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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의심의 편에 서는 사람이다”

<동사의 맛> <내 문장이…> <소설의 첫 문장>을 펴낸 교정전문가 김정선씨
등록 2017-06-29 14:24 수정 2020-05-03 04:28

“글쓴이가 확신의 편에 서는 사람이라면, 교정가는 의심의 편에 서는 사람이다.”( 중에서)
김정선(52)씨는 20년 넘게 잡지와 단행본 문장을 다듬어온 교정전문가다. ‘의심의 눈’으로 누군가의 문장을 읽고 왜 이렇게 썼을까 생각하고 다시 써본다. 매 순간 피 말리는 듯한 긴장과 집중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지난하고 힘겨운 문장과의 분투는 “글쓴이의 확신을 독자들도 그대로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가 책 에 이어 올해 초 (유유 펴냄)을 펴냈다. 그동안 그가 만난 문장과 문장의 숲에 머문 느낌을 담았다. “서점에 진열된 책들이 저마다의 표현법과 문장 규칙에 따라 쓰인 걸 구경하는 꿈”을 꾼다는 그를 6월20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드러나지 않아야 더욱 빛이 나는 일 </font></font>

교정·교열을 언제부터 했는지.

1993년 잡지사 편집부에서 일하며 교정·교열을 했다. 본격적으로 외주 교정자로 일한 건 2000년부터다.

책에서 교정전문가 이름을 찾기 힘들다.

대부분 책에 외주 교정·교열가 이름을 적지 않는다. 우리 이름이 들어가면 독자가 필자 본인이 쓴 게 아니라 ‘대필한 게 아닌가’ 오해하기도 한다. 출간된 책의 표지를 보면 디자이너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있고, 제목이나 차례를 보면 편집자의 의도가 드러난다. 그런데 교정·교열가는 흔적을 남기지 말고 드러나면 안 된다. 우리는 일을 열심히 하고 흔적 없이 싹 빠져줘야 한다.

2015년 첫 책 을 낸 계기는.

어느 날 눈이 너무 아파 교정지를 볼 수 없었다. 병원에 갔더니 안구건조증이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교정 일을 쉬었는데 그때 마침 예전에 같이 일한 편집자를 만나 책 제안을 받았다. ‘동사’ 이야기를 써보면 어떠겠냐는 거였다.

여러 품사 중 동사를 선택한 이유는.

교정을 보면서 ‘누군가 동사 활용형을 정리해줬으면…’ 생각했다. 국어사전에도 동사 활용형은 다양하게 나오지 않는다. 다양한 동사를 소개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책을 썼다. 다행히 반응이 좋아 7쇄까지 찍었다. 7월에는 김영화씨가 그린 만화책 이 나온다.

자신의 책 교정·교열도 봤나.

주위에서 책 만들 때 ‘교정 비용 안 들었겠어요’ 하던데 그렇지 않다. (웃음) 다른 교정·교열가가 내 원고를 봤다. 수정된 대장을 받아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교열가가 지적한 원고를 보니 여러 문장에 ‘너무’라는 단어가 많았다. 문장 다듬는 일을 하는 나 역시 자기 문장이 눈에 잘 안 들어온다. 세 번째 교정을 볼 때까지 수정 사항이 나왔다. 수정해준 대장을 보면 고맙다. 한편으론 ‘같은 업종인데 살살 좀 하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번 교정·교열이 왜 필요한지 깨닫는 계기가 됐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내 문장이 이상하냐’고 묻는 사람들 </font></font> 책 제목처럼 ‘내 문장이 이상하냐’고 묻는 저자도 있나.

책 나온 뒤 저자와의 식사 자리에서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했어요’ 물어보는 이가 있긴 했다. 20년 넘게 교정·교열을 보며 이상하지 않은 문장을 못 봤다. 다 이상했다. 모든 사람이 정상적 삶을 살고 정상적인 문장을 쓸 수 없다. 내가 하는 일은 그런 글을 규칙적이고 일관되게 다음으로 이어지도록 할 뿐이다. 글쓰기의 답이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답을 알려달라고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외우는 문장을 보면 규칙에 맞는 바른 문장을 못 봤다. 대개 기존 틀을 벗어났다. 규칙을 잘 지키는 문장을 보면 진부하고 틀에 박힌 느낌도 든다. 규칙 안에 글을 가두면 나만의 문장이 안 나온다. 이게 딜레마다.

책 저자를 알고 원고 교정을 보나.

편집자가 원고를 넘길 때 저자가 ‘세게 보시면’(많이 고치면) 안 좋아할 수 있으니 살살 작업해달라거나, 처음 책을 내니 세게 봐달라고 얘기한다. 그런 말은 하지만 처음 넘겨받는 원고에 저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아 저자를 모른 채 그냥 원고를 본다. 책 독자층을 정하고 그 독자의 처지가 돼서 문장을 본다. 교정지에 원고의 의문 사항을 적고 어려운 내용은 각주로 설명해달라고 적는다. 글쓴이는 확신의 편에 선 분들인데 그 확신을 읽는 독자에게 옮겨가려면 그걸 독자에게 설득하는 일이 필요하다. 어떤 필자는 세 번째 교정지에 당구장(※) 표시를 하고 ‘쓸데없는 의심’이라 적었다. 나는 독자를 위해 필요한 거라 적은 건데 말이다.

주로 하는 실수는.

원고를 읽으면서 책 내용에 신경 쓰려 하지 않는다. 문장만 보려고 한다. 책 내용에 빠지다보면 틀린 걸 놓칠 수 있어서다. 그러다보니 책이 나온 뒤 뒤늦게 내용을 아는 일도 있다.

힘든 점은.

가장 혹사당하는 게 눈이다. 일하는 장소마다 조명이 다르니까 눈이 많이 아프다. 소설책 한 장을 읽는 데도 눈이 아파 다 못 읽는다. 그렇게 소설 첫 장만 읽다가 소설 첫 문장만 가지고 쓴 이란 책이 나왔다. 그런데 교정지는 본다. 먹고사는 일이라 (눈이) 봐주나보다. (웃음)

<font size="4"><font color="#008ABD">잊히지 않는 그때 그 낭송</font></font>교정·교열을 하다 생긴 습관이 있다면.

잘못된 부분을 한번 놓치면 앞뒤 문장에 수정 사항이 있는데도 못 본다. 기계가 하는 일이 아니라서 실수를 한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나를 긴장하게 한다. 덤벙대던 성격까지 바뀌었다. 초창기에는 상점 간판을 교정 보고, 그다음 해에는 연애편지를 쓰면서도 교정·교열을 본다. 시간이 좀더 지나면 책을 못 읽고 강박증이 생긴다. 좀더 지나면 아예 활자를 못 보고 멍하게 있는다. 직업병 같다.

기억에 남는 책.

김훈 를 의뢰받아 작업한 일이다. 원고지에 쓴 원고와 그 원고를 옮긴 컴퓨터 파일 내용을 일일이 대조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여학생들이 책 속 문장을 서로 주고받으며 낭송을 했다. 내가 작업한 책을 열심히 읽는 것을 본 첫 경험이었다. 그때 그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보람을 느낄 때.

책을 만드는 건 협업이다. 교정·교열가뿐 아니라 편집자와 역자, 디자이너 각자 고민하고 서로 돕는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합이 잘 맞을 때가 좋다.

<font color="#008ABD">글</font>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font color="#008ABD">사진</font>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font color="#00847C">*‘북터뷰’는 주목받는 책의 저자와 더불어 출판 편집자, 디자이너 등 책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는 인터뷰 코너입니다. 2주에 한 번 실립니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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