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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조달은 가격보다는 사회·환경·윤리적 가치를 기준으로 삼는 새로운 조달 방식으로, 프레스턴 시의회는 2013년 영국 중앙정부가 제정한 사회적가치법과 2014년 개정된 유럽연합(EU) 조달법을 근거 삼아 이를 추진했다. 프레스턴시 조달 매니저인 앤드루 라이드할은 “진보적 조달 원칙에 따라 프레스턴시에 상품과 서비스를 공급하거나 시가 시행하는 사업에 입찰하려는 기업들은 지역 주민을 고용하고 생활임금을 지급하며 기술훈련 계획을 마련하는 등의 고용·임금 조건과 함께 환경과 지속가능성, 평등과 다양성 등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이윤추구 중심의 대기업보다는 지역에서 신뢰받는 중소기업이나 협동조합, 비영리단체 등의 입찰 참여가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규모 조달을 작게 쪼개고 복잡한 입찰 방식을 간소화한 것도 지역의 소규모 농가와 더 작은 기업들이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현재 시의회를 비롯해 ‘진보적 조달’에 참여하는 프레스턴의 닻 기관은 랭커셔교육병원, 랭커셔주경찰청, 게이트웨이주택협회, 센트럴랭커셔대학, 프레스턴대학, 카디널뉴먼대학, 랭커셔주의회 등 8곳에 이른다. 이러한 참여에 힘입어 첫 지출 분석 이후 5년 만인 2017년 CLES가 실시한 닻 기관들의 프레스턴 내 구매 비중은 이전의 5%에서 18.2%로, 랭커셔주 내 구매는 79.2%로 껑충 뛰었다.
기존 지역 기업들만으로는 공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프레스턴 시의회는 지역에 다양한 노동자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센트럴랭커셔대학에 관련 연구기금을 지원했다. 센트럴랭커셔대학은 이 기금을 연구뿐 아니라 초기 협동조합 설립과 교육에 투자했고 이를 씨앗으로 현재 케이터링협동조합, 요가웰빙협동조합, 디지털협동조합, 주택개량협동조합 등 10여 곳의 협동조합이 설립돼 운영 중이다. 2017년에는 협동조합의 설립과 성장을 지원하는 협동조합인 프레스턴협동조합개발네트워크(PCDN)도 출범했다. PCDN의 창립자인 개러스 내시는 “운영 중인 협동조합들의 이익 일부를 낙후된 지역을 비롯해 다양한 신생 협동조합을 개발하고 지원하는 데 재투자하는 선순환구조를 만들 계획”이라고 했다. 여기에 최근 문을 연 프레스턴협동조합교육센터(PCEC)는 학생과 지역 주민들이 모여 협동조합의 철학과 가치, 의미와 발전 방향을 논의하는 학습과 교류의 장이 될 것이다.
PCEC 설립을 주도한 줄리언 맨리 센트럴랭커셔대학 교수는 “프레스턴 모델은 사람과 사람을 잇는 것이고, 경제를 넘어 문화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닻 기관으로 참여한 센트럴랭커셔대학이 국외 분교 건립 계획을 취소하는 대신 지역에 협동조합 교육기관을 설립한 것, 팬데믹 시기 랭커셔교육병원이 실업 위기에 처한 접객업 종사자들을 교육해 보건·돌봄 분야에 고용한 것은 닻 기관이 진보적 조달 이상의 역할을 스스로 찾아낸 사례”라는 점을 들며 “공동체 구성원이 닻 기관이나 협동조합에 참여하면서 협력과 상생을 경험하고 모두가 좋은 삶을 누리는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프레스턴 모델의 지향점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치에 국한되지 않은 도시의 변화는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얼마 전 벤 바 리버풀대학 응용공중보건학과 교수는 영국에서 프레스턴과 규모가 비슷한 도시와의 비교연구를 통해 프레스턴 모델이 시작되고 2년 뒤인 2015년부터 프레스턴 주민의 삶의 만족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꾸준히 높아졌으며 2019년까지 9%포인트 상승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2018년 총 48개 의석 가운데 전통적인 보수당 우세 지역 두 곳을 포함한 30개 의석을 매슈 브라운 의장이 이끄는 노동당에 몰아주며 프레스턴 모델 추진에 힘을 실어준 프레스턴 시민은, 2023년 5월4일 선거에서 무려 31석의 압도적 승리를 노동당에 선사했다. 덕분에 팬데믹 이후 시의회가 제시한 ‘프레스턴 모델 2.0’ 계획이 한층 탄력받을 것으로 보인다. 브라운 의장은 “저소득층 주민의 금융 접근성을 높이고 지역 협동조합의 설립과 성장을 안정적으로 견인할 공동체 은행(북서부공동체협동조합상호은행) 설립과 사회주택 건설, 시가 직영하는 복합문화공간 건립 등 팬데믹 이전부터 준비해온 일을 진행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프레스턴 모델은 국내에서 보기 드문 획기적 시도는 아니다. 