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주연, 검찰 조연의 ‘조작간첩’ 드라마가 그 암막을 걷어냈다. 배신과 모략, 협잡이 지배하는 서사 구조는 일국의 정보기관을 중심으로 한 첩보물보단 흥신소를 배경으로 한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그나마 암막을 들춰보니 거물급 주연배우와 연출자는 일찌감치 자리를 뜨고 존재감 희미한 단역배우들만 남은 채다. 지난 4월14일 ‘국정원 간첩 증거 조작 사건’ 수사를 맡은 검찰 수사팀(팀장 윤갑근)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관련자들을 기소했지만 사정기관에 대한 국민들의 평점은 바닥일 수밖에 없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억지 ‘속편’ 첫 과제, 출입경기록</font></font>원래 이 드라마엔 ‘원작’이 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다 2013년 2월 ‘간첩’ 혐의로 구속 기소된 탈북화교 유우성(34)씨가 주인공이다. 검찰은 “원래 북한 보위부 공작원인 유씨가 서울시 공무원으로 위장 침투한 뒤 탈북자 신원 정보를 수집해 북쪽에 넘겼다”며 징역 7년을 구형했다. 핵심 증거는 유씨 여동생 유가려(27)씨의 진술이었다. 밀폐된 중앙합동신문센터에서 “오빠는 간첩”이라고 고백했던 여동생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인모임’(민변) 변호인단을 만난 뒤 증언을 뒤집었다. 지난해 8월, “유가려의 수사기관 및 증거보전 절차에서 진술을 그대로 신빙하기는 어렵다”는 1심 재판부의 판단 덕분에 드라마는 ‘사필귀정’으로 끝나는 듯 보였다.
사필귀정이 곧 ‘권선징악’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기어이 검찰과 국정원은 억지 ‘속편’ 제작에 착수한다. 그리하여 국경을 넘나들며 3개의 문서가 조작되고, 수사 과정에서 관련자 2명이 자살을 기도하는 초유의 막장드라마가 펼쳐지게 된다. 수사 실무를 맡았던 국정원 대공수사국의 김보현(48·4급) 기획과장과 권세영(51·4급) 과장이 중심에 있다.
항소심에서 국정원의 첫 과제는 유씨의 ‘북-중 출입경기록’을 제시하는 일이었다. 2004년 8월 한국에 온 유씨는 2006년 5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사흘여 입북했을 뿐 그 밖에 북한에 간 일이 없다고 주장해온 터였다. 속편의 흥망은 유씨가 밀입북했다는 물적 증거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 김 과장의 전임자인 권 과장이 2012년 11월 ‘출처 불명’의 출입경기록을 확보했지만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했다.
지난해 10월 김 과장은 다시 한번 ‘출처 불명’의 출입경기록(문서1)을 확보한다. 지금은 잠적한 중국 내 협조자 김아무개씨로부터 입수했다. 문서에는 유씨가 2006년 5월27일 북한으로 ‘출경’했다가 6월10일 중국으로 ‘입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허룽시 공안국에서 발급받은 이 문서는 공식 문서가 아니다. 유씨의 출입경기록은 중국 내 주소지인 옌볜 조선족자치주 공안국을 통해서만 공식 발급받을 수 있다. 더구나 변호인단이 조선족자치주 공안국을 통해 공식 발급받은 출입경기록은 연이어 ‘입경-입경’으로 기록돼 있어 검찰 증거자료와 배치됐다. 정황상 검찰 쪽 자료가 ‘위조 문서’로 추정되지만 증거 조작 수사팀은 이 문서의 위조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다. 이 문서의 진위를 가리는 과정에서 국정원이 둘러댄 것을 보면 문서가 거짓임은 쉽게 판단할 수 있는데도 말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곡동에서 제작한 중국 허룽시 확인서</font></font>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더 큰 거짓말이 이어졌다. 검찰이 주선양총영사관에 허룽시의 출입경기록 발급 사실을 확인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출처가 명확했다면 쉽게 확인이 가능했을 일이지만 그렇지 못했다. 김 과장 등은 ‘내부 회의’ 끝에, 국정원에서 파견해 선양에 주재 중인 이인철(48) 영사를 끌어들인다. 그 대책이 첨단 첩보시대답지 않은 ‘재래식’이다. “허룽시 공안국에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팩스를 보내되 그 팩스를 공안국 책임자가 받아보지 못하도록 제3자를 통해 가로채라”는 주문이었다.
