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네가 연애하는 게 여자야, 남자야?”
갑작스러운 형의 물음과 함께 툭, 셔틀콕은 내 앞에 떨어졌다. 나는 말없이 셔틀콕을 주워 반대편에 있는 형에게로 넘겼다.
그렇다. 나는 동성애자다. 그리고 동성애자 이전에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동생이다. 가족된 도리로 커밍아웃은 피할 수 없는 순간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거짓말은 완벽할 수 없고 평생을 속일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하겠지만, 할 거지만, 지금은 못하겠는 것.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준비가 되었을 때 하고 싶은 것. 어렵고 겁나고 아프고 슬프고 힘들 거 같지만 사실 잘 모르겠는 것. 많은 이유들로 먼 미래의 일로 치부해버렸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가족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선언하듯 비장하게 말하고 싶었다.
이게 나야, 라고. 하지만 “아, 알고 있었구나? 남자 맞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날, 추리닝 바람에, 고작 배드민턴을 치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토로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생각해왔던 커밍아웃은 이게 아닌데, 아니었지만, 싫진 않았다. 실은 고마웠다.
우리는 셔틀콕을 주고받으며 그동안은 나누지 못했던 말들 또한 주고받았다. 남자에 눈뜬 나의 사춘기 시절, 10년 전인 그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는 형의 직감적인 얘기, 형의 직감에 신뢰를 북돋아주는 나의 부주의함, 방황을 마치고 게이임을 받아들이게 된 나의 터닝포인트, 당시 오스트레일리아로 워킹홀리데이를 가서 목격했던 형의 게이담들.
지난 10년간 금기시됐던 말을 두서없이 쏟아붓고 나니 시간은 1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몸은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렇게 그날의 배드민턴은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났고, 그것은 눈물 대신 땀을 흘렸던 커밍아웃이었다.
사실 커밍아웃은 나에게, 또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굉장히 크고 무거운 일이다. 그래서 나를 설명하는 데 침묵하고 나를 보호하는 데 거짓말을 일삼기도 한다. 나를 위한 일이지만 사실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하지만 배드민턴 경기와 같은 커밍아웃을 하고 나니, 내가 게이임을 말하는 것이 셔틀콕을 반대편으로 넘기는 것만큼이나 쉬울 수 있고, 내 가족 내 친구 내 이웃 또한 누군가가 게이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셔틀콕을 받아치는 것만큼 쉬운 일일 수도 있겠다는 믿음이, 기대가, 또 바람이 생겼다. 그리고 그 이전에 우리 사회의 성소수자를 가로막는 네트의 벽이 낮아지기를 소원해본다.
길경득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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