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골은 지리산의 한 골짜기다.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에 자리잡은 커다란 계곡이다. 지리산 주능선의 세석평전에서 골짜기 아래편 쌍계사 입구까지 거리만 16㎞가 넘는다. 빗점골 방향 능선과 삼신봉 능선, 두 병풍 사이에 있는 넓은 계곡 속에 작은 능선들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다. 골짜기가 넓고도 깊다.
1952년 1월17일 목요일, 지리산 모든 골짜기에 많은 눈이 내렸다. 그날 저녁 즈음부터 빨치산들이 대성골로 몰려들었다. 다음날 새벽쯤에는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눈 덮인 대성골 전역에 빨치산들이 가득 찼다. 기록에 따라서는 천수백 명이라고도 하고, 수천 명이라고도 했다. 그날 대성골에 체류했던 여성 빨치산 정순덕이 보기에는 1만 명도 넘었다.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1
그토록 많은 유격대원이 모인 것은 대대적인 토벌 때문이었다. 6·25전쟁 발발 이후 두 번째 맞는 겨울이었다. 비정규 무장부대를 공격하는 데 최적의 자연조건이 형성되는 때였다. 밴 플리트 미8군 사령관은 작전명 ‘쥐잡기’(Operation Rat Killer)로 명명된 빨치산 토벌 작전을 시행했다. 그를 추진하기 위해 1951년 11월25일 특수임무부대 백야전전투사령부(Paik Task Force)를 창설했고, 백선엽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예하에 국군 2개 사단(수도사단과 제8사단)과 3개 전투사령부(서남지구, 태백산지구, 지리산지구)가 배속됐다. 윌리엄 도즈 중령을 선임고문관으로 하는 60여 명의 미국 군사고문단이 작전을 지휘했다.2
1월18일, 지리산 상공에 군용기 편대가 떴다. 대성골에 가득 찬 빨치산을 향해 기총 소사와 함께 화염 공격을 퍼부었다. 휘발유가 가득 찬 드럼통과 소이탄을 온 골짜기에 투척했다. 대성골은 시뻘건 불바다로 변했다. 밤낮으로 닷새 동안 불길에 휩싸였다.
어마어마한 피해가 났다. 특히 경남도당이 이끄는 유격대가 이날 궤멸됐다. 배명훈도 이날 사망했다. 남경우 위원장과 함께 전사했다는 도당 간부 14명 가운데 1명이었다. 그는 6·25전쟁 초기에 경남 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된 고급 간부였다. 1950년 10월 ‘후퇴’ 시기에는 1천~1500명 규모의 경남 인민유격대를 조직하고 사령관으로 취임했다. 말하자면 배명훈은 도당위원장과 함께 경남빨치산 결성의 첫손가락을 다투는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경남도인민위원장은 ‘이아바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함경도 남자였다고 한다.3 ‘아바이’란 나이가 지긋한 남성을 친근하게 부르는 함경도 방언이다. 그랬다. 배명훈은 1908년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래, 6·25전쟁이 나기 전까지 줄곧 함경도 여러 곳에서 활동한 사람이었다. 경남도인민위원장으로 발령받아 부임했을 때 그의 말투는 이채로웠을 것이다. 43살 배명훈의 말투는 진한 함경도 방언이었다.
예외가 있긴 했다. 그가 함경도를 떠나 타지에서 수년간 생활한 적이 두 번 있었다. 한 번은 반일 노동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4년간 수감됐을 때다. 다른 한 번은 모스크바였다. 그곳 중앙당학교에서 2년간 유학할 때였다. 이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그는 함경도 농촌과 공장 지대에서 생활해왔다.
