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살 즈음의 조원숙.
1926 년은 조원숙 ( 趙元淑 ) 이 스무 살 되는 해였다 . 1906 년에 태어났으므로 조선식 세는 나이로 치면 스물한 살이었다 . 오늘날 학령으로 환산하면 대학교 2 학년의 나이다 . 당시 풍속으론 결혼 적령기에 해당했다 . 그때 사람들은 여성의 혼기가 17 ∼ 24 살 즈음이고 , 그중에서 스무 살이 혼인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간주하고 있었다 .
그는 근대 교육의 세례를 받은 신여성이었다 . 하지만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후포매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전통적 관습 탓에 교육기관에 나아갈 기회를 허용받지 못했다 . 집안이 가난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 세 살 많은 오빠 조두원이 서울로 유학을 떠날 수 있을 만큼 집안 살림은 넉넉했다 . 오빠가 서당에서 5 년간 한문을 배우고 향리의 보통학교에서 4 년간 수학한 뒤 , 진학차 서울로 올라간 게 1921 년 4 월이었다 . 그 뒤 오빠는 중동학교를 거쳐 연희전문학교에 진학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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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도 서울로 유학하고 싶은 생각에 불타올랐다 . 자나 깨나 밤낮 할 것 없이 신식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 며칠씩 밥도 먹지 않았고 , 심지어 병까지 났다 . 하지만 자기네는 ‘ 구식 가정 ’ 이고 지방에서 꽤나 행세하는 집안이었다 . 경제적으로 지주였고 , 전통적인 한학과 유교 규범을 엄격히 지키는 가풍이었다 . 아들을 유학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 하물며 딸의 경우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 생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
열다섯 살 소녀는 놀라운 용기를 냈다 . 그는 죽기를 결심하고 행동에 나섰다 . 부모는 물론 친척들과 동네 사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밤 봇짐을 쌌다 . 은밀히 교군(가마꾼)을 불렀다 . 그 가마를 타고 양양과 강릉 두 도시의 접경지인 지경리에 이르렀다 . 5 월 14 일 밤이었다고 한다 . 가마에서 내리니 춥지도 덥지도 않은 보름밤이었다 . 중천에 뜬 둥근 달이 대낮처럼 밝았고 , 만산에 무르익어가는 녹음이 향기로웠다 . 시원하고 상쾌한 마음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고 뒷날 조원숙은 회상했다 .
조원숙은 ‘ 근화학원 ’ 에 입학했다 . 이 학교는 조선여자교육협회에서 경영하는 여성 교육기관으로 초등 · 중등 교육과정을 속성으로 가르쳤다 . 3·1 운동 직후 교육열의 고조에 힘입어 설립된 부인야학강습소가 그 기원이었다 . 1925 년에는 정식 학교 인가를 받아 근화여학교로 불렸다 .

조원숙, 조옥화 자매가 다닌 근화학원 안국동 교사 내부 정경. <동아일보> 1925년 3월20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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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차미리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미국 유학생 출신이었다 . 여성의 각성과 인권 옹호를 선도하는 교육자로서 사회적으로 존경받았지만 , 그의 교육 이념은 뚜렷한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갖도록 유도함으로써 선교 기관이나 다름없는 느낌을 주었고 , 현모양처주의를 표방해 여성의 역할을 가정 안으로 제한하는 흠이 있었다 .
반발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 조원숙이 그 중심이었다 . 그는 공공선을 추구하는 일에 열심이었으므로 동료들 사이에 영향력이 컸다 . 보기를 들어보자 . 그는 열일곱 살 되던 1923 년 5 월 근화학원 학생 300 명을 구성원으로 하는 근화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 그 임원이 됐다 . 6명 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임됐으며 여러 집행부서 중 운동부 일을 맡아 보았다 . 신체 활동 능력이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 그뿐만이 아니었다 . 그해 11 월에는 근화학원 건축 기금을 모금하기 위한 남부지방 순회연극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 교장 차미리사를 단장으로 하는 10 명 멤버 가운데 조원숙도 포함돼 있었다 . 순회연극단은 11 월 9 일부터 12 월 26 일까지 37 일에 걸쳐 남부조선 22 개 도시를 순회했다 . 강행군이었다 . 조원숙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독창 , 합창 , 러시아 춤 , 폴란드 춤 , 러시아 노래 , 연극 등으로 이뤄진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소화했다 .
차미리사 교장과 조원숙 학생은 24살 연령과 신분 차이가 있었지만 강한 유대감을 갖고 있었다 . 둘 다 여성교육 공동체에 큰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 하지만 1925 년 9 월 30 일에 이르러 그 유대감은 파국을 맞고 말았다 . 근화학원 학생 조원숙이 사회주의운동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교장에게 퇴학 처분을 받게 됐던 것이다 .
여기서 말하는 사회주의운동 단체란 무엇을 가리킬까 ? 여성동우회나 경성여자청년동맹 같은 합법 여성단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 그즈음 경성여자청년동맹 모임에 조원숙이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 . 허정숙 , 주세죽 , 김조이 , 김영희 등과 같이 유명한 여성 사회주의자들이 이끄는 청년단체였다 . 그해 9 월 20 일 열린 정기총회 석상에서 ‘ 종교에 관한 건 ’ ‘ 현모양처주의에 관한 건 ’ 등이 안건으로 다뤄졌다 . 어느 안건이나 근화학원의 교육 이념과는 상충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 그 회합에서 조원숙은 7 명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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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숙의 퇴학 처분은 조선인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됐고 , 언론 지면을 통해서까지 반대론이 표출됐다 . 어느 도쿄 유학생은 <동아일보>에 실은 기고문에서 차미리사의 근화학원 교장직 사퇴를 촉구했다 . 그는 차미리사를 가리켜 심지어 ‘ 조선 여자 교육계의 악마 ’ 라고까지 규탄했다 .
