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잠재적 방관자’입니다.”
김현(38) 시인은 2016년 9월 계간지 에 산문 ‘질문 있습니다’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문단 내 여성혐오와 남성 문인들의 성추행·폭언 사례를 폭로했다. 이런 문인들의 행동을 눈감아온 지난날 문단 관행에 반성을 촉구했다. 침묵을 깬 그의 글은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다.
문단 내 성폭력 문제를 처음 공개적으로 제기한 김 시인이 미투 운동이 활발해진 2018년 봄 ‘질문 있습니다’ 등 34편의 글을 모은 산문집 를 출간했다. 그와 함께 시집 도 펴냈다. 산문집에서는 문단 내 성폭력, 세월호, 성소수자 등 여러 사회문제를 이야기하고 시집에서는 같이 목소리를 내는 이들과 연대의 메시지를 담았다. 여전히 ‘지금, 이곳’에 질문을 던지고 연대의 손짓을 보내는 그를 3월13일 서울 서교동 카페 창비에서 만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방관을 반성하며 써내려간 글 </font></font>2018년 1월 말 서지현 검사의 폭로로 시작된 국내 미투 운동은 예술계, 교육계, 종교계, 정치계 등으로 끊임없이 확산되고 있다.오랫동안 이어진 여성운동의 한 흐름이라 생각한다. 서지현 검사의 고발 이전에 2016년 ‘#문화예술계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고, 2015년에는 ‘#나는 페미니스트다’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다. 지금의 미투 운동도 미래의 어떤 전례가 될 것이다. ‘우리는 연결될수록 강하다’라는 말처럼 현재의 연대고 그다음을 위한 연대다.
2016년 문화예술계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과 지금의 미투 운동은 다른가.고발과 증언을 들어보면 피해 양상이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사회에 여자를 술자리 도우미로 생각하는 ‘도우미 문화’와 ‘강간 문화’가 있다. 그게 남성중심주의 문화와 가부장제로 인해 오랫동안 유지돼왔다. 이런 구조적 문제를 들여다보고 바꿔야 한다. 그리고 방송·연극 등 분야별 특수한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찾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문학계에서 습작생들이 위계에 의한 폭력을 당하는데, 이때 문인과 습작생 사이에 왜 위계 구조가 생기는지 등 구조를 점검하는 것이 필요하다.
에서 여성 시인을 ‘따먹고 싶은 순’으로 점수를 매기는 여성 비하적인 문단 내 술자리 문화 등을 고발했다.몇 년 전 한 작가의 시집 출간 모임에서 벌어진 일이다. 중견작가들이 나에게 ‘저기 여성 4명을 꼬셔 우리 자리에 앉히라’고 했다. 처음 보는 나에게 너무 쉽게, 뻔뻔하게 그걸 시켰다. 으레 젊은 남자가 오면 선배 문인들은 그를 부하처럼 부린다. 그들은 ‘너도 남자니까 당연히 도우미 문화에 익숙하잖아, 너도 좋잖아’라고 생각했나보다. 이후에도 술자리에서 성희롱 발언을 하는 이들을 자주 봤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성폭력 고발 이후 무엇이 변했나 </font></font>2009∼2011년 당시 누가 술자리에 있으면 거기 가면 안 된다는 ‘술자리 명단’이 돌았다. 그들을 피하고 앞에서 쏴붙이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겁먹고 방관하고 있었다는 걸 반성해야겠다는 마음에서 ‘질문 있습니다’ 글을 쓴 거다. 이제 우리는 ‘나도 그런 문화에 연루된 건 아닐까’라는 자기 점검이 필요하다.
성폭력 고발 이후 문단 내 변화가 있었나.변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젠더 감수성이 하나도 없던 원로작가나 중견작가들이 “이제는 조심해야 해” “함부로 말하면 안 돼”라고 말한다. 그런 걸 보면 ‘변화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문단 내 성폭력 증언 이후 많은 고발과 증언이 나오고 그걸 토대 삼아 자기 목소리를 적극 발현하는 작업도 이루어졌다. 습작생, 대학 문창과 학생들이 문단 권력, 반인권 감수성, 반젠더 감수성에 문제의식을 느껴 독립잡지를 만들고 소모임 등을 꾸렸다. 비평의 장에서는 우리가 고전으로 일컫는 작품을 오늘날 젠더 시각에서 재조명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다. 젠더 감수성을 작품에 반영하는 작가들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증언한 이들이 일정 시간이 지난 뒤 고립된다는 것이다. 무고나 명예훼손 소송 등 ‘백래시’(반발)를 받고 있다. 이런 변하지 않는 흐름이 계속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김현 시인은 리얼리스트 또는 참여시인이라고 한다. 사회비판과 저항정신이 담긴 시를 써왔다. 그동안 한국여성의전화 자원봉사, 여성인권영화제 프로그래머, 청소년성소수자위기지원센터 자원봉사, 세월호 낭독회 참여 등의 활동을 해왔다. 그것을 바탕으로 “가부장제와 군사주의의 산물인 제 삶을 얼마나 근사하게, 천천히, 무한히, 변화시켰다”고 한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연대의 용기에 대한 시 </font></font>미투 운동이 문학 창작에도 영향을 끼치나.한쪽에서는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그렇지 않다. 그동안 ‘강간 판타지’를 갖고 글을 써온 이들이 그걸 벗어던졌을 때 새로운 예술이 나오지 않겠는가. 실제 문화예술계에선 미투 운동 전후로 기존에 보지 못했던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나오고 성소수자·장애인 문제를 적극 발화하는 작품이 많이 나오고 있다.
첫 시집 이후 4년 만에 시집 을 펴냈다. 이번 시집에는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사회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겼다.박근혜 집권기인 2013∼2015년에 쓴 시다. 여성주의, 성소수자 인권 활동 등을 한 경험이 작품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입술을 열고 말하는 것, 그것을 이어가는 일의 소중함을 이야기했다. 지금 이곳 사회에 대한 손잡음, 연대의 마음을 담았다.
이 시대 문학이 해야 할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나.2016년 ‘질문 있습니다’를 썼을 때 큰 반향을 일으킬 줄 몰랐다. 문학 계간지에 기고한 글이라 문학장 안에 있는 분들만 볼 줄 알았다. 한 편의 글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사회문제에 직접 발언한 것을 문학으로 승화시켰을 때 그건 100년, 200년 지나 작가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다. 고전이 여기 지금의 이야기로 오랜 시간 읽히는 것처럼. 시집 도 그랬으면 좋겠다. 수년이 지나고 내가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살아남아서 이건 연대의 용기에 대한 시고,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한 시라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전화신청▶ 02-2013-1300 (월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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