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턴은 영국 잉글랜드 북부 랭커셔주의 작은 도시이다. 끔찍한 사회경제적 조건으로 영국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자살 공화국 ’으로 낙인찍혔던 도시다. 그런데 2010년대 중반 이후 반전이 나타났다. 2018년에는 영국 최대 회계 법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가 ‘영국에서 가장 크게 개발된 도시 ’로 런던보다 살기 좋은 곳이라 평가했다. 지난번 제러미 코빈 대표가 이끌었던 영국 총선에서는 노동당이 제시한 지역 경제 활성화 전략의 대표적 모범 사례로 제시됐다. 오늘날에도 이곳의 경제 회생 모델은 ‘프레스턴 모델 ’로 이름이 붙어 다른 곳으로 확산하고 있다. 어떤 일이 있었길래 이런 반전이 가능했을까?
‘프레스턴 모델 ’을 이해하려면 영국 맨체스터 그리고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라는 다른 도시에서 있었던 일을 배경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다. 맨체스터는 리처드 아크라이트가 방적기를 발명했던 산업혁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서 오랫동안 산업도시 위치를 유지하다가 20세기 말 탈산업화의 직격탄을 맞아 공장이 빠져나가고 경제가 붕괴하는 일이 벌어졌다. 클리블랜드 또한 19세기 말부터 오랫동안 산업 중심으로 번성하던 도시였지만, 마찬가지로 탈산업화로 도심 지역의 황폐화를 맞았고 백인 중산층은 거의 교외로 빠져나가버렸다. 도심 한복판에는 클리블랜드대학과 종합병원 같은 예전 번영기의 유산인 큰 기관들이 있었지만, 그 주위를 둘러싼 지역은 주로 흑인이 거주하는, 만성적 실업과 범죄와 마약에 시달리는 살기 힘든 지역이 됐다.
이 슬럼화된 지역의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나온 중요한 아이디어가 ‘닻 기관’(Anchor Institution)이었다. 피폐화된 지역 경제를 살리는 데 중요한 문제의 하나는 돈이 주입되도록 하고, 또 일단 주입된 돈은 최대한 지역에서 오래 머물며 작은 업체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다. 이에 사람들은 지리적으로 이 장소에 ‘닻’을 내리고 운영될 수밖에 없는 대학과 병원 등 큰 기관에 눈을 돌렸다. 이 기관들이 연간 지출하는 예산은 대단히 크지만, 그 대부분은 인근 지역과 전혀 상관없는 외부 업체로 지출됐다. 이 돈의 일부라도 지역으로 돌 수 있게 한다면 마른땅에 단비 같은 효과를 거둘 것이다.
지역과 외부의 혁신가들이 힘을 모아 먼저 대형병원들을 설득했다. 병원에서 대량으로 나오는 세탁물은 그때까지 프랑스의 한 다국적기업이 처리했지만, 인근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한 세탁 협동조합에 그 사업을 맡기도록 안배했다. 이로써 에버그린협동조합 사업이 시작됐고, 이 사업이 번창하면서 태양광 등 다른 영역들로 사업을 확장해 지금은 ‘에버그린’ 이름으로 세 개의 지역 협동조합이 활동하면서 지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2009년에서 2012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지역에서 돈이 돌도록 하여 경제를 살린다는 문제의식은 같지만 다른 방향에서 중요한 혁신이 있었다. 맨체스터시는 2010년대 초부터 시의 조달사업 지출에서 맨체스터시의 사업체들에 우선권을 주는 방향을 채택한다. 그리하여 2017년 맨체스터 내에 자리를 두거나 지부를 둔 사업체에 대한 지출이 무려 22.1% 증가하면서 도시 경제를 살려내는 큰 활력이 된다. 물론 이런 공공 재원 지출 방향 변화는 여러 논란을 낳을 수 있는 민감한 문제이다. 하지만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공정성을 기하는 데 지역경제전략센터(CLES·Center for Local Economic Strategies) 같은 민간단체 네트워크와의 협력이 큰 역할을 했다.
프레스턴 시의회가 취한 전략은 이 두 도시의 모델을 성공적으로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핵심은 ‘공동체 재산(Community Wealth) 형성’으로 일단 집약된다. 클리블랜드 모델에서 볼 수 있는 ‘닻 기관’의 활용과 맨체스터 사례에서 볼 수 있는 시정부의 적극적 개입을 결합하는 것을 한편으로 하여 자원을 융통하고, 여기에 소유권과 노동조건 등의 민주화를 지향하는 풀뿌리로부터의 사업체를 양성해 결합하고, 그 성과물을 마을은행 등 지역 금융기관으로 집중시키는 양상이다.
