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종건은 유능한 저널리스트였다.
온 사회의 이목을 끄는 현안이 제기되면 그에 대응하는 기사를 기민하게 써냈다. 단편적인 보도 기사가 아니었다. 사안의 자초지종과 성격을 보여주는 심층적인 탐사보도 기사를 내놓았다.
보기를 들어보자. 물산장려운동이 전 조선의 여론을 뒤흔들며 크게 유행할 때였다. 그는 운동에 내재한 문제점을 고발하는 장문의 연재기사를 집필했다. 그뿐이랴. 일본 본국에서 제국의회 중의원 총선거가 화제가 된 시점에는 그에 관한 두터운 해설 기사를 썼다. 새로 출범하는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 내각의 등장 경위, 내각을 구성하는 세 정치세력의 연합, 그에 내재하는 관료집단과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 사이의 알력 등을 조선인 독자에게 심층적으로 전달했다.1
그 당시에는 ‘국제청년의 날’이 매년 9월 첫 번째 일요일이었다. ‘국제무산청년운동과 조선’이란 글을 당대 구독자 수 1위 잡지 ‘개벽’ 9월호(1923년)에 기고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국제청년의 날이 언제 어떤 맥락 속에서 제정됐는지, 조선청년운동이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도시와 농촌의 무산자 청년이 어떤 사명을 가졌는지를 차근차근 논했다.
주종건 기자의 취재 범위는 넓었다. 정치·국제 이슈 외에도 경제와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서 거리낌 없이 기사를 생산해냈다. ‘현대의 교육과 민중’은 식민지 조선의 초등교육과 고등교육의 문제점을 파헤친 기사였다. ‘현대경제조직의 모순’이라는 장문의 기사는 그의 경제학 소양이 깊음을 잘 보여준다.2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빈곤의 원인은 무엇인지, 그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이 기사는 갑과 을의 대화록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갑은 주종건 자신이고, 을은 ‘다소간 교양 있는 실업한 숙련직공’이다. 구어를 표준으로 문장을 짰기 때문에 읽기에 쉽다. 그가 글을 잘 쓰는 이론가라는 평판을 얻은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그는 신문기자 집단의 리더이기도 했다. 언론자유운동의 원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행동 양상을 보였다. 주종건이 몸담고 있던 시대일보사는 조선어로 발간되는 3대 일간지 가운데 하나였는데, 1924년에 창립된 지 불과 4개월 만에 자금난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신흥종교인 보천교가 나섰다. 일간지의 영향력을 활용해 신흥교단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천교는 약속했던 자금 투자를 이행하지 않은데다가, 시대일보사 기자들이 중심이 된 사원총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주종건이 그 반대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사원총회의 대표 자격으로 언론 인터뷰에 응했고, 보천교 대표에게 교부한 계약서를 회수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문사를 정상화하고자 분투했다. 보천교 본부가 소재한 전북 정읍에까지 방문해, 계약 해제를 요구한 일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3
보천교는 신도가 100만 명에 이른다고 일컬을 만큼 농촌 사회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그것은 모순된 행동 양상을 보이는 복잡한 신흥 종교단체였다. 3·1운동에 참여했고, 물산장려운동과 문화운동에도 참여한 형적이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 단체들은 보천교 반대운동의 입장에 섰다. 시대일보사 기자들과 주종건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물론이고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도 그랬다. 왜냐하면 보천교는 부적과 기도만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전통시대 연월일 편제의 근간이 된 60갑자의 첫해 1924년 갑자년에 교주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한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교리를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일본 본국의 중앙정계에 대표를 파견해 친일 운동에 나서려고도 했다. 요컨대 보천교는 미신을 믿는 집단이자 정치적으로 친일화하는 혐의가 있었다. 배척의 대상이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신뢰할 수 없는 신흥종교단체가 조선인 언론의 우위를 쥐도록 방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주종건의 생각이었다.
신문기자 주종건의 삶의 반경은 저널리즘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는 뉴스를 보도할 뿐만 아니라 뉴스거리가 될 만한 일을 직접 실행하는 위치에도 섰다. 공개적인 사회운동에 참가했던 것이다. 총독부는 3·1운동 이후 제한된 범위나마 자유주의적인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합법적인 사회운동의 여지가 다소 열려 있었다. 모든 집회마다 사전에 경찰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회의장에는 경찰관이 착석해서 발언자들의 언행을 감시했다. 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나마 허용됐다. 노동자·농민단체와 청년단체에 가입하거나, 사상단체 활동을 전개하는 것은 일본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는 행동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감돼야 할 ‘범죄’ 행위는 아니었다.
