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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망신고는 광복 뒤에 하라”

죽기 직전까지 일본 패망 바랐던 사회주의자 김명식의 쓸쓸한 죽음
등록 2024-06-07 21:02 수정 2024-06-13 08:19
1915~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 재학 중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명식의 사진. 임경석 제공

1915~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과 재학 중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김명식의 사진. 임경석 제공


김명식이 마지막 숨을 거둔 때는 1943년 5월14일이었다. 태평양전쟁 와중이었다. 일본의 국운이 크게 떨치는 듯이 보이던 시기다. 1년 반 전에 진주만 공습을 기점으로 미국과 전면전을 펼치게 된 일본은 개전 초기에 기염을 토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를 석권했고, 오스트레일리아와 인도마저 위협했다. 일본 정부는 주장했다. 이 전쟁은 서양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서 아시아 민족을 해방하려는 것이며, 공존공영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수립하기 위한 것이라고 소리 높여 선전했다.

결코 패망할 것 같지 않은 일본제국이었다. 그러나 김명식은 그 기세에 눌리지 않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최후의 시간에 그는 일본의 패망을 서원했다. 유언을 남겼다.

“나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니, 나의 사망신고는 조국이 광복되고 민족이 해방되거든 하라. 나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 내 두 눈 부릅떠 일본이 멸망하는 꼴을 똑똑히 보고서야 눈을 감겠다.”1

51살 병든 남성의 쓸쓸한 죽음이었다. 제주도 구좌읍 세화리 딸네 집에서였다. 그가 임종의 자리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사람들 사이에 남몰래 널리 회자했다. 듣는 사람들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쓸쓸함과 비장함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고향 마을 조천리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모진 수난에 그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비운의 사상가, 창에 찔린 호랑이 김명식’이라고 애달파했다.

도쿄와 서울 한복판에서 혁명을 맹세하다

김명식은 제주도 조천읍 조천리의 유복한 토호 김해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족이 매우 번성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정의현감과 해미군수를 지낸 권세가였다. 그 덕분에 김명식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서울을 거쳐서 일본 도쿄의 고등교육기관에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는 일신의 출세만 지향하는 삶을 경멸했던 것 같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맞서는 비밀결사에 참여한 것을 보면 말이다. 도쿄에 유학 중이던 1916년 봄이었다.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 1학년생이던 24살 청년 김명식은 ‘신아동맹당’이라는 명칭의 비합법, 비공개 단체에 가입했다. 위험한 선택이었다. 경찰의 탄압과 투옥으로 이어질 개연성을 갖는 위태로운 행위였다. 그는 그 길을 마다치 않았다. 일본을 타도하고 새로운 아시아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갖는 혁명단체였다. 일본에 유학 중이던 조선, 중국, 대만인 학생 40여 명이 가담했다. 조선 사람으로는 김명식을 비롯해 장덕수, 김철수, 정노식 등 8명의 젊은 대학생이 참여했다. 유학생 가운데 혁명적 각성도가 가장 높은 그룹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도쿄 시내에 있는 간다구(神田區)의 한 중국 레스토랑에서 결성식을 했다. 참석자들은 칼을 빼 들고서 그 앞에서 혁명운동에 헌신할 것을 엄숙히 맹세했다고 한다.

김명식은 4년 뒤에 또 하나의 비밀결사에 참여했다. ‘사회혁명당’이라는 명칭의 사회주의 단체였다. 이번에는 서울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를 이 땅에서 몰아내고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자는 목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서울 안국동에 있는 천도교 지도자 최린의 가옥 넓은 사랑방에서였다. 아들 최혁이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쿄에서 결속했던 신아동맹당의 옛 동지들이 주축이었다.

동지 김철수는 이 단체가 조선 국내에서 처음 결성된 사회주의 단체라고 회고했다. 그럴 개연성이 높다. 3·1운동(1919년) 이듬해였기 때문이다. 그즈음에 사회주의가 유행했다. 독립운동이 벽에 부딪히자 새로운 진로를 찾는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되고 있었다. 3·1운동으로 투옥됐던 김사국의 회고에 따르면, 출옥한 3·1운동 투사들이 이념상 셋으로 분화하고 있었다. 문화운동자, 의열투쟁 지지자, 사회주의자가 그것이다. 국외 망명지에서도 그랬다. 1919년 11월 작성된 일본 경찰의 정보 보고에 따르면, 상하이에 망명해 있는 조선인 청년 200명 가운데 4분의 1에 해당하는 40∼50명이 이미 사회주의자가 됐다. 2

한국에 최초로 레닌을 소개한 저널리스트
김명식이 <동아일보>에 1921년 6월3일부터 8월31일까지 61회에 걸쳐서 연재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 제1회분 지면. 임경석 제공

김명식이 <동아일보>에 1921년 6월3일부터 8월31일까지 61회에 걸쳐서 연재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 제1회분 지면. 임경석 제공


1920년은 조선 국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처음 발아하던 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조선 최초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 가운데에 속해 있었다.

이듬해였다. 1921년 5월 김명식은 또 하나의 비밀결사에 참여했고 간부진에 올랐다.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서 내지 간부에 선임됐고, 기관지 발간을 책임지는 위치에 섰다. 초창기 사회주의 운동을 진두에서 지휘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김명식은 문장력이 뛰어났다. 그래서일까. 으레 선전 업무를 맡았다. 비밀결사 고려공산당의 기관지를 발간하는 부서에 보임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합법 공개 영역에서도 그랬다. 그는 저널리스트였다. 신문사와 잡지사를 오가며 기자의 삶을 살았다. 1920년 이래 그가 주로 기고했던 언론 매체는 <동아일보> <신생활> <조선지광> 등이었다.