먼저 시의회의 지원에 센트럴랭커스터대학이 힘을 합쳐 ‘프레스턴 협동조합 개발 네트워크’를 만들어내면서 사업을 시작했고, 2012년에는 프레스턴시가 생활임금을 지급하는 고용주 역할을 하기로 한다. 일이 진행되면서 지역 혁신가들은 지역경제전략센터와 힘을 합해 ‘닻 기관’을 대거 설득해 지출 방향을 지역으로 돌리도록 한다. 지역경제전략센터와 프레스턴 시의회는 2012~2013년 ‘닻 기관’의 지출이 무려 10억파운드에 이른다는 사실과, 그중 지역에서 지출되는 것이 5%에 그침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시의회는 공공주택관리청, 센트럴랭커스터대학, 지역 경찰서 등 6개의 지도적 ‘닻 기관’과 회합했고, 이 기관들에 프레스턴에 기반을 둔 농업, 인쇄, 건설 등의 업체에서 더 많이 구매해달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2016~2017년에는 그 전 5% 수치가 18%까지 올라갔고, 증가액은 무려 7500만파운드에 달했다. 프레스턴이 있는 랭커셔주 전체에 걸쳐 ‘닻 기관’의 지출은 39%에서 79%로 늘었고 증가액은 2억파운드였다. 이 변화로 일자리가 4500개 생겨났다. 2016~2017년 프레스턴에서 임금이 생활임금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일자리는 23%에서 19%로 줄어들었다. 실업률은 2014년의 6.5%에서 3.1%로 내려갔다.
하지만 프레스턴 모델의 중요성을 이러한 ‘닻 기관’을 통한 ‘자원 융통’의 아이디어로만 보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 이상의 중요성은 사업체들의 민주적 경영과 ‘마을자산’ 축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나온 클리블랜드 모델로 되돌아가보자. ‘닻 기관’들이 선뜻 사업 취지에 응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는 에버그린협동조합이 노동자 소유 업체였다는 데 있다. 즉 소유권과 노동조건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기에, 자원 배분이 소수 사업자에게만 돌아가지 않고 지역 주민에게 최대한 널리 미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프레스턴 모델에서도 소유권과 노동조건, 생태적 규범 등에서 마을 주민과 자연환경을 최대한 널리 살찌우는 사업체 양성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중요한 매개가 되는 것은 마을은행 같은 특화된 금융조직이다. 프레스턴에서 만들어진 에이번상호신용금고(Avon Mutual)는 ‘지역·사람·사회·자연’을 우선적인 임무로 삼아 여기에 기여하는 업체들에는 일반 은행과는 전혀 다른 조건의 대출을 제공해 육성하게 돼 있다. 이런 특화된 금융기관이 활동하면 더 많은 ‘닻 기관’이 안심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중요한 기능도 나타난다. 이렇게 해서 지역 안에 자원이 순환하면서 창조된 부는 다시 마을은행에 쌓인다. 또한 도시는 일반 금융기관과 다른 원칙으로 행동하는 금융기관, 즉 ‘마을자산’을 가지게 된다.
하나 주의할 것이 있다. 혹자는 프레스턴 모델을 두고, 지방정부와 대형 기관을 둘러싼 소수 네트워크가 특혜를 받는 ‘정실주의’가 아닌가, 설령 지역 전체가 혜택을 보더라도 일종의 ‘보호주의’가 아닌가 의혹을 갖기도 한다. 나도 지방정부까지 나서서 대형 기관들과 사업 수주에 편향을 갖는 것이 혹시 자유무역협정 등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지 개인적으로 프레스턴의 활동가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돌아온 답변은 명쾌했다. “저희의 모든 사업체는 개방된 똑같은 조건으로 입찰에 응하여 다른 업체들과 경쟁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지역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는 혁신에 힘을 기울입니다.”
프레스턴 모델, 그리고 그 시발점의 하나가 됐던 클리블랜드 모델은 이렇게 그 아래에 혁신, 소유권과 노동조건의 민주화, 인간과 자연과 사회의 우선성 등 ‘민주적 경제’의 여러 원리와 정신을 깔고 있다.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이에 대한 더 많은 설명은 마저리 켈리 외 지음, 홍기빈 옮김, <모두를 위한 경제: 클리블랜드-프레스턴 모델 설명서>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인터넷카페 ‘홍기빈의 어나더 경제학과’에서는 2023년 6월 중순 온라인 강좌를 열 예정이다.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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