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3일 대통령의 긴급 담화를 택시 안에서 휴대전화로 봤다. 처음에는 ‘에이아이(AI) 윤석열’ 유의 딥페이크 아닐까 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나?’ 하는 생각도 했다. 현실임을 새삼 깨닫고 한숨을 크게 내쉬자 택시 기사가 물었다. “왜 그래요?”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는 “윤석열이가요!?”라며 놀라움을 표하고는 몇 마디 욕지기를 내뱉었다. 그러더니 다시 한번 묻는 것이었다. “아니 그런데 계엄 선포를 할 거라는 거예요, 아니면 이미 했다는 거예요?” 역시 그로서도 단번에 믿을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러한 대통령의 초현실적 담화는 비상계엄 선포가 최소한의 요건도 갖추지 못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었다. 헌법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한해 계엄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우리 사회가 지금 그 정도의 비상사태에 처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통령이 근거로 든 야당의 정부 예산안 처리 거부, 국무위원과 검사들에 대한 탄핵 추진 등은 집권 세력과 야당이 서로 정치력을 발휘해 풀 문제에 불과하다.
요건도 안 되는 비상계엄을 굳이 선포하니 그 의도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명태균씨 관련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 김건희 특검, 한동훈 대표와의 갈등 상황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야당은 2024년 8월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용현 당시 대통령실 경호처장이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될 때부터 정권이 계엄 선포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의심해왔다. 그때도 채 해병 사건, 김건희 여사에 대한 검찰 조사 후폭풍 등의 논란이 있었다. 김용현 장관은 이번에 실제 계엄 선포를 건의했다. 의심은 이제 사실로 확인됐다. 대통령이 배우자를 지키기 위해 계엄을 선포한 거라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의혹이 제기됐을 당시 가장 그럴듯하게 제기된 반론은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이 국회에서 계엄을 해제해버리면 그만인데, 대통령이 아무 이득이 없는 계엄 선포를 굳이 왜 하겠느냐는 거였다. 그러나 이는 순진한 주장에 불과했다는 게 이번 일을 통해 드러났다.
대통령에 의해 계엄이 선포된 이후 계엄사령부 명의로 공고된 포고령을 보면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내용의 항이 첫머리에 있다. 국회의 계엄 해제를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실제 국회는 봉쇄됐고 군인들은 무장한 채 국회 경내에 진입했다. 이 중 일부는 ‘체포조’로서 국회의장과 여야 대표, 일부 야당 의원들에 대한 체포를 계획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다. 여기까지만 봐도 입법부에 대한 무력화 시도인 게 너무나 명백하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모든 행정·사법 사무를 관장한다. 계엄을 해제할 권한을 가진 입법부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은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한도를 넘는다. 전문가들은 특히 이 대목이 형법상 내란죄에 해당한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내란과 외환의 죄는 대통령 불소추 특권의 예외 사항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위헌적이고 위법한 계엄”이라고 반복해서 평가한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한동훈 대표의 이러한 입장 표명은 추경호 원내지도부의 ‘당사 집결’ 방침에도 자당 의원 18명이 국회 본회의장 표결에 참여하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 의결에 따라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겠다며 큰소리치던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삼일천하’도 아닌 ‘150분 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제 남은 건 후폭풍을 감당하고 수습하면서 벌여놓은 일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다.
이번 사태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은 민주공화국의 국정을 감당할 자격과 능력이 없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났다. 전세계 언론도 유사한 평가다. 각국 정상들은 ‘거리두기’에 들어갔다. 대통령 주변은 ‘엑소더스’ 분위기다. 대통령실의 실장 및 수석비서관, 국무위원들은 전원 사의를 밝혔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국무위원들과 중지를 모아 국민을 섬길 것”이라고 했는데, ‘마지막 순간’이라는 단어 선택이 예사롭지 않다. 대통령이 임기를 이제 막 절반 넘긴 시점에, 정권 핵심이 이미 ‘마지막 순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한동훈 대표는 세 가지 요구안을 내밀었다. 첫째 김용현 국방부 장관 해임, 둘째 내각 총사퇴, 셋째 대통령의 탈당이다. 여의도 문법으로 해석해보면, 한 대표의 제안은 의미심장한 데가 있다. 대통령의 탈당 요구는 여당이 정치적 뒷받침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이를 내각 총사퇴와 합치면, 새롭게 구성되는 내각을 어느 세력으로 채우느냐 하는 의문이 남는다. 결국 대통령이 국정에서 일정 부분 손을 떼고 거국내각을 구성하는 해법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겠다는 느낌이다. 논의가 이런 쪽으로 흘러간다면 이전부터 여의도 주변에 유령처럼 떠돌던 ‘임기 단축 개헌’ 같은 아이디어를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출구전략으로서는 가장 ‘순한 맛’의 해법이다.