그는 언론 지면을 통해서 사회주의 사상을 널리 선전하는 일에 힘썼다. <동아일보> 1면에 장장 61회에 걸쳐서 연재한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글은 한국에 최초로 레닌과 볼셰비즘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것으로 평가받는다.3

그의 사회주의 언론 활동의 백미는 <신생활> 잡지였다. 김명식은 동아일보사를 퇴사하고, 새로운 잡지를 창간하는 일에 전념했다. 바로 <신생활>이었다. 그는 신생활사의 이사 겸 주필이었다. <신생활>을 이끌어간 중심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잡지는 고려공산당의 운동 자금이 투입돼 만들어진 합법 간행물이었다. 따라서 외면으로는 식민지 실정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개조와 혁신’을 표방하고 ‘신생활을 제창함, 평민문화의 건설을 제창함, 자유사상을 고취함’을 주지로 삼았다. 어느 표현이나 총독부의 시책인 ‘문화정치’의 용인 범위를 넘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적 지향성이 가득했다. 김명식 주필을 비롯한 신일용, 유진희 기자는 사회주의 색채가 강했던 인물이었다. 제11호의 특집은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특집’이었고, 제12호의 주요 기사는 ‘민족운동과 무산계급의 전술’이었다.

 

고문과 수감, 고난의 시작

결국 탈이 났다. 1922년 11월, 제13호는 발매금지 처분을 받았고, 잡지사 구성원들은 실정법 위반 혐의로 체포, 기소됐다. 그해 12월에 ‘신생활사 필화사건’이라고 불린 조선 최초의 사회주의 재판이 열렸다. 잡지사는 폐간됐고, 김명식은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김명식은 취조 중 겪은 고문과 함흥형무소의 옥고로 인해 수감 중에 병을 얻었다. 말라리아와 늑막염에 걸려서 형집행정지로 한때 출감되기까지 했다. 출감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손발이 어찌나 말랐는지 사람의 눈으로는 차마 볼 수 없게 되었”다. 몸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말라서, 보는 사람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4

건강은 계속 악화했다. 장딴지 종기 수술을 받았는데 예후가 좋지 않았다. 관절을 구성하는 뼈마디가 탈구돼 양다리의 길이가 달라지고 말았다. 이동하려면 좌우 겨드랑이에 쌍지팡이를 받쳐 짚었고, 한 다리가 짧아서 일본식 나막신을 받쳐 신어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방광염 발발로 인해 양쪽 고막에 이상이 생겨서 청각 장애를 겪었다. 곁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도 당사자는 알아듣지 못했다. 의견을 나누려면 필담을 해야만 했다.5

병중에도 김명식은 문필 활동을 계속했다. 연구자의 집계에 따르면, 김명식은 평생 150편의 글을 썼다.6 원고료로 생계를 세워야 했던 사정도 다작을 낳은 이유가 됐을 것이다. 청각 장애와 생활난 때문이었을까. 생애 말년에는 그의 총명이 흔들리기도 했다. 일본의 중국 침략전쟁이 발발한 이후 그의 논조에 이상이 감지된다. 1938~1940년 시기에 발표된 기고문 가운데는 식민지 통치 정책에 동조하는 듯한 글이 포함돼 있다.

절필 이후 김명식이 남긴 유언

다행스럽게도 시세에 편승하는 글쓰기는 머지않아 중단됐다. 그는 1940년 7월 이후 절필을 선택했다. 펜을 꺾었다. 더는 어느 매체에도 글을 싣지 않았다. 늦게나마 회한을 느꼈던 것 같다. 임종에 즈음하여 일본의 패망을 서원하는 유언을 남긴 것은 그러한 내면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김명식의 무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산91, 조천공동묘지 김해김씨문중묘역. 박종린 제공

김명식의 무덤.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산91, 조천공동묘지 김해김씨문중묘역. 박종린 제공


제주도에 여행이라도 가게 된다면 한번 그의 묘소를 찾아봐야겠다. 쓸쓸하고 비장한 그의 마지막 삶이 머릿속에서 가시지 않는다. 올곧게 신념을 지키며 한평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것만 같다. 고향 마을 조천리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 한 송이 꽃을 놓아야겠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참고 문헌

1. 현기영, <제주도우다(1)> 창비, 2023, 85쪽. 이 작품은 장편소설 형식을 취하지만, 제주도 조천 마을의 풍물과 역사에 관한 묘사는 사실에 기초해 있다.

2. 朝鮮軍參謀部, ‘朝特報第79號,自11月1日至11月30日鮮內外一般ノ狀況’, 1919년 12월3일, <現代史資料> 26, みすず書房, 1967, 290쪽.

3. ‘니콜라이 레닌은 어떠한 사람인가’, <동아일보> 1921년 6월3일~8월31일

4. ‘피골만 남은 김명식’, <조선일보> 1923년 10월20일

5. 春坡, ‘새해에 病友들은 엇더하신가’, <개벽> 66, 1926년 2월, 77~78쪽.

6. 허호준, ‘일본 유학 시기 송산 김명식의 사회인식과 활동’, <탐라문화> 39, 제주대학교, 2011, 376쪽.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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