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6년 공격을 준비 중인 국민혁명군. 위키미디어 커먼스
1927년 1월29일 저녁, 양명(梁明) 기자는 경성역을 출발하는 북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는 조선일보사의 기자였다. 입사한 지 1년6개월밖에 안 된 26살의 젊은 신입 기자였으나 사내에서 점하는 비중은 여느 선배 기자들 못지않았다. 이번 취재 출장에 선발된 것만 보더라도 그가 신문사 내에서 매우 주목받는 존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행선지는 중국이었다. 베이징과 상하이 두 도시를 중심으로 중국 국민혁명을 취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조선일보사의 중국 특파원 자격으로 출장을 떠나는 길이었다. 특파원으로 선발된 까닭은 그가 중국 문제에 관한 한 첫손가락에 꼽히는 전문가였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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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명의 전문가적 소양은 중국 유학을 통해서 함양됐다. 그는 베이징 유학생 출신이었다. 1920년부터 1925년까지 5년간 그 도시에서 중등 및 고등교육을 받았다. 그는 베이징대학 문과를 졸업했다. ‘중국 신문화운동의 중심지’라는 평판을 가진, 입학 시험이 매우 어렵고 한문과 베이징어, 영어 능력이 우수해야만 입학도, 재학도 가능한 명문 대학이었다.1 다년간의 베이징 체류와 대학 교육 덕분에 그는 중국어에 능통했다. 또 중국의 정치⋅문화에 대해서도 해박한 소양을 가질 수 있었다.

중국 특파원 양명의 첫 번째 연재 기사, ‘동란의 중국을 향하며’. 조선일보 1927년 2월4일, 석간 1면.
양명은 뛰어난 저널리스트였다. 무엇보다도 문필력이 뛰어났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10대 후반 시기는 ‘낭만문학 애호 시대’였다고 한다.2 소년 시절부터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짐작게 한다. 그는 대학에 진학한 뒤에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재학 시절에 조선의 신문과 잡지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장르와 내용이 다채롭다. 여행기, 수필, 논문, 정치논설 등과 같은 다양한 형식의 글을 썼고, 글의 주제가 사회운동, 국어정책, 문학론, 여성의 권리 옹호, 서구문화론 등과 같은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조선일보사에 입사한 1925년 8월 이후에는 유감없이 문필력을 발휘했다. 매체를 가리지 않고 글을 썼다. 조선일보사는 물론이고, ‘개벽’ ‘신여성’과 같은 영향력 있는 잡지 지면에서 그의 본명과 필명(이강, 연경학인)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는 신문사 재정이 국외 특파원을 둘 만큼 넉넉지 못했다. 중대 사안이 떠오를 때만 비상설 특파원을 보냈다. 보기를 들면, 1920년 조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서 일본군 대부대가 북간도에 출병했을 때, 동아일보사는 장덕준 기자를 현장에 특파했다. 또 1922년 워싱턴회의가 열렸을 때는 김동성 기자가 미국 특파원으로 파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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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27년에는 중국 문제가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국제 정세의 가장 뜨거운 이슈가 됐다. 중국 국민혁명이 절정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1926년 7월, 베이징의 군벌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화난 지방 광둥성에 근거를 둔 국민정부가 마침내 군대를 일으켰다. ‘타도 군벌’ ‘타도 제국주의’를 표방한 북벌 전쟁이 벌어졌다. 국민정부의 군대 ‘국민혁명군’은 승승장구했다. 화중 지방의 대도시 창사, 우한, 난창을 차례로 점령했다. 국민혁명군의 연전연승에 민중은 환호했다. 북벌군을 열렬히 환영했다. 개전 당시에 6만여 명 규모이던 국민혁명군은 귀순하는 군벌 군대를 흡수해 20만 명의 대병력으로 성장했다.