배명훈은 16살 소년 시절에 처음으로 ‘해방운동’에 참가했노라고 자임했다. 1923년 10월6일부터 고향 마을인 고원군 상산면 도내리의 소년단 책임을 맡았노라고, 날짜까지 지정해서 말했다.4
어린 나이에 해방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있다. 그의 출신지인 함남 농촌지대가 일찍부터 농민운동이 발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고원군과 주변의 문천, 안변, 단천, 영흥, 정평, 북청 일대에서는 농민조합이 활발히 조직됐고, 1930년대에 대중적인 적색농민조합운동이 전개됐다. 배명훈이 19살 되던 해에는 소년운동에서 벗어나 농민조합에 가담했다. 리 단위 농민조합의 조직 활동에 참여했다고 한다.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서당에서 6년 동안 한학을 배웠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문, 조선어는 물론이고 일본어도 읽고 말할 수 있었다. 농민조합이 주선한 야학 덕분이었다. 배명훈은 야학에도 열심히 다녔고, 일본 출판물을 읽기 위해서 자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결국 배명훈의 의식화 과정은 1920~1930년대 함경도 농촌지대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농민운동의 혁명적 분위기 속에서 이뤄진 것이다.
좀더 나이가 들었을 때 배명훈은 도시로 나갔다. 24살 되던 1931년이었다. 그는 청진으로 향했다. 함경북도의 도청소재지이자 함경선·도문선 등의 철도가 부설돼 만주로 쉽사리 연결되는 교통상의 요지였다. 일본 본토의 각 항구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과 항로가 열려 해상 무역도 활발했다. 도시로 돈벌이하러 갔던 것인가? 아니었다. 그의 내면의식은 이미 직업적 혁명가였다. 그의 자서전에 담긴 표현을 들어보자. “당시 조선운동의 직장 침투 표어 밑에서 활동할 계획”이었다.5
당원의 사회적 구성을 지식인·학생층이 아니라 공장과 사업장의 노동자층으로 대체하는 일에 참여했다. 조선공산당 재건의 지침이라 할 ‘12월 테제’를 실천한다는 자의식이 뚜렷했음을 알 수 있다. 노동운동으로 이전하려는 배명훈의 의도는 1932년부터 성과가 나타났다. 만철기계공장 직공으로 취업했고, 공장 내에서 조직을 뿌리내리는 데 성공했다. 배명훈은 이후 3년 동안 비공개 노동조합 운동에 전념했다. 그 결과 청진에 집행부를 둔 ‘조선공산주의자동맹’이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했고, 자신은 그 산하 4개 지방위원회 가운데 하나인 ‘나진·웅기 조직지도위원회’를 이끌었다. 중간 간부 대열에 들었던 것이다.
이 비밀결사는 1934년 11월4일 러시아혁명을 기념하는 인쇄물 살포 사건이 단서가 돼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았다. 살포 권역이 광범했다. 청진, 나남, 어대진, 명천, 회령, 웅기, 나진 등 함경북도 중요 지점에서 일제히 문서가 발견됐다. 또 인쇄물 수량이 방대했다. 등사판 격문 1만2천 장이 제작됐다. 등사원지 1장으로 약 500장의 격문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24장의 등사원지를 철필로 긁어야만 하지 않는가. 경찰은 규모가 큰 비밀결사가 잠재해 있다고 의심했다. 한 달 남짓 수사와 취조 끝에 57명의 노동운동가, 사회주의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세칭 ‘함북공산주의자동맹 사건’이었다.6
배명훈도 이 검거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가장 늦게 체포된 축에 속했다. 11월29일 잔존 구성원들에게 연락해 파괴된 조직을 수습하려다 그만 자신도 체포되고 말았다.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청진형무소, 함흥형무소,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서대문형무소로 이감한 직후 촬영한 수형자카드가 남아 있다. 형무소 붉은 벽돌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안면부가 다소 돌출된 얼굴이다. 입을 앙다물고 있지만, 긴장한 것 같지는 않다.
