내주고, 커가는 기업이니 여기서 열심히 하면 나도 임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죠.” STX는 그해에 우수한 인재를 뽑기 위해 신입사원 첫 연봉을 전년보다 700만~800만원 올렸다고 한다.
더구나 당시 STX는 꽉 짜인 관료제 사회처럼 굳어버린 대기업 조직이 아닌 ‘로켓’이었다. 회사가 성장하고 있어 일단 타기만 하면 함께 위로 오를 수 있었다. 이때 공채 1기로 입사한 김씨는 유통업 쪽 대기업에도 합격했지만 STX를 택했다. “너무 큰 조직에서 소모품이 되지 않을 것이란 기대도 있었죠.”
STX그룹 계열사에서 일한 바 있는 조민성(가명)씨도 “당시 젊은 직원들은 신이 날 수밖에 없었죠”라고 말했다. “일이 팍팍 주어지고, 그룹이 급속도로 커가는 게 보여서 자부심도 있었어요. 특히 강 회장이 직원들에게 미래 비전을 확실히 제시해줘서 젊은 직원들이 좋아했어요.” 실제 STX에선 입사 6~7년 만에 과장을 달고 리더가 된 직원이 나왔다. 높은 연봉과 빠른 성장 기회는 매력적이었다.
2007년 STX에 입사한 신정혁(가명)씨는 채용설명회에서 “회사는 빨리 크는데 일할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에 솔깃했다. 신씨 역시 다른 재벌기업의 합격 소식을 마다하고 STX를 택했다. “불과 입사 1∼2년 된 선배들이 나와서 자신이 담당한 핵심 업무를 설명하는 거예요. 입사해보니 확실히 젊은 사원에게 기회가 많이 있었죠.” 이런 기대 속에서 우수한 사원들이 모여들어 한때 STX그룹의 지주회사 직원 350명 가운데 서울대 출신이 80명에 이른 적도 있었다.
이들의 희망은 때마침 조선업 최고의 호황이라는 순풍을 탔다. 미국발 금융위기 전에 전세계 해운 물동량은 최고로 치솟고 있었다. 조선소엔 선박 발주가 폭주했다. STX의 양대 축인 팬오션이 수천억원의 돈을 벌어들이는 등 그룹 재무구조는 우량해 보였다.
“강덕수 회장은 본능적으로 돈을 은행에 묶어두는 것을 못 봐요. 좋은 말로는 기업가정신인데 독이 될 수도 있었던 거죠.” STX그룹 계열사에서 일했던 전 임원 정성환(가명)씨는 강덕수 회장의 경영이 가장 빛날 때가 발목이 잡히는 때였다고 회고했다. STX는 2007년부터 아커야즈를 인수하는 데 1조원, 중국 조선소 건설에 2조원을 투자한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불경기의 수직계열화, 위기가 전염되다</font></font>당시 STX는 큰 배를 건조할 만한 조선소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경남 진해 조선소의 크기가 작아 매출을 키울 수 없었다. STX뿐만 아니라 한진중공업도 부산의 조선소가 작아 필리핀 수비크에 대형 조선소를 만들 때였다. 크루즈선도 국내 조선소가 하지 못하는 분야로, 기술 우위에 있는 국내 조선 빅3의 견제를 피할 수 있는 틈새시장이었다. 재벌 그룹들이 내수 시장에서 독점하고 있는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경쟁 속에 들어가기보다 국외 시장에서 활로를 찾는 방식이었다.
STX 전 직원 신씨는 “아커야즈 인수와 다롄조선소 투자를 당시 회사 내부에선 우려할 만한 투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죠. 금융위기 전만 해도 낙관론이 팽배했고, 그 뒤에도 이 투자가 회사의 미래라는 기대감과 우려가 혼재했어요. 사실 직원들 대부분이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조선 경기가 꺾이면 회사의 상황이 어떻게 될지 경험이 없었던 것도 있어요”라고 돌이켰다. 이들은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럽발 재정위기가 밀려왔어도 STX가 잘 헤쳐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파도는 해안가에 도착하기 전에 가장 높다. 30년 이래 최대 조선업 호황이라는 파도에 올라탄 STX는 그 파도가 곧 꺼질 줄 미처 몰랐다. 어쩌면 파도를 타는 서퍼들처럼 다른 큰 파도로 옮겨갔어야 하는데 때를 놓친 셈이었다. STX그룹은 결국 불황의 장기화로 인한 유동성 문제에 빠지면서, 지난해 STX팬오션은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STX조선해양은 채권단 관리에 들어가는 등 그룹이 해체된다.
STX그룹 계열사의 한 전직 고위 임원은 “돌이켜보면 당시에도 위기임을 모른 것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불황이 오래갈 줄은 몰랐던 거죠”라고 했다. STX그룹이 완성한 수직계열화는 경기가 좋을 때는 시너지 효과를 내지만,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위기가 전염되는 효과를 낳는다. 해운업이 이익을 못 내면서 조선소에 배를 발주하지 못하고, 조선소는 계열사에 엔진을 주문하지 못한다. 순환 구조를 통해 함께 매출과 이익이 떨어지는 것이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세계 최대 해운사인 AP 몰러-머스크도 자회사로 있던 조선소를 팔아버렸다. 만약 수직계열화의 효과가 좋다면 조선소 운영을 포기하겠는가. 머스크는 대신 좋은 배를 만드는 조선소에 발주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는 판단을 했다”고 말했다. 조선소 역시 홀로 버틸 힘이 없었다. 조선소 간 경쟁으로 뱃값이 떨어져 이른바 ‘저가 수주’를 해야 하는데다, 다롄 조선소 건설 등에 자금을 쏟아붓는 바람에 유동성에 문제가 온 것이다.