양명의 잡지 기고문 첫 페이지. ‘中國民革命과 그 印象’, 현대평론 제1권 제6호, 1927년 7월, 12쪽.
양명 기자는 1927년 2월1일, 목적지인 베이징 정양먼 역에 도착했다. 서울을 떠난 지 3일 만이었다. 이때는 바로 국민혁명군이 거침없이 북진하던 시기였다. 상하이, 난징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군벌 정권의 본거지인 베이징까지 순조롭게 석권할 것만 같은 기세였다.
중국 국민혁명에 관한 보도 기사는 거의 모든 신문이 비중 있게 다뤘다. 조선일보뿐만이 아니었다. 동아일보, 시대일보와 같은 한글 매체는 물론이고,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등 총독부 기관지들도 중국 정세를 주시했다. 일본 본국에서 발행되는 일본어 유력 신문들도 그랬다.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등 200만 부씩 발행되는 거대 신문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두어서 상세히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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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사가 독자적으로 특파원을 파견하기로 결정한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재정 부담이 있지 않은가? 특파원으로 선정된 양명의 발언을 통해서 그 내막을 알 수 있다. “연일 각 신문지상에는 중국에 관한 보도가 심히 많이 게재된다. 정치면의 대부분은 중국 문제로 평론도 그에 관한 것이 가장 많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는 심히 의문이다.”3
조선에서 접하는 중국혁명에 관한 정보량이 매우 많음을 지적하고 있다. 뉴스 기사도 많고, 해설과 연재 기사도 그렇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신뢰도에 의심이 간다는 점이다. 정확하지 않고 왜곡됐을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왜냐하면 신문에 게재되는 기사는 대부분 영국의 로이터(Reuters) 통신과 일본 통신 회사의 손을 거쳐 입수된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국민혁명의 강력한 두 적대자인 영국과 일본의 시선을 통해 과연 진실을 접할 수 있을까? 게다가 총독부의 검열까지 가세하고 있었다. 혁명이니 독립이니 하는 말은 ‘××’라는 복자로 감춰진 채 인쇄되고, 검열관의 비위를 거스르는 기사라면 통째로 삭제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결국 조선에서 접할 수 있는 중국혁명에 관한 정보는 이중삼중의 제약 속에서 유통되는 의심스러운 것이었다.
양명 기자는 영국이나 일본의 시선에 의해 굴절되지 않은, 중국혁명의 진실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인식했다. “영국 사람이 본 중국 국민혁명이 아니고, 중국사람이 본 중국 국민혁명”을 조선인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조선과 중국은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는 식민지⋅반식민지라는 공통성을 갖고 있었다. 조선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중국 인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취재하고자 했던 것이다.
양명은 1927년 6월 말 조선으로 되돌아왔다. 출장 기간은 5개월가량이었다. 이 기간 동안 그가 주로 머문 곳은 베이징과 상하이였다. 군벌 정권의 본거지인 베이징의 ‘반동’적인 분위기와 국민혁명군에 의해 해방된 상하이의 혁명적인 정세를 생생하게 겪었다. 출장 기간 중에 양명은 취재 기사를 연재했다. 헤아려보자. ‘동란의 중국을 향하며’(3회), ‘동란의 중국에서’(8회), ‘러시아 동방정책과 중국혁명의 특질’(16회), ‘반동 와중의 베이징에서’(5회), ‘중국국민당 중앙전체회 결과’(3회), ‘상하이에서’(4회), ‘중국국민당 좌우 분열의 진의’(7회) 등의 글을 썼다. 다 합하면 46회였다.
이 연재물들은 직접 취재한 정보를 토대로 작성한 생생한 현장 기사였다. 양명은 취재를 위해 군벌 정권과 국민정부 양측의 유력자들을 상당히 만나보았다고 한다. 국민혁명의 실제 상황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특히 상하이에 체류 중일 때 국민혁명군이 상하이를 해방하는 정황을 직접 목도했고, 4·12 장제스 쿠데타로 인해 혁명이 좌절하는 과정도 실제로 겪었다.4 요컨대 중국 국민혁명의 고조와 퇴조 현상을 둘 다 경험했다.
양명은 국민혁명의 원동력과 좌절의 인과관계를 해명하는 데 노력했다. 이 문제에 관해 제국주의 통신사들의 논조에 휘둘리지 말아야 함을 힘주어 강조했다. 영국과 일본 통신사들에 의해 유포된 견해는 언론계에서 통설적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중국 국민정부에 파견된 러시아인 고문관들은 전횡을 일삼았다. 또 중국국민당에 입당한 공산주의자들이 실권을 장악해 비공산파를 배척했다. 그것이 원인이 되어 1927년 4·12 반공 쿠데타가 발발했다. 쑨원의 충실한 계승자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그에 반대하여 형성된 국민당 좌파란 곧 공산파나 다름없는 세력이라고 보았다.

중국 국민혁명 당시(1926년) 장제스. 위키미디어 커먼스
양명은 언론계의 통설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통신사 보도를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환기했다. 그에 의하면, 국민혁명이 고조될 수 있었던 동력은 ‘국공합작’에 있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통일전선이 중국혁명을 고조시킨 내적 원동력이라는 진단이었다. 두 정치세력이 ‘타도 제국주의’와 ‘타도 군벌’을 공동의 목표로 삼아 협력한 데서 거대한 에너지가 생겨났다. 그것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대외정책의 소산이었다. 비서구 피억압민족의 반제국주의 운동을 원조하는 러시아의 동방정책이 가져온 성과였다.
국민혁명이 좌절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양명은 4·12 장제스 쿠데타를 지목했다. 그로 인해 국공합작이 와해되고, 국민당이 좌우파로 분열하게 됐다는 주장이었다. 양명에 따르면 혁명의 좌절과 국민당 분열의 책임은 반공 쿠데타를 일으킨 북벌군 총사령관 장제스와 그 추종자들에게 있었다. 그것은 국민혁명에 대한 반역이자 배신이었다. 양명의 생각은 언론계에 널리 퍼진 보편적인 견해와 달랐다. 많은 사람이 공유하는 다수 의견과 배치되는데도 불구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머리로 스스로 사유하는 독립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음을 엿볼 수 있다.

양명의 러시아어 필적. 모스크바 망명 당시 1932년 12월13일자 국제당 동방비서부 앞으로 제출한 ‘건의서’. 자신을 ‘이강’(양명)이라고 표기한 점이 눈길을 끈다. 러시아사회정치사기록원(РГАСПИ)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梁海淸, ‘베이징에서(4) 중국유학안내’, 동아일보 1922년 6월9일, 1면.
2. 梁明, ‘동란의 중국을 향하며(2)’, 조선일보 1927년 2월4일, 석간 1면.
3. 본사특파원 梁明, ‘동란의 중국을 향하며(1)’, 조선일보 1927년 2월3일, 석간 1면.
4. 梁明, ‘中國國民革命과 그 印象’, 현대평론 제1권 제6호, 1927년 7월,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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