그는 사상단체, 노동자·농민단체, 청년단체에 두루 몸담았다. ‘사상단체’란 3·1운동 이후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1921~1927년의 짧은 기간에 존속했던, 사회문제 연구를 목적으로 표방한 합법 공개 위상의 사회주의 단체였다. ‘연구’ 영역을 벗어나 실행에 옮기는 행위는 금지돼 있었다. 그런 시도는 일본 경찰로부터 철저하게 탄압받았다. 주종건이 참가한 사상단체는 1923년 8월에 결성된 ‘민중사’(民衆社)였다. “사회주의에 입각하여 사회문제를 연구”한다고 공공연하게 표방했으며, 서적 출판과 잡지 간행, 강연회와 강습회 개최 등의 사업을 계획한 전형적인 사상단체였다.4
거의 같은 시기에 노동자·농민운동에도 참여했다. 그해 9월28일 서울의 노동자·농민단체 임원 40명이 회합하여 전국적 범위의 노동자·농민통합단체를 결성하기로 하고, 그를 준비하고자 조선노농대회준비회를 조직했다는 신문 기사가 떴다. 그 준비회원 명단에 주종건의 이름이 있다. 1924년 4월에는 전국적 규모의 청년단체통합기관인 조선청년총동맹 창립대회에서 5명으로 이뤄진 검사위원회 멤버로 선출됐음이 확인된다. 집행부와 회원들이 온당하게 활동을 수행하는지 자체적으로 감사하는 기구였다. 요컨대 주종건은 당시 대중운동의 세 가지 기둥이라고 손꼽던 노동자, 농민, 청년운동의 전국단위 통일기구에 간부급으로 관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딱 맞는 인물이었다. 일본 경찰이 작성한, 지속적인 감시를 필요로 하는 요시찰대상자 명부에 등재되기에 말이다. 과연 그랬다. ‘왜정시대인물사료’라는 이름으로 편집된 일본 경찰의 문서철이 남아 있는데, 그 속에 주종건에 대한 사찰 기록이 포함돼 있다.
주종건은 합법 공개 영역만으로 자신의 활동 영역을 한정하지 않았다. 비합법 비밀결사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지하운동은 합법공개운동과 달랐다.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그에 가담하는 행위는 체포와 수감을 각오해야 하는 ‘범죄’ 행위였다. 1928년 개정 치안유지법에 따르면, 최고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는 위험한 행위였다.
뒷날 모스크바에 체류할 때, 국제공산당 앞으로 제출한 문서에서 주종건은 자신을 가리켜 ‘망명 중 조선공산당원(1921년부터)’이라고 자임했다. 비밀결사 조선공산당의 일원이라는 점, 그리고 1921년부터 줄곧 그랬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1921년이란 그해 5월20일부터 23일까지 4일간, 상하이 셴스백화점(先施公司) 호텔에서 열린 고려공산당(상해파) 창립대회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주종건은 조선 국내에서 선출된 8명 대의원의 한 사람이었다. 대의원들은 압록강 국경과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숱한 위기와 에피소드를 겪었다. 이 대회에서 주종건은 사회주의 운동을 이끄는 중앙집행부 13명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됐고, 특별히 기관지 출판의 책임을 맡았다. 그의 이론가적 재능이 창당대회 대의원 동료들 사이에서 널리 인정됐음을 알 수 있다.
그 시기에는 국내외에 걸쳐서 여러 비밀 공산그룹이 사회주의 운동을 경쟁적으로 전개했다. 주종건이 속했던 상해당(상해파 고려공산당) 외에도 이시당(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내지당(조선공산당), 서울파(고려공산동맹), 북성회(카엔당) 등이 있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운동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지만, 경쟁하고 충돌하는 부작용이 있었다. 주종건은 이들을 묶어서 사회주의 운동을 통합하는 데 핵심 역할을 맡았다. 1924년 봄에 6인회라고 부르는 국내 공산그룹 통합기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25년에도 주종건의 역할은 여전히 컸다. 통일 공산당의 설립을 둘러싸고 세 개의 방안이 교차·충돌하던 때였다. 국내외 모든 공산그룹 통합론(대통합론), 국내 중심 공산그룹 통합론(내지통합론), 국제당 중심 국내 통합론(소통합론)이 서로 경쟁했다. 주종건은 이 중에서 세 번째 입장에 섰다. 국내 중심주의와 국제당의 지도 승인이라는 두 가지 기준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1925년 4월17일 주종건은 서울 시내 아서원이라는 옥호의 중국음식점을 찾았다. 그를 비롯해 단체 손님인 양 가장하고 모인 사람들이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바로 주종건이 동의했던 세 번째 조직론이 결실을 본 것이었다. 주종건은 창립대회에 출석한 대의원 19명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또 이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집행위원회 7명 멤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오래 열망해오던 주종건의 꿈이 마침내 실현됐다.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에서 조선을 절대적으로 해방하는 것”을 당면의 근본과업으로 삼는5, 조선혁명을 이끌어갈 직업적 혁명가들의 전국적 통일이 현실화됐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주종건, ‘加藤 내각 출현에 대한 관찰의 1, 2’, ‘개벽 49’, 1924년 7월.
2. 주종건, ‘현대의 교육과 민중’, ‘개벽 58’, 1925년 4월 ; 주종건, ‘현대경제조직의 모순-어떤 다소간 교양 있는 실업한 숙련 직공과의 대화’, ‘개벽 41’, 1923년 11월.
3. ‘시대일보는 필경 보천교 수중에’ 조선일보 1924년 7월10일.
4. ‘민중사 조직’ 동아일보 1923년 9월1일.
5. 조선공산당중앙집행위원회, ‘조선공산당 선언’, 1926년 7월, ‘불꽃 7호’, 1926년 9월1일,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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