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종건(朱鍾建)은 제1세대 사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제1세대 사회주의자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주의를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대체로 1890년대에 태어나서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에 사회주의를 수용하고, 국내 비밀결사나 국외 망명자 단체에 가담해 반일 혁명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일제 식민지 시기 잡지 ‘삼천리’의 가십난에 실린, 그의 생김새와 행동거지에 관한 묘사를 읽어보자. ‘말 잘하는 주종건. 강연에는 악재(惡才)이면서도 좌담에 탁발(卓拔)한 그는 언제나 말해서 누구에게나 지는 때가 없었다. 함흥이 고향이오, 부대(富大)치는 않으나 키는 훨씬 크고, 구두에도 버선을 신고, 금강산 기념이라는 산포도 지팡이에 허허 너털웃음을 웃으며, 술도 좋아하거니와 (…) 장난꾼인 그는 명철한 두뇌, 견인불발(忍堅不拔)의 의지 또한 동무 간에 선앙(羨仰)하는 바이다. (…) 폐병으로 하여 매해 정월 1일이 오면 일기에 유언을 쓰는 것이 또한 상례이었다.’1
말을 잘했다고 한다. 말을 주고받는 다툼에서는 누구에게든 지는 적이 없었다. 특히 좌담에 탁월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소수의 사람이 얼굴을 마주 보며 평소 성량으로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서는 뛰어난 설득력을 보였던 것 같다. 그는 ‘명철한 두뇌’를 가진 사람이라는 평을 얻었다. 풍부한 학식과 조리 있는 언변을 갖췄던 것이다. 그러나 약점도 있었다. 많은 청중이 모인 강연장에서는 그 재주를 발휘하지 못했다. 얼굴에 홍조가 뜨고 말에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 같다. 강연에는 악재였다는 평을 받았다.
키가 ‘훨씬’ 컸다고 한다. 당대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보다 두드러지게 컸음을 알 수 있다. 몸이 ‘부대’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보니, 체형은 호리호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 등산 기념으로 장만한 지팡이를 즐겨 짚고 다녔고, 함경도 사투리 억양을 구사하며 너털웃음을 곧잘 짓는 사람이었다. 술을 좋아했고 술자리에서는 짓궂은 장난을 곧잘 치는 사람이었다. 다만 건강에 문제가 있었다. 폐병을 앓았다. 해마다 설날을 맞이하면 일기장에 유언을 쓰는 기이한 행동 양상도 그 질병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이었다.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했는데, 공부를 잘했던 것 같다.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을 졸업했다. 동시대 언론인들이 남긴 인물평에 따르면, 주종건은 이론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만약 조선에 무산정당이 생긴다면 어떤 사람이 당수가 될까요?”라는 설문과 관련해 주종건이 거명됐다. 그는 노동자와 농민을 영도할 수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로 손꼽혔고, 이론가로서 그럴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2
주종건의 이론가적 면모가 사람들 앞에 뚜렷이 드러난 때는 1923년이었다. 그는 물산장려운동 논쟁에 뛰어들었다. 동아일보 지면에 ‘무산계급과 물산장려’라는 글을 12회로 나누어 연재했다. 1923년 4월6일부터 17일에 걸쳐서였다. 날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산장려운동이 절정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점이었다.
물산장려운동이란 식민지 조선인의 경제적 부를 증대하기 위해 시장에서 조선인이 생산한 상품만을 구매하자는 캠페인이었다. 그 당시 표현으로는 “조선 사람은 조선 것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 먹고 입고 쓰자”는 취지였다. 달리 말하면 조선 시장을 지배한 일본산 제품을 사용하지 말자는 보이콧운동이기도 했다. 일제의 식민지배를 받는 조선인의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는 센세이셔널한 공개적인 사회운동이었다. 이 캠페인은 1923년 1월부터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기 시작했다. 그해 1월20일에 결성된 물산장려회라는 단체가 기폭제적 역할을 했다. 물산장려운동은 적어도 그해 상반기에는 달리 손꼽을 만한 것이 없을 만큼 큰 이슈가 됐다.
주종건은 논쟁의 상대방으로 나경석(羅景錫)을 선택했다. 나경석이 쓴 ‘물산장려와 사회문제(1-7)’라는 신문 연재 기사를 타깃으로 삼았다. 나경석은 물산장려운동을 이끄는 합법 공개단체의 간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물산장려회 이사였다. 그 단체를 발기할 때부터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설립 이후에는 조사부 임원을 맡았다. 또 나경석은 물산장려운동의 대표적 이론가였다. 공개 강연회의 진행을 주관하는 역할을 했고, 신문과 잡지 매체 지면을 이용해 물산장려운동의 진행 방향에 관해 활발한 기고 활동을 펼쳤다. 논쟁 상대방으로는 그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주종건의 긴 글의 요지는 두 가지였다. 첫째 물산장려운동은 성공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물산장려는 일본 자본주의가 조선을 식민지로 거느리는 목적과 충돌되기 때문이었다. 식민지는 종주국 상품의 판매시장이자 원료 공급지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일본 당국은 그에 저촉되는 식민지 국내 산업의 발달을 곱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선진국의 품질 좋고 값싼 상품에 맞서서 후진국의 산업이 경쟁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국가권력의 특별한 정치적 보호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은 그렇지 못하지 않은가. “정치적 특별한 보호의 편의를 갖지 못하는 조선의 산업이 진보된 국외의 그것과 경쟁하기 불능”하다고 말했다.3
둘째, 물산장려운동의 계급 정책이 잘못됐다는 주장이었다. 물산장려운동 내에는 조선인 여러 계급이 참여하고 있는데, 그중에는 종주국과 공통의 이해를 갖는 부류가 포함됐음을 지적했다. 이 주장은 민족통일전선 정책을 택할까 말까, 그 정책을 택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상대와 연대해야 하는가를 되묻는 실천적인 함의를 갖는 것이었다.