물론 STX가 사업다각화를 추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STX는 대우건설과 하이닉스 등 기업 인수·합병 매물이 나올 때마다 기웃거렸다. 하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신규 업종을 인수할 실탄도, 주변 여건도 마땅치 않았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위기관리 능력의 부족? </font></font>더구나 이 모든 과정이 강 회장의 결정으로만 진행됐다는 것은 STX의 큰 약점이었다. “강덕수 회장은 남의 말을 잘 안 듣고 본인이 다 결정하는 성향이 있었어요. 대형 인수·합병 건은 다 강 회장의 판단이었죠.” 전 임원 정씨는 강 회장의 경영 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강 회장을 옆에서 도운 STX 경영진은 주로 3곳 출신으로 분류된다. 강 회장과 함께 일했던 쌍용 출신, 인수한 기업인 팬오션 출신, 그리고 외부에서 스카우트해온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확장 앞으로’를 외치는 강 회장에게 적절히 조언하지 못했다. 경영권 승계를 위해 STX건설에 계열사들을 동원해 지원하라고 조언한 측근도 있었다. 그룹 전략기획팀에서 일한 바 있는 이준성(가명)씨는 “임원들이 위기를 인정하지 않고 업황만 살아나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전반적으로 느슨했죠”라고 기억했다. STX그룹의 전 사외이사와 자문교수들 역시 강 회장의 결정에 아무런 조언도 할 수 없었다.
STX 전 직원 공진식(가명)씨는 “다롄 조선소는 처음부터 경보신호가 있었다. 안정화를 하려면 3년이 필요한데, 경기는 안 좋고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인 게 보였다. 그런데 강 회장이 버리지를 못했다. 자신이 크게 키우고자 했으니 못 버리는 거다”라고 말했다.
반면 STX의 전 고위 임원은 이렇게 짚었다. “기업은 오너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때 바로잡았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건 현재의 생각일 뿐이죠. 오너의 생각을 지원하는 게 밑에서 일하는 임원의 역할이에요.”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STX에 위기관리 능력이 부족했을 가능성을 지적한다. “초호황 시절에 기업이 크다보니 STX는 리스크(위기) 관리를 못했던 문제가 있었다. 급격하게 성장하다보니 돈을 만들어내는 부서보다 위험을 관리하는 것은 후순위였을 테고, 스태프 조직의 능력이 견제와 균형을 갖추는 데 실패한 것이다.”
여기에 딸들이 지분을 가진 STX건설에 그룹 일감을 몰아줬다는 의혹은 임직원들의 자긍심을 깎았다. 자식에게 경영권 승계를 하기 위해 계열사를 동원해 지원한다면 다른 재벌과 다를 바 없는 거였다. STX 전 직원 신씨는 당시 “실망도 했고, 족벌기업과 다른 곳에서 일한다는 자부심도 사라졌죠”라고 했다.
STX의 좌초는 단지 강덕수 샐러리맨 신화의 실패로만 받아들여져선 안 된다. 1990년대 말 이후 제조업종 기업으로는 재벌을 제외하곤 가장 크게 성공한 기업의 실패다. ‘대기업에 입사하기보다 중견기업의 성장에 인생을 걸어보겠다’는 직원들의 희망도 무너졌다. 한편으론 기존 재벌처럼 계열사를 늘려가며 기업을 키우고 자본을 늘리는 방식이 이제는 더 이상 경쟁력을 가지기 힘들다는 사실도 분명히 시사한다.
<font size="3"><font color="#C21A1A">“직장인 중 누가 꿈을 꾸겠어요?”</font></font>“한국 경제에서는 가진 자들만이 가지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강덕수 회장이 경영을 잘못한 것도 있지만, STX는 결국 돈이 없어서 무너졌죠. 기존 재벌들이야 정치적인 줄도 있고 도움받을 네트워크도 있고 계열 금융사도 있었는데, 강덕수 회장은 가진 게 하나도 없었어요.” STX그룹 공채 1기 출신인 임도균(가명)씨는 회사를 떠난 뒤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젊은 시절 함께했던 전 직장이라 의미를 두는 것일 수도 있지만, 임씨는 “결국 없는 바닥에서 시작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구나 하는 것을 직원들이 많이 느꼈을 거예요. 그게 STX가 우리에게 준 충격이 아닐까요”라고 한숨을 쉬었다.
STX의 전 고위 임원은 “현대나 금호 등 다른 대기업을 같은 잣대로 한번 들여다보세요. 거기도 업황이나 투자가 안 좋아서 헤매지만 오너가 쓰러지진 않잖아요. 강 회장의 경영이 옳았다는 것은 아니에요. 공과를 균형적으로 보자는 거죠”라고 했다. “강 회장과 STX를 실패라고만 생각하면 직장인 중 누가 대기업 오너가 되겠다는 꿈을 꾸겠어요. 그냥 안전한 기업에 들어가 월급쟁이로 평생을 사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지.” 강덕수 회장과 STX의 실패가 재벌기업이 이끄는 21세기 한국 경제에 던지는 질문이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황예랑 기자 yrcomm@hani.co.kr·김성환 기자 hwany@hani.co.kr<font color="#991900"><font size="3"> 1008호 주요 기사</font><font color="#FFA600">•</font> [표지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됐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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