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기에 5천원을 넣는다. 로맨스소설, 추리소설, 여행, 힐링, 아동, 자기계발, 지식교양 등 8가지 장르 중 하나를 고른다. 또르륵, 포장된 책 한 권이 나온다. 경기도 고양의 복합쇼핑몰에 있는 책 자판기 ‘설렘자판기’다. 설렘자판기의 원리는 이렇다. 서울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정성 들여 고른 책을 자판기에 넣는다. 이후 소비자가 특정 장르를 고르면 그에 따라 랜덤(무작위)으로 책을 제공한다. 헌책방에 가지 않아도 장르만 선택하면 책방 주인이 고심해 선별한 책 한 권을 싼값에 받아볼 수 있다.
이 자판기를 만든 이들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국제 비영리단체 ‘인액터스’(Enactus) 연세대지부 산하의 ‘책 it out(잇 아웃)’팀이다. 11월1일 서울 신촌에서 ‘책 잇 아웃’ 팀원 이나영(23·교육학), 최용우(25·정보산업공학), 방찬호(23·경영학)씨를 만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청계천 헌책방을 살리기 위해</font></font>8명으로 구성된 ‘책 잇 아웃’ 팀은 온라인 중고서점에 밀려 설 자리를 잃어가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살리기 위해 2014년 8월 처음 꾸려졌다. 1960~70년대 200여 곳에 이르던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지금은 20여 개 책방이 남아 화려했던 옛 시절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이 죽어가는 청계천 헌책방을 살리기 위해 가장 먼저 시작한 프로젝트는 중고책 큐레이션 서비스 ‘설레어함’이었다. 청계천 헌책방 주인들이 추천해준 책 세 권으로 구성된 랜덤 책 상자를 배송하는 서비스였다. 헌책을 구하려는 이들과 헌책방을 연결하는 젊은이들의 새로운 시도에 온라인에선 긍정적 반응이 이어졌다. ‘책 잇 아웃’ 자체 사이트에서 서비스를 시작한 뒤 반응이 좋아 온라인 쇼핑몰에 입점해 8천만원 넘는 매출을 올렸다.
그 뒤 이들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설레어함과 비슷한 서비스를 궁리하다 설렘자판기를 만들게 됐다. 자판기는 일반 자판기를 책 판매용으로 개조해 만들었다. 설레어함에 이어 자판기 역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지난 넉 달 동안 단 한 대의 설렘자판기로 벌어들인 매출액이 약 1250만원에 이른다. 수익은 청계천 헌책방을 위해 쓰인다.
‘책 잇 아웃’ 팀의 방찬호씨는 “설렘자판기 이용자 설문조사에서 많은 분이 자판기의 무작위성과 오락성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답했다”고 말했다. 상자에 든 책을 받아 개봉할 때까지 어떤 책인지 궁금해하며 마음이 설렌다는 것이다. 낡고 오래된 이미지로만 알던 헌책을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되었다는 반응도 많았다. ‘책 잇 아웃’이 전면에 내세운 설렘 전략이 통한 것이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헌책방 사장님이 안 골라줬다면 </font></font>지금은 청계천 헌책방과 손잡고 다양한 책 판매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지만 젊은 대학생들이 헌책방 주인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신뢰였다. “처음엔 헌책방 사장님들이 대학생들이 이런 일을 한다는 걸 믿지 못했던 것 같아요. 헌책방을 자주 찾아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친해졌어요. 설레어함의 주문이 많아지면서 동참하는 서점도 하나둘 늘어났죠. 지금은 저희가 오기를 기다리신대요.”(최용우씨)
이들은 바쁜 학기 중에도 매주 두 번씩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찾는다. 책방을 찾을 때마다 설렘자판기에 들어갈 책 포장을 돕고 헌책방 주인과 책 이야기를 나눈다. 방씨는 “책방 사장님이 ‘이 책 좋은데 한번 읽어보라’고 주신다. 그때마다 모르던 책을 아는 것도 재미있고, 점점 책 읽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고 말했다.
최씨 역시 지난 3월 처음 만난 헌책방 사장님에게 추천받은 책을 읽었다. 30∼40년간 책과 함께해온 ‘책 장인’이 골라준 책에 그가 원하던 내용이 담겨 있었다. “올해 전공서적 빼고 책 4권을 읽었어요. 그중 2권이 헌책방에서 산 책이에요. 헌책방 사장님이 안 골라줬다면 이 책마저 못 읽었을 거예요.” (웃음)
최씨 말대로 ‘책 잇 아웃’ 팀원들 역시 책 읽을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다. 다들 취업을 고민해야 하는 고학년이기 때문이다. 이나영씨는 “주변 친구들만 봐도 독서에 대한 관심은 물론 책 읽을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 “당장 취업 문제가 있으니 시간이 남는다 해도 전공서적을 더 보거나 자격증이나 영어 공부를 하게 되거든요. 막상 책을 읽으려 해도 무엇을 읽어야 할지 막막해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래서 좋은 책을 골라주는 설렘자판기가 인기 있나봐요.”
‘책 잇 아웃’ 팀원들은 설렘자판기를 만든 뒤 헌책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있다. 최씨는 “중고품은 사람 손을 거칠수록 가치가 떨어지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시간이 지나도 언제나 같은 말을 하는 선생님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돈 빼고 중고 가운데 유일하게 세월에 구애되지 않는 가치를 담는 존재가 책”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방씨 역시 ‘책 잇 아웃’ 활동으로 “책이 전하는 아날로그 감성”에 빠지게 됐다. 그는 자신이 느낀 감성을 더 많은 이와 나누려 한다.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던 이씨도 “새책만 소비하지 말고 헌책에도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자신에게 필요 없는 책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도 좋고요. 책 기부 형식으로 오래된 책을 다시 살리는 길을 찾을 수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또 다른 설렘을 찾아서 </font></font>‘책 잇 아웃’팀은 또 다른 설렘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이들은 지난 10월 서울 신촌의 한 백화점에 무인 책판매소인 ‘설렘서재’도 열었다. 설렘서재 한켠에 책을 읽고 책갈피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이들의 바람은 청계천 헌책방 거리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 것이다. 최씨는 “설렘자판기나 설렘서재를 통해 청계천 헌책방 거리가 알려지고 많은 분이 그곳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그게 ‘책 잇 아웃’의 존재 이유다”라고 말했다.
<font color="#008ABD">글 </font>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font color="#008ABD">사진</font>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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