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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갯빛 사랑시

첫 책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를 펴낸 퀴어 전문 출판 브랜드

‘큐큐’의 최성경·최성웅·장지은씨
등록 2017-08-09 19:01 수정 2020-05-03 04:28
퀴어 전문 출판 브랜드 ‘큐큐’가 펴낸 시집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의 편집자 장지은씨, 최성경 대표, 번역가 최성웅씨(왼쪽부터).

퀴어 전문 출판 브랜드 ‘큐큐’가 펴낸 시집 <우리가 키스하게 놔둬요>의 편집자 장지은씨, 최성경 대표, 번역가 최성웅씨(왼쪽부터).

“나는 입술에 연지를 바르고,/ 새로 난 자작나무 기둥에 입을 맞췄다,/ 비록 내가 미남자라 할지라도,/ 나의 가슴엔 고무공 같은 유방이 없다,/ 나의 피부에선 희고 결 고운 분 냄새가 나지 않는다,/ 나는 다 시들어버린 박명(薄命)의 남자다,/ 아아, 이렇게 애처로운 남자가 있을까, ”(시집 ,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 중에서)

퀴어 전문 출판 브랜드 ‘큐큐’에서 첫 책을 펴냈다. 퀴어작가들의 시집 . 국내에선 잘 알려지지 않은 거트루드 스타인, 래드클리프 홀, 로베르 드 몽테스키우, 뤼시 드라뤼 마르드뤼스 등 전세계 LGBT(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 시인 39명이 쓴 사랑시 75편을 담았다. 이 ‘무지갯빛 사랑’의 기록을 엮은 큐큐 대표 최성경씨, 번역가 최성웅씨, 편집자 장지은씨를 8월1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서 만났다.

전세계 LGBT 시인 39명의 시 75편

시집 는 성소수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사회에 전하는 절절한 외침이다. 최성경 대표는 “사랑이 이성애 규범 안에서만 작동한다. 그런 사랑이라는 관념을 다시 사유하자는 뜻으로 사랑시를 엮었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시집은 군대 내 동성애를 처벌토록 하는 ‘군형법 제92조의 6’ 등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여전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책이다.

시집엔 세계 최초의 레즈비언 서정시인으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사포, 레즈비언 시인인 중국 우조 등의 작품과 함께 이들 시인의 성정체성에 초점을 맞춘 작가 소개글이 담겼다. 동성애에 엄격하던 19세기 중반 미국 사회의 분위기 때문에 ‘사랑’을 ‘우정’이란 표현으로 바꾸었던 윌트 휘트먼, 동성애 문학을 출판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포르투갈 시인 안토니오 보토, 동성애로 기소된 재판에서 “세상은 (동성애) 이 사랑을 무시하고 종종 웃음거리로 삼는다”고 말한 19세기 유미주의 문학의 대표작가 오스카 와일드 같은 성소수자들의 시와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때나 지금이나 LGBT 정체성을 드러낸 시를 쓴다는 것은 사회적 압박과 검열, 처벌 위험까지 견뎌야 하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절박한 삶에서 피어난 사랑의 단어는 절절하고 아름답다.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시 ‘시인이 사랑하는 이에게 전화를 건다’에서 자신이 사랑한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전화를 걸었던 상황을 떠올린다. 그리고 노래한다. “달콤하고 아득한 목소리/ 내 가슴 모래언덕에 물을 흐르게 하지.” 시인 안토니오 보토는 시 ‘슬픈 사랑의 노래’에서 헤어지는 연인의 “지독한 물음에서 자라난 슬픔에, 터져버린 눈물을” 떨구는 안타까움과 애절함을 그렸다.

60대 게이라고 밝힌 어느 독자의 전화

러시아·일본·프랑스 등 다양한 나라 작가들의 시를 번역하느라 이성옥, 이종현 등 번역가 7명이 참여했다. 프랑스어 번역을 맡은 최성웅씨는 “이번에 번역한 폴 발레리의 시 ‘정다운 숲’은 예전에 번역했던 작품이다. 예전에는 그의 성적 지향을 모르고 번역했다. 이번에 보니 그의 작품에는 동성애 코드가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그 시를 다시 번역하니 (예전엔 무심코 지나갔던 부분이) 새롭게 보였다”고 했다. 이 과정에서 최씨는 묘한 기쁨을 느꼈다. “동성애 작가들이 작품에 넣는 감각의 메타포를 알고 번역하니 남다른 재미가 있더군요.”

시집을 편집한 장지은씨는 생소한 퀴어문학을 다루느라 따로 시간을 내 관련 공부를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그 역시 “ 등 퀴어 관련 인문학 책을 보고 작가들의 이야기가 실린 책이나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느꼈다”고 말했다. “마이클 필드의 ‘두 번째 생각’이라는 시가 있어요. 일이 있지만 연인 곁을 떠나지 못하고 남는 단순한 플롯이지만 그 시와 시어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말았죠.”

책 출간에 필요한 자금은 텀블벅(크라우드펀딩 누리집)을 통해 모았다. 3주 동안 후원자 666명이 1400만원을 기부했다. 목표액 400만원의 세 배가 넘는 돈이다. “예상외로 많은 분이 참여한 걸 보고 ‘우리가 하려는 일에 공감하고 기다린 분이 많구나’ 생각했습니다. 그 덕분에 애초 책을 1천 부만 찍을 계획이었는데 2천 부를 찍었어요.”

지난 7월 시집이 나온 뒤 독자들의 응원이 이어지고 있다. 최성경 대표는 잊을 수 없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한 독자분이 자신은 60대 게이라며 책을 잘 읽었다고 고맙다고 했어요. 본인은 젊은 시절 자신을 감추며 살았다고. 그런데 젊은 분들이 퀴어 시집을 출간한다는 것을 알고 반가웠고 감동적이었다고요.” 전화를 걸어온 이는 시집에 소개된 시인 가운데 하트 크레인의 시가 마음에 들었다며 그의 작품을 묶은 시집 출간 계획이 있는지도 물었다. 최 대표는 이때가 “12년 동안 책을 만들면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국내 퀴어작가들 작품도 출간 예정

영미권에선 퀴어문학이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당연히 이를 둘러싼 문학적 논의도 활발하다. 그러나 국내에선 퀴어문학의 학문적 연구는 물론 책 출간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큐큐는 꾸준히 좋은 퀴어문학 작품을 발굴해 소개할 예정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문학의 본령은 소수성이며,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이야기가 독자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앞으로 오스카 와일드, 버지니아 울프, 미하일 쿠즈민, 리타 메이 브라운 등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퀴어문학 클래식 시리즈로 출간할 계획을 세웠다. 국내 퀴어작가들의 단편집과 시선집도 출간 기획 중이다.

“퀴어 이야기가 더 이상 숨기고 은폐해야 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의 자연스러운 부분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해요. 누구나 취향껏 작품을 골라 읽고 이야기 나누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큐큐는 그런 세상을 희망하는 책을 만들 예정입니다.” 최성경 대표가 말했다.

허윤희 기자 yhher@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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