함께 프레스턴을 방문한 류경기 서울 중랑구청장은 “상당수가 지역순환경제나 사회적경제 등의 이름으로 국내 지방정부들이 이미 해봤거나 시도 중인 사업”이라면서도 “사업을 추진하면서 관련 데이터를 축적하고 성과를 측정하고 연구하는 일을 병행해나가는 점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조선업 쇠퇴로 지역경제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프레스턴을 방문한 김종훈 울산 동구청장은 “지역 기업들의 공공조달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은 우리 지자체도 대부분 검토해본 적이 있을 것”이라며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한계가 있고 상위법이 개정돼야 한다”고 말했다.(상자기사 참조) 임주환 희망제작소 소장은 프레스턴 모델을 “2000년을 전후해 나타난 영국 사회혁신 운동의 계보를 잇는 진화 버전”이라 풀이하면서 “사회혁신이 한국 사회에 맞게 변주되며 변화의 물꼬를 텄듯 프레스턴 모델 또한 청년인구 감소와 지방소멸 등의 위기를 맞은 한국 사회에 의미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레스턴(영국)=이미경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nanazaraza@makehope.org2023년 5월15일 열린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경제재정소위원회에서는 여야 대치가 이어졌다. 쟁점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경제기본법’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사회적기업·협동조합·소셜벤처 등 다양한 사회적경제 조직을 포괄하는 법적 토대를 마련하는 법안의 처리를 주장한 반면, 국민의힘은 이를 진보 진영을 위한 법안으로 규정하며 반대한다. 2014년 첫 발의부터 9년째다.
여기서 화두는 ‘공공조달’과 관련한 내용이다. 발의안에 따라 내용 차이는 있지만 민주당 김영배 의원 발의안을 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가 사회적경제 기업이 생산하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구매 촉진과 판로 확대를 위해 필요한 지원과 시책을 추진’하도록 하고, ‘총구매액의 100분의 5 범위에서 사회적기업·협동조합 등이 생산하는 재화나 용역을 구매’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야권 성향 단체를 지원하기 위한 법안이 아니냐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회적경제 조직체를 정파적 이해관계로만 바라볼 문제는 아니다. 사회적기업은 ‘사회적 목적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면서 재화서비스의 생산·판매 등 영업활동을 수행하는 기업’이다. 영리기업과 비영리기업의 중간 형태로, 취약계층에 일자리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대표적이다. 이런 기업은 ‘최저가’가 최우선이 되는 시장에서는 유리한 입지에 서기 힘들기에, 공공조달 시장에서 자생적 수익 기반을 만들 수 있도록 초기 지원이 필요하다.
실생활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경제 조직체의 모습은 다양하다. 일자리가 사라져 소멸해가는 지방에서 청년·노인이 직접 사회적기업·협동조합을 만들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례가 있는가 하면, 대기업이 취약계층을 돕기 위해 직접 사회적기업 설립에 동참하는 경우도 있다. 진보 진영에서만 나온 이야기도 아니다. 가령 유승민 전 국민의힘 의원은 “여야가 정파적 이해관계를 떠나 사회적경제기본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며 19대와 20대 국회에서 사회적경제기본법을 발의했다.
우리보다 먼저 저성장·고령화·빈부격차·지방소멸 등을 겪은 선진국들은 이 문제를 오랫동안 논의해왔다. 영국에서는 2013년 사회적가치법(Social Value Act)이 만들어졌고, 유엔은 2023년 4월18일 만장일치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사회연대경제 활성화” 결의안을 채택했다. 경제활동 과정에서 이윤 극대화보다 사회적 가치 실현, 공동체 구성원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하자는 데 취지가 있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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