주종건의 논설은 물산장려운동 찬반론에 불을 붙였다. 그를 뒤이어 박형병, 장적파, 이성태 등 사회주의자 필진이 뒤이어서 논쟁에 가세했다. 이들은 제각각의 견지에서 나경석에게 포문을 열었다. 나경석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주종건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의견에 답하기 위해서 쓴다고 명시한 반박문 ‘사회문제와 물산장려(1-4회)’를 공들여 집필했다. 논쟁은 탁구공처럼 오가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물산장려운동 찬반 논쟁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가. 오랫동안 역사학계에서는 이 찬반론을 가리켜 민족주의 대 사회주의 간의 갈등이라고 봤다. 3·1운동 때 하나의 진영을 형성했던 독립운동가들이 두 흐름으로 분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이해했다.4
그러나 이 견해는 오늘의 역사학계에서는 폐기됐다고 봐도 좋다. 나경석이 민족주의를 대변하는 위치에 있지 않았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기는커녕 사회주의 운동의 일각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현실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신진 사상가로 자임했다. 실천상으로도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극비사항이지만, 그는 사회주의 비밀결사의 핵심 간부였다. 1923년 초부터 상해당(상해파 고려공산당) 내지부의 책임비서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다.5
물산장려운동을 앞장서 이끈 것은 나경석의 사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주의 비밀결사 상해당 내지부 책임비서 자격으로 수행한 것이었다. 상해당의 관점에서 보자면, 물산장려운동은 일본에 맞서는 민족통일전선 운동이었다. 나경석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인은 유산계급, 무산계급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적 위압에 직면하여 이해관계가 공통”하기 때문에 정치적인 해방을 위해서나 부분적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연대해야 했다.
요컨대 주종건과 나경석의 물산장려 논쟁은 사회주의 진영 내부의 논쟁이었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조선 민족의 통일전선 정책을 어떻게 실행할까를 둘러싼 첨예한 전략·전술 논쟁이었다. 그렇다면 주종건은 사회주의 내부의 어떤 입장을 대표하는가? 이에 관해서 학계에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출돼 있다. 상해당의 일원이었던 주종건이 민족통일전선 정책에 관련하여 우경화하는 상해당 집행부와 의견이 갈렸던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상해당 좌파’ 혹은 ‘재일본 상해당’의 입장을 대표한다는 해석이다.6 상해당에서 이탈해 ‘신생활사그룹’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사회주의 소그룹의 정체성을 가졌다는 해석도 있다.7
주종건은 논적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논쟁을 주고받은 나경석은 그를 가리켜 ‘명석한 이론과 풍부한 학식’을 갖춘 인재라고 평했다. 나경석은 말하기를, “만일 주종건 군이 러시아에 생(生)하였더면, 레닌과 트로츠키에 백중되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논평했다.8
조선의 레닌, 혹은 조선의 트로츠키라는 호명이었다. 러시아혁명을 이끌어온 지도자들과 흡사한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표명돼 있다. 그 당시는 트로츠키가 러시아의 차세대 지도자로 손꼽히던 시기였다. 주종건은 조선 혁명의 현재와 미래를 이론적으로 이끌어갈 만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白雲居士, 行方探索, ‘삼천리’ 4-8, 1932년 7월1일, 12쪽.
2. 주요한 등 8인 좌담. 東西古今人物座談會, ‘동광’ 29, 1931년 12월27일, 42쪽.
3. 주종건, ‘무산계급과 물산장려(4): 나공민군의 ‘물산장려와 사회문제’ 급 기타에 대하여’, 동아일보 1923년 4월9일.
4. 조기준, ‘조선물산장려운동의 전개과정과 그 역사적 성격’, 역사학보 41, 1969년. ; 윤해동, ‘일제하 물산장려운동의 배경과 그 이념’, ‘한국사론’ 27, 1992년.
5. Тену(전우), Доклад No.2 О партийно-организационной работе в Корее(조선 내지의 당 조직활동 보고 제2호), 1923년 9월30일, с.2, РГАСПИ ф.495 оп.135 д.76 л.6-11
6. 이애숙, ‘1922~1924년 국내의 민족통일전선운동’, ‘역사와현실’ 28, 1998년, 107쪽.
7. 박종린,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사상의 수용과 물산장려논쟁’, ‘역사와현실’ 47, 2003년, 77쪽.
8. 나경석, ‘물산장려와 사회문제(2)’, 동아일보, 1923년 4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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