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산을 소작 농민들에게 기부한 사람이 있다. 강택진(姜宅鎭)이라는 이다.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일대에 넓은 농지를 소유했고, 다수의 땅 없는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어 그 대가로 고율의 소작료를 받아서 생활하던 지주였다.
1923년 4월26일 일간신문 지면에 ‘토지를 포기하여 소작인에게 일임한 지주’라는 기사가 실렸다. 강택진에 관한 것이었다. 자기가 가진 재산 전부를 풍기소작조합에 내줬다고 한다. 전 재산을 포기한다니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기자는 ‘처음 듣는 일’이라고 썼다. “이 소식을 들은 그곳 부근의 지주들은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현지 반응을 소개했다. 토지를 기증받은 소작 농민들은 너무도 감사히 여기고 있다고 전했다.1 얼마큼의 토지를 기부했을까? 기사 출처에 따라 두 개의 상이한 정보가 전해진다. ‘1만9000평’(6만2801㎡)이라 쓴 기사도 있고,2 ‘9000평’(2만9750㎡)이라 기재한 곳도 있다.3
둘 중 하나는 착오일 것이다. 전통적인 농지 계량 단위로 환산하면 95, 45마지기에 해당한다. 1마지기란 한 말의 볍씨를 파종할 수 있는 농지면적을 가리키는데, 대략 한 사람이 1년간 먹고살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이었다. 그 정도 농지를 소유했다면 대지주라 할 수는 없지만, 농촌 지대에서 행세깨나 하는 중소 지주임은 틀림없다. 강택진이 기부한 농지 값어치를 돈으로 환산한 기록이 있다. 그에 따르면 강택진이 포기한 소유 토지는 1만원 내외의 금전에 상당했다.4
1923년의 1만원은 오늘날 구매력으로 얼마나 될까. 그즈음 일간신문 기자 첫해 월급이 40~50원이었고, 일용노동자 하루 노임이 1원10전이었음을 계산하면, 1원의 구매력은 오늘날 8만~10만원에 상응한다고 봐도 좋으리라. 그렇다면 강택진이 기부한 농지 가격 1만원은 오늘날 대략 8억~10억원에 해당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
도대체 왜 이런 행위를 했을까? 무슨 의도를 갖고 그처럼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했을까? 그의 내면 의식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농지 공여와 함께 풍기소작조합에 제출한 감상문이 남아 있다. ‘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고백하노라’라는 글이 그것이다.
한자어 비중이 높은 국한문 혼용체 문장이다. 전통적인 한학 교육을 오랫동안 이수한 사람임을 짐작게 한다. 그와 더불어 서구적 교양도 갖추고 있다. 개성, 인류, 개조, 양심, 진리 등과 같은 근대적 개념어를 구사하고,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혁명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프랑스 극작가 라신, 러시아 작가 고리키, 혁명가 레닌의 말을 종횡으로 인용하면서 자신의 논리를 펴고 있다. 신구학문의 소양을 균형 있게 갖춘 지식층의 면모가 뚜렷하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현 사회를 개조하고 전 인류의 예술적 평화를 표현코자 고심하는 자’라고 표현했다. 사회주의자를 자임하는 은유적 표현이었다. 그는 자기 행동의 동기를 “남의 노동력 성과물로 밥 먹고 옷 입지 말라”는 말로 설명했다. 타인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착취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죄악이며, 토지소유권은 그 조건이 된다고 봤다.
강택진의 토지소유권 포기 선언은 조선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제1의 여론 영향력이 있던 조선어 신문 ‘동아일보’는 1면 사설을 통해 이 사안을 다뤘다. ‘강택진씨의 토지 포기’가 갖는 의미를 대문짝만하게 소개했다. 그뿐인가. 그의 기고문을 원문 그대로 신문 지면에 게재했다.
강택진은 유명해졌다. 유명 인사들의 동정을 소개하는 ‘소식’란에 강택진의 이름이 실리기 시작했고, 그의 이름 앞에는 으레 “자기 소유 토지를 무산자에게 나누어준” 사람이라는 소개말이 달리곤 했다. 그의 동태는 언론 보도의 대상이 됐다. 서울로 거처를 옮긴 강택진이 동십자각 앞 중학동에서 남의 집 문간방에 월세를 들었다는 사실도 신문에 실렸다.
1923년 6월 말, 날씨가 더워지자 강택진은 아이스크림 행상에 나섰다. 리어카에 아이스크림 통을 싣고,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모습이 즉각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제 등골에 땀 흘리지 않고 남의 힘으로 만든 것만 빨아먹는 생활이 양심에 부끄럽다 하여, 자기 소유의 전답을 소작인에게 기부하고 맨손으로 나선 강택진씨”라고 쓰여 있다.5
그가 ‘아이스크림!’을 소리 높여 외치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커다랗게 사진까지 실렸다. 두 남성이 아이스크림 통을 가운데 놓고 사진기를 바라보고 있다. 오른쪽에 서 있는, 콧수염 기른 사람이 강택진이다. 어느 공원 포플러나무 그늘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진설명이 달려 있다. 그는 스타가 된 셈이었다.
아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부인 김현제(金賢濟)는 남편의 뜻에 기꺼이 동의했다고 한다. 그는 각성한 여성이었다. 어린 자식들에게도 반말을 쓰지 않았다. ‘하시오’라는 올림말로 대했다고 한다. 그는 직접 사회활동에 나선 독립적인 여성이었다. 여성에게도 신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해, ‘조선여자강습원’이라는 여성 교육기관 설립에 힘을 쏟았다. 이미 결혼한 구식 가정부인을 수용해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6 그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 여성단체 ‘여성동우회’ ‘경성여성해방동맹’ 활동에 참여했다.