당내 친윤계는 국방부 장관 해임이나 내각 총사퇴 등의 필요성에 대해선 공감했으나 대통령 탈당을 요구하자는 주장에는 극렬히 저항했다. 친윤계 핵심 인사들이 별도 모임을 갖고 하야나 임기 단축 개헌은 절대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건의를 대통령에게 하기로 했다는 보도도 나왔다(채널A).
이런 가운데 진행된 의원총회에서 탈당 요구 등에 앞서 현 상황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을 확인해보는 게 먼저라는 지적이 나오자, 한동훈 대표는 12월4일 오후 의원총회에서 논의된 안을 들고 정진석 대통령실 비서실장, 한덕수 국무총리 등과 만났다. 이후 한동훈 대표와 한덕수 국무총리는 추경호 원내대표, 주호영·나경원·김기현 의원 등과 함께 윤석열 대통령과 다시 회동했다. 여기서 대통령은 계엄 선포의 정당성을 설파하면서 법적 문제는 없고 탈당도 고려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고 한다. ‘순한 맛’은 일단 거부됐다.
‘순한 맛’을 빼면 ‘매운맛’이 남는다. 야 6당(더불어민주당·조국혁신당·개혁신당·진보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은 발 빠르게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헌법과 법률을 모두 위반했다는 취지다.
이러면 의석 분포상 국민의힘의 이탈표, ‘매직넘버 8’이 달성되느냐가 쟁점이 된다. 계엄 선포를 ‘위법, 위헌’으로 규정한 게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려면 한동훈 대표는 여당 대표로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해야 한다. 계엄 해제에 동의한 18명의 여당 의원도 마찬가지다. 앞서 만남의 자리에서 대통령은 ‘체포조’에 대해 항의하는 한동훈 대표에게 “군이 그랬다면 포고령 위반이니 체포하려 한 것 아니었겠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앞서 짚었듯 포고령의 ‘정치활동 금지’ 조항이 내란죄 논란의 핵심 대목 중 하나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통령의 이 발언은 헌법과 법률의 반복적 위반 상태를 스스로 바로잡을 의지가 없다는 걸 보여준다. 한동훈 대표는 탄핵 사유를 뒷받침할 만한 발언을 면전에서 직접 들은 당사자인 거다.
그러나 12월4일 심야에 열린 의원총회에서 여당은 탄핵안 반대 표결을 당론으로 확정했다. 이른바 친한계도 탄핵에 찬성하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판단했다는 얘기다. 탄핵 찬성 입장을 밝힌 이들이 보수 진영 내에서 ‘배신자’로 찍힐 수 있고, 탄핵은 사실상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에게 정권을 헌납하는 결과를 낳게 되며, 결국 보수 진영 전체가 궤멸하는 상황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등의 이유다. 다음날인 12월5일 한동훈 대표는 탄핵소추안이 통과되지 않도록 노력하겠지만, 계엄 선포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과는 큰 차이가 있고, 여전히 탈당을 요구한다는 메시지를 내놨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자는 것일까? 친한계 현역 의원 중 하나로 꼽히는 박정훈 국민의힘 의원이 에스엔에스(SNS)에 남긴 글을 보면 다른 계산법이 있다는 느낌이다. 박정훈 의원은 “이재명 대표가 법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현 정부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야당이 발의했던 특검은 받더라도 대통령 탄핵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수사가 진행되면 시간도 벌 수 있고 국면을 바꿀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고 썼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돼 대통령이 직무 정지 상태에 빠지면,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는 방안은 원천 봉쇄된다. 반면 탄핵소추안 가결을 일단 막고, 이후에라도 어떻게든 ‘순한 맛’ 해법을 받아들이도록 대통령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범여권은 대통령직의 궐위로 인한 조기 대선의 시점을 어느 정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 가장 유력한 경쟁자인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재판 일정 등을 고려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두말할 것 없이, 이런 계산은 범여권 대권주자에게 유리한 판을 만들기 위한 ‘정치공학’의 차원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결정적 시기에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아야 할 한덕수 국무총리가 계엄선포안 심의 과정에서 이를 끝까지 반대했고, 이후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를 수용하도록 대통령을 설득했다는 보도가 나오는 것에도 뭔가 의미가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앞서 ‘마지막 순간’이란 표현도 새로워 보인다.
이 모든 정황이 가리키는 것은 무엇일까? 대통령은 마치 건재한 듯 행동하고 집권 세력의 ‘선수’들도 겉으론 장단을 맞추는 듯하지만, 내심으로는 다들 ‘차기’를 겨냥한 주판알 튕기기에 들어간 상황이라는 것 아닐까? 사자는 만용을 부리며 날뛰다 제풀에 지쳐 누워버리고, 땅에는 어스름이 짙게 깔리며, 권력의 심장부는 바야흐로 ‘개와 늑대의 시간’에 들어섰다. 이 시점에 드는 예감은, 나타나는 게 뭐든 원하는 건 오직 자기 살 찌우기지 민주공화정이 일순간 무너진 것에 책임지는 건 아니리라는 거다. 부디 틀렸으면 하는 생각이다.
김민하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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