배명훈의 삶은 오랫동안 해방운동에 몸담았다는 점에서 이채롭다. 16살에 시작한 운동가의 삶은 해방되던 그해까지 22년 동안 계속됐다. 놀라운 일이다. 비슷한 사례를 보기 쉽지 않다. 소년운동, 농민조합운동, 노동조합운동, 비밀결사운동 등 다채로운 운동 궤적을 거쳤다. 지식인이나 학생이 아니라 노동자·농민의 처지에서 출발했음이 주목된다. 지식인 기반의 운동가라면 유명하게 됐을 법한 세월인데 그렇지 않았다. 1920년대 유형의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1930년대 유형의 사회주의자라 할 만하다.
특별히 눈길을 끄는 일이 있다. 바로 일제 패망의 날까지 쉼 없이 계속해 해방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배명훈은 1943년에 비밀결사운동을 재개했다. 일제 패망을 2년 앞둔 시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때였다. 일본은 전쟁 승리를 위해 총동원 체제를 구축했고, 계엄 상태나 다름없는 폭압 통치를 자행했다. 이름 있는 명사들이 식민통치에 협력해 나서고, 사회주의 운동 경력자들에게는 전향을 강제하는 정책이 시행됐다. 온 사회에 탁류가 도도히 흐르고 있었다.
배명훈은 함남 문천군 천내리에 소재하는 북선제강소에 직공으로 취업함과 동시에 동지 획득에 나섰다. 그리하여 제강소 공장 내부에 비밀결사의 세포 조직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이 비밀결사운동이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었고, 자신의 역할은 북선제강소 야체이카(세포) 책임자였으며, 운동의 지도자는 정재달이었다고 뒷날 밝혔다.7 정재달은 전우(田友)라는 가명으로 더 유명한 사회주의 운동 초창기 이래의 명사였다. 함경도 공장지대에서 해방 전야에도 여전히 비밀결사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그러나 해방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 위기가 찾아왔다. 1945년 7월4일이었다. 경기도경찰부 소속 형사대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비밀결사가 노출됐던 것이다. 해방되기 1개월10일 전의 일이다. 천행이었다. 그는 8·15 광복을 맞아서 출옥할 수 있었다.
이제 알 만하다. 배명훈이 해방 뒤 당의 미래 지도자로 지목돼 모스크바 유학생으로 선발된 이유를 말이다. 또 6·25전쟁이 발발하자 남쪽의 임시수도가 자리잡은 경상남도에 파견된 것도, 게다가 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부여받은 이유도 말이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정충제, ‘실록 정순덕 (상)’, 대제학, 1989년, 272쪽.
2. 이선아, ‘한국전쟁 전후 빨치산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2024년, 140~141쪽.
3. 이태, ‘이현상’, 학원사, 1990년, 275쪽.
4. 배명훈, ‘간부리력서’, 1948년 8월8일, 2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13 л.10-11об.
5. 배명훈, ‘자서전’, 1948년 8월8일, 1쪽, РГАСПИ ф.495 оп.228 д.813 л.12-14.
6. ‘함북조공자동맹 전모 (1)’ 동아일보 1935년 2월19일, 석간 3면.
7. 배명훈, ‘간부리력서’, 4쪽.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헌법학자들 “국힘, 사태 오판…한덕수가 헌법재판관 임명 가능”
미 국무부, ‘한동훈 사살 계획’ 출처 질문에 “인지 못 하고 있다”
‘윤 캠프’ 건진법사 폰 나왔다…공천 ‘기도비’ 1억 받은 혐의
미군 “우크라서 북한군 수백명 사상”…백악관 “수십명” 첫 공식 확인
유승민 “‘탄핵 반대 중진’ 비대위원장? 국힘 골로 간다”
김문수, “내란공범” 외친 시민 빤히 보면서 “경찰 불러”
국힘·윤석열의 탄핵심판 방해 ‘침대 축구’
‘윤석열 탄핵소추안’ 분량 줄이다…넘치는 죄과에 16쪽 늘어난 사연
[단독] 계엄 선포 순간, 국힘 텔레방에서만 ‘본회의장으로’ 외쳤다
1호 헌법연구관 “윤석열 만장일치 탄핵…박근혜보다 사유 중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