알고 보면 강택진은 깜짝 놀랄 만한 전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열렬한 항일투사였다. 25살 나던 해에 독립운동에 참여할 목적으로 국외로 망명한 이였다. 1919년 3·1운동으로 전 조선이 혁명적 열기로 뒤덮이자, 국내로 되돌아와 ‘조선13도총간부’라는 비밀결사 결성에 참여했고, 그 집행부의 일원이 됐다. 이 단체는 중앙에 8개의 부서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도, 군, 면, 리에 이르기까지 지부를 조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7 일제 통치기구를 대체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자 했다. 강택진은 8개 중앙부서의 하나인 교섭부장직을 맡았다.
그는 애국금 모금 운동에도 직접 나섰다. 고향인 경상북도 영주군 일원을 중심으로 부호들을 상대로 하여 독립운동자금 염출에 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1921년 3월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복역 중 건강을 잃었다. 워낙 위중했기 때문에 형기를 채우기 전인 1922년 5월17일에 가출옥이 허용됐다. 망명, 비밀결사, 군자금 모금, 체포, 고문, 형무소 수감, 가출옥! 1917년부터 1922년까지 청년 강택진이 나이 20대 후반에 겪은 일들이었다. 그의 내면에 피억압 민족의 해방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잠재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토지소유권을 포기한 뒤 강택진은 열렬한 사회주의자의 길로 나섰다. 먼저 합법 공개 영역의 사회단체 활동에 그의 이름이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토지소유권 포기를 선언한 다음달, 1923년 5월에 벌써 노동운동 단체 ‘노동사’ 창립에 참여했고, 6월에는 민중 계몽기관 ‘서울강좌’의 강연회에 ‘농촌운동이 급선무’라는 제목으로 연단에 섰다. 9월에는 전국적 범위의 노동자·농민 통합기구인 ‘조선노농대회’ 준비회 임원으로 활동했고, 그를 불온하다고 본 일본 경찰에 10월 한 달 동안 구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의 방해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1924년 4월 전국 규모의 노동자·농민 통합단체인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에 성공했고, 10명의 상무위원 중 한 사람으로 선임됐다.
강택진은 비밀 지하운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그의 본심은 비합법, 비공개 영역에 놓여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23년 2월에 이미 ‘고려공산동맹’이라는 명칭의 사회주의 비밀결사에 가담해 중앙위원에 선임됐다. 세칭 ‘서울파’라 불리던 공산주의 그룹이었다. 지하운동의 지도자적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것은 ‘13인회’ 활동이었다. 13인회란 ‘조선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라는 정식 명칭에서 드러나듯이 통일된 공산당 창립을 목표로 만들어진, 공산주의 그룹들의 협의 기구였다. 강택진은 고려공산동맹을 대표하여 이 기구에 출석한 세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합법, 비합법 두 공간을 넘나들며 쉼 없이 활동하는 강택진은 일본 경찰에는 여간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강택진은 경찰서 유치장을 드나들어야만 했다. 1925년 1월, 경북 지역에 도 단위 합법 사회운동 단체를 설립하려다 예천경찰서에 구금됐다. 머지않아 풀려났지만 그해 2월에 또다시 경북 상주경찰서 경찰에 체포당했다. 비교적 사소한 문제였다. 잘못 보도된 신문 기사의 정정을 요구했다는 이유였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무사하지 못했다. 협박을 가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됐으며, 징역 8개월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두 번째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한 게 1926년 2월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건강을 잃었다. 고향 마을인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 노인들의 말에 따르면, 감옥에서 석방될 당시 강택진은 손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한다. 수개월에 걸쳐 요양했음에도 그의 건강은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1926년 10월24일 숨을 거뒀다. 향년 35였다.
강택진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각각 13살, 9살이었다.8 소년기에 접어든 두 어린이는 아버지 없이 자라야만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재산도 없었다.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넓은 농지는 아버지가 이미 소유권을 소작조합에 넘기지 않았던가. 35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강택진의 삶도 그렇지만, 아버지도 재산도 없이 성장해야 했을 어린 두 아이의 미래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명예교수·‘독립운동 열전’ 저자
*임경석의 역사극장: 한국 사회주의 운동사의 권위자인 저자가 한국 근현대사 사료를 토대로 지배자와 저항자의 희비극적 서사를 풀어내는 칼럼입니다.
1. ‘토지를 포기하여 작인에게 일임한 지주의 각성’, 동아일보 1923년 4월26일, 7면.
2. 1과 같음
3. 강택진, ‘지주권을 포기하고 소작인 제군에게 告白하노라’, 동아일보 1923년 4월26일, 5면.
4. ‘실행과 인격, 眞人의 행로’, 동아일보 1923년 7월27일, 1면.
5. ‘아이스크림’, 동아일보 1923년 6월26일, 3면.
6. ‘조선여자강습원’, 조선일보 1924년 1월18일, 3면.
7. 조선13도총간부, ‘8부·지방행정기구 설치에 관한 성명서’, 1919년 11월1일, 이화장소장우남이승만문서, 동문편 4권, 1998년, 30쪽.
8. 김일수, ‘무소유를 실천한 참사람, 사회운동가 강택진’, 내일을여는역사 제22호, 2005년, 1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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