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8~11월은 어떤 때였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대통령 선거 개입에 나선 국가정보원에 개혁을 주문하고, 남재준 국정원장은 ‘셀프 개혁안’을 내놓겠다며 야권의 사퇴 요구에 귀를 닫던 시기다. 박 대통령은 ‘도둑(국정원)에게 도둑을 잡으라는 것이냐’는 야권의 비판을 “국정원 개혁은 벌써 시작됐다”는 말로 간단히 뿌리쳤다.
그즈음 ‘남재준의 국정원’은 엉뚱한 궁리를 했다. 자신들이 수사한 간첩 사건이 1심에서 무죄(8월)가 나자 증거 문서들을 가짜로 꾸몄다. 검찰은 11월에 이 문서를 핵심 증거인 양 2심 재판부에 냈다. 대통령이 “개혁이 시작됐다”고 호언한 국정원이 증거까지 조작해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탈법을 저지른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셀프 개혁’의 와중에 벌인 일</font></font>지난 4월15일. 박 대통령과 남 원장은 국정원의 위법행위에 대해 사과했다. 대통령은 30초간 국무회의 발언 형식을 빌려, 국정원장은 기자들의 질문을 거절한 채 3분간 혼자 사과문을 읽는 것으로 사태 수습에 나섰다. 야권의 촌평처럼, “컵라면 하나 끓이기도 부족한 짧은 시간”의 사과로, 국기 문란 사건의 파장을 덮으려는 시도였다.
국정원의 2012년 대선 개입에 대해 “이전 정권의 일”이라며 선을 그은 박 대통령이 증거 조작에 대해선 “송구스럽다”고 밝힌 것은 ‘현 정권에서 벌어진 탈법’을 피해갈 방도가 별로 없어서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번 사건이 민심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슈로 덩치를 키우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하지만 박 대통령과 남 원장의 ‘동시 사과’를 진정한 사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많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 소장은 “박 대통령과 남 원장 모두 증거 조작을 ‘과거의 잘못된 관행’이라고 규정했다. 증거 조작은 국정원의 오랜 관행이니 현재 원장인 남 원장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말했다. 얼핏 ‘사과’로 보이지만, 실은 남 원장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이벤트성 사과’라는 것이 야권의 시각이기도 하다.
실제 박 대통령은 남 원장을 해임하지 않고 국정원의 ‘환골탈태 개혁’을 주문했다. 경찰 출신 국정원 2차장을 사퇴시키고, 군 출신 남 원장을 끝까지 곁에 두는 카드를 택했다. 증거 조작 사건이 불거진 뒤 거듭 거짓 해명을 내놓은 ‘남재준의 국정원’을 다시 믿겠다는 뜻이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무단 공개,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 방해, 대선 개입 사건을 총지휘하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사생활 캐기, 간첩 증거 조작 사건 등 정치적 논란의 한복판에 거침없이 뛰어든 남 원장에게 ‘보상성 신뢰’를 거듭 보낸 것이다. 좀체 끊어지지 않을 듯한 ‘박 대통령과 남 원장’의 이 집착적 관계는 도대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정치권에선 우선 “두 사람의 이념적 DNA와 코드가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한 의원의 얘기다.
“2008~2012년 남 원장이 한 강연을 보면, ‘5·16은 쿠데타이지만 잘 살고자 하는 국민 여망의 결집이며 민주주의 발전과 산업화의 근간이 됐다’고 인식하고 있다. ‘전두환 신군부’의 12·12는 쿠데타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은 북한에 동조하거나 퍼주기를 한 좌파로 보고 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과는 2007년부터 국방·안보 분야 특보로서 인연을 맺어왔다. 그가 인정하는 대통령은 박정희·박근혜 대통령 2명뿐인 것이다. 지금의 국정원은 대통령에게만 충성하는 조직이 되고 있다. 박 대통령이 남 원장을 해임하지 않은 것은 ‘나에게 충성하면 이렇게 보호해줄 것’이란 강력한 메시지도 여권에 보낸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고비 때마다 정치에 뛰어든 ‘논개’</font></font>그는 “남 원장은 유신 시절 박정희 대통령을 추종한 차지철 전 중앙정보부장과 같은 존재”라고 빗댔다. 정보위 소속의 다른 의원은 “남 원장은 이념적으로 극우·보수주의자이면서, 군에 있을 때 강직한 군인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박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국정원 사정을 잘 아는 인사들은 남 원장이 ‘통일 대박’을 거론한 박 대통령의 안보 조력자이기 때문이란 분석을 내놓는다. 남 원장이 ‘박근혜식 통일’을 위한 실무에 관여하고 있어 정권 바깥으로 내칠 수 없다는 것이다.
“남 원장은 전쟁사도 깊이 연구했다. 북의 군사 동향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예측하고 조언할 수 있는 사람이다. ‘통일 대박은 북한의 붕괴→흡수통일’을 전제로 한다는 시각도 있는 것 아니냐. 군사·안보 전문가인 남 원장을 (흡수통일로 가기 위한) 대북 강경 드라이브를 거는 상징적 위치(국정원장)에 계속 두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여권에 불리한 고비마다 ‘음지의 국정원’을 포기한 채 ‘공개 정치’를 펼치며 정국 쟁점을 돌려버린 남 원장의 노고에 대한 치하라는 의견도 있다. 지난해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 정국 이슈로 뜨자, 남 원장이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논란’으로 정국을 어지럽힌 게 대표적이다. 국정원 사정에 밝은 다른 인사는 “어찌됐든 남재준의 국정원이 정치적 논란에 여러 차례 스스로 올라서면서, 박근혜 정권의 다른 실정이 부각되지 못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남 원장 보호’는 높은 지지도에 대한 박 대통령의 자신감 표출이란 의견도 나온다.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하든, 증거를 조작하든, 대통령의 지지도는 60%대로 견고하기 때문에, 대통령의 독선이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지지도가 높다고 해서 여론과 민심의 요구를 반영하지 않고 가겠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탈법을 저지른 대통령 직속기관의 수장이 자리를 보전하는 것은, 국가기관과 대통령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대공 수사 과정에서 증거 조작을 하고도, 오히려 사과 기자회견에서 “대공 수사를 강화하겠다”는 남 원장의 구상은 오만한 발상이란 비판도 제기된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는 최근 성명을 내어 “국정원이 간첩 사건을 조작하기 위해 증거를 날조한 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국가권력의 반인권적·반민주적 범죄행위다. 박 대통령은 남 원장을 해임하고, 국정원의 수사권을 폐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정보만 수집하는 세계 선진 정보기관들의 국제기준을 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정권에 부담되는 부메랑으로 날아올 것” </font></font>청와대 근무 경험이 있는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의원은 ‘높은 지지율의 함정’을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지금의 대통령 지지율이 계속 갈 것처럼 생각하지만 민심은 무서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탈법을 저지른 국정원의 수장을 지금은 보호할 수 있지만, 국민이 이를 다 지켜보고 있다. 언젠가는 정권에 부담이 되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은, 군 장성 시절 후배 장교들에게 ‘장교의 도(道)’를 강조한 남 원장의 요즘 생각이다. 그는 장교의 덕목 중 하나로 꼽은 솔선수범에 대해 “공은 부하에게, 나쁜 것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지금 그는 증거 조작에 관여한 국정원 3~4급 직원 구속(2명)·불구속(2명) 기소, 2차장 사퇴 등 부하들에게 책임을 안기고 국정원장직을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font color="#991900"><font size="3"> 1008호 주요 기사</font><font color="#FFA600">•</font> [표지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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