대신 중국 허룽시가 보내줘야 할 발급 사실 확인서(문서2)는 서울 내곡동의 국정원 사무실에서 제작됐다. 그렇게 지난해 11월27일 오전 9시20분 김 과장의 아내 명의로 가입된 인터넷 팩스업체를 통해 내곡동 사무실에서 주선양총영사관으로 허룽시 공안국 명의의 공문이 발송됐다. 얼마나 급했는지 국내 번호(9680××××)로 저장돼 있는 ‘발신번호’를 고치는 것마저 잊었을 정도다. 곧이어 10시40분 실수를 깨달은 김 과장 등은 발신번호(0433××××)를 고쳐 재차 이 영사에게 팩스를 보낸다. 지난해 12월5일과 13일, 검찰이 서로 다른 팩스번호가 인쇄된 (허룽시 공안국 명의) 출입경기록 발급 사실 확인서를 법원에 제출한 이유다.
해본 적이 없어 무서운 줄 몰랐을까, 대통령 표현대로 ‘관행’이라 무서운 줄 몰랐을까. 국정원의 증거 조작엔 두려움이 없었다. 김 과장은 2000년부터 중국에서 알고 지낸 협조자 김원하(61)씨를 지난해 12월7~9일 경기도 성남 등지로 불러내 만났다. 속내가 있었다. 그보다 앞서 변호인단이 ‘삼합변방검사참(세관)’ 명의로 작성된 ‘정황설명’ 증거를 제출하며 “(유우성의 출입경기록은) 컴퓨터 프로그램 오류로 인한 기록이고 중화인민공화국출입국통행증(을종)은 30일에 한해 1회 출입국이 유효한 증서다. 검사가 제출한 출입경기록은 위조된 것”이라고 주장한 데 따른 것이었다.
김 과장은 김씨에게 부탁했다. “변호인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삼합변방검사참 명의의 확인서를 마련해달라.” 김씨는 답했다. “그런 확인서를 받을 수 없으니 가짜로 만들어오는 방법밖에는 없다.” 합의가 이뤄졌다. 김씨는 곧바로 중국으로 가서 위조업자를 물색했다. “(변호인단의) 정황설명은 결재 없이 발급된 것”이라는 내용의 답변서(문서3)와, “위법하게 발급된 정황설명을 취소해주길 청원한다”는 취지의 범죄신고서를 위조해 한국에 가져왔다.
파국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지난 2월14일 ‘국정원이 검찰을 통해 법원에 낸 중국 공문서 3건이 모두 위조됐다’는 중국 정부의 회신이 도착했다. 이어 2월28일 대검찰청 과학수사센터도 ‘변호인이 제출한 삼합변방검사참의 정황설명서와 검찰이 제출한 정황설명에 대한 답변서의 도장(관인)이 다르다’고 밝혔다. 천주교 인권위원회의 검찰 고발을 비롯해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가 이어지자 진상조사팀이 꾸려졌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배신과 폭로… 서면조사도 안 한 국정원장 </font></font>대단원에 이르자 막장드라마에 빠질 수 없는 ‘배신’과 ‘폭로’가 이어졌다. 수사가 시작되자 국정원은 스스로 피해자인 양 협조자 김씨에게 위조의 책임을 전가했다. 3월5일 검찰 조사 직후 김씨는 “국정원이 아니라 국조원(국가조작원)”이라는 유서와 피로 쓴 메모를 남기고 자살을 기도했다. 뒤이어 3월22일 권 과장까지 검찰 조사 뒤 자살을 기도했다.
‘꼬리칸’의 낭자한 아우성 속에서 ‘머리칸’의 위상은 건재했다. 검찰 수사는 이재윤(54·3급) 국정원 대공수사처장을 불구속 기소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결재라인인 이아무개(1급) 대공수사국장과 최아무개(2급) 대공수사부국장에 대해선 “클릭 결재를 했을 뿐, 혐의를 인정할 부분이 없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서면조사도 하지 않았다. 헌정 사상 초유의 조작극은 서천호(53) 2차장의 사퇴로 맥 빠지는 ‘엔딩’을 맞았다.
민변은 지난 4월15일 수사팀 소속 검사들과 남 원장 등 국정원 관계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서울 서초경찰서에 고발했다. 다시 한번, 블랙코미디나 막장드라마 대신 감동의 법정드라마를 볼 수 있을까.
엄지원 기자 umkija@hani.co.kr<font color="#991900"><font size="3"> 1008호 주요 기사</font><font color="#FFA600">•</font> [표지이야기]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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