조원숙의 교육 경력은 여기서 끝났다 . 그러나 학교교육이 제공하지 못하는 지식과 식견을 여성운동 속에서 구할 수 있었다 . 정기적인 연구모임이 그런 역할을 했다 . 그해 10 월 24 일 있었던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연구모임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 흥미로운 자료다 . 일제 식민지 시대에 사회단체 내에서 구성원들의 교육과 선전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참석자들은 책을 사전에 읽고 , 그중 한 사람이 책 내용을 간추려 설명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진행했다 . 이날 선택된 책은 일본인 사회주의자 야마카와 히토시 ( 山川均 ) 의 베스트셀러 <자본주의의 구조>였다 . 발표자는 회원 허정숙이었다 . 그녀는 ‘ 자본주의 생산이란 무엇인가 ’ 라는 제목으로 발제했다 . 19 세기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자 푸리에의 경제관 , 일본 경제학자 후쿠다 도쿠조 ( 福田德三 ) 의 경제학 강의를 종횡으로 인용하는 수준 높은 발표였다 .
오후 8 시 , 늦은 시간에 열린 이날 연구모임에는 젊은 여성 14명이 참석했다 . 그중에는 조원숙과 함께 그의 친동생 조옥화도 포함돼 있었다 . 두 살 터울의 자매가 나란히 여자 청년단체에 참여한 점이 이채롭다 . 동생도 언니와 동일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 그녀도 근화학원에 재학 중이었다 . 아마도 언니의 선택과 행동을 높이 평가했던 것 같다 . 언니를 본받아 서울에 유학 왔고 , 사회주의 여성단체 활동에도 함께 가담한 것을 보면 말이다 .
조원숙은 각성된 여성으로 일어서기까지 두 번이나 큰 용기를 냈다 . 한 번은 여성 교육을 무시하는 전통적 인습에 맞서 고향을 박차고 벗어날 때였고 , 다른 한 번은 여성 교육기관의 현모양처주의 교육 이념에 맞서 학교 울타리를 박차고 나올 때였다 . 전자는 열다섯 살 때 , 후자는 열아홉 살 때 겪은 일이었다 .
스무 살 조원숙의 여성 정체성은 강렬했다 . 두 번의 담금질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 근화학원을 그만둔 이후 그의 여성운동 행보는 더욱 활발해졌다 . 보기를 들어보자 . 1926 년 3 월 여성동우회 정기총회에서 신임 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 조선 여성운동 전반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직위였다 . 그해 4 월에는 지방순회 강연단 일원으로 ‘ 여성해방의 의의 ’ 를 연제로 해 각지를 순회하는 노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 분열된 여성운동 단체를 통합하는 일에도 성심껏 나섰다 . 그해 11 월 서울에 소재하는 두 개의 유력한 여성청년단체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을 합동하는 일에 경성여자청년동맹 쪽 3명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 그리하여 12 월에는 통합단체 중앙여자청년동맹 결성을 이끌어내고 11 인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됐다 .
조원숙이 여성운동 분야에만 활동을 한정한 것은 아니었다 . 남녀 가릴 것 없이 청년운동 부문에도 가담했다 . 그해 1926 년 4 월에는 한양청년연맹 대회 석상에서 19 명 집행위원 가운데 하나로 선출됐다 . 여성은 그 혼자였다 . 사회주의 사상단체에도 몸담았다 . 1927 년 2 월 정우회 임시총회에 참석했고 , 신흥청년동맹 간부직도 맡았다 .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대회에도 출석했다 .
그뿐만이 아니다 . 사상과 정견의 차이를 뛰어넘는 반일 민족통일전선운동에도 참여했다 .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망라한 신간회 경성지회에 가담했고 , 여성통합단체 근우회 설립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 여성운동의 영역을 넘어서 민족독립과 사회혁명을 지향하는 혁명가의 면모가 뚜렷하다 .

종로경찰서 ‘사상요시찰인연명부’(1926)에 처음 등재된 조원숙 항목. 국사편찬위원회
대가가 있었다 . 조원숙의 두드러진 활동상은 일본 경찰의 감시망에 포착됐다 . 당시 조원숙의 주소는 ‘ 수창동 97 번지 ’ 로 광화문 인근의 전통 주택가에서 살고 있었다 . 관할 종로경찰서는 1926 년 4 월 19 일자로 조원숙을 ‘ 사상요시찰인연명부’ 에 신규 등록했다 . 경찰의 감시 기록에 따르면 , 조원숙은 “ 성격이 일견 온순하지만 열렬한 배일사상을 품고 ” 있었다 . 또 “ 사회주의에 공명하여 여자 청년의 해방을 절규하고 , 항상 남자와 나란히 사회주의 단체에 출입하며 , 그 선전에 분주한 자 ” 라고 평가하고 있었다 .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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