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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28일 영국 프레스턴의 레이턴스트리트에는 캠핑카와 조립식주택들 사이로 아이들의 천진한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5월4일 영국 지방선거를 앞두고 막바지 선거운동이 한창이던 때 프레스턴 시의회의 매슈 브라운 의장은 꼬박 하루를 내어 프레스턴 모델을 보기 위해 간 한국의 6개 도시 지방자치단체 단체장과 희망제작소 연구원들에게 ‘프레스턴 모델’을 소개했다. 마지막 방문지인 이곳은 지난 10년간 프레스턴이 무얼 하려 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30여 년간 레이턴스트리트에서 캠핑카나 무허가주택에 살던 주민 65명은 2022년 토지소유권을 가진 랭커셔주가 토지 매매를 결정해 내쫓길 위험에 처했다. 프레스턴 시의회는 토지를 매입해 저가(가구당 월 50만원 선)에 장기임대했다. 프레스턴협동조합개발네트워크(PCDN)의 지원 아래 이곳을 관리·운영하는 주민 협동조합도 만들어졌다. 레이턴스트리트협동조합의 존 개빈 위원장은 “최근 무허가·이동식주택 거주자 글로벌 지원기금인 트래블러사이트펀드가 투자해줘 주민들의 에너지요금과 조합 운영비를 충당하게 됐다”며 “이민자와 집 없는 주민들이 아이를 키우며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지역 자산을 공동체가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관리하며 협동조합을 장려함으로써 모두를 위한 지역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브라운 의장이 10년 전 ‘프레스턴 모델’을 처음 제안하며 꿈꾼 일이자, 그가 선거운동을 뒤로한 채 자랑하고 싶을 만큼 진전된 성과다.
2013년 시작된 프레스턴의 실험은 도시에 눈에 띄는 변화를 가져왔고, 변화에 대한 소문은 국경을 넘었다. 2023년에는 노르웨이, 독일, 프랑스, 한국의 지방정부 관계자들이 잇따라 프레스턴을 방문했다. 코로나19 대유행 시기 ‘로컬’(지역) 중심 공급망 재편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대안적 지역경제 모델로서 ‘프레스턴 모델’의 몸값이 높아졌다. 팬데믹 기간에 발이 묶였던 이들은 저마다 질문을 한가득 품고 잉글랜드 북서부 랭커셔주의 주도인 인구 14만의 도시 프레스턴을 찾는다.
산업혁명 시기부터 제조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프레스턴은 영국 제조업이 무너지던 1960년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2012년까지만 해도 프레스턴은 영국에서 경제적으로 낙후한 도시 하위 20%에 들고 아동빈곤율과 자살률이 높은 도시 중 하나였다. 처음엔 다른 도시들과 같은 해법을 썼다. 대규모 외부 자본을 유치하기다. 1990년대 초 글로벌 개발업체 두 곳이 1조원대의 투자금을 모아 복합쇼핑센터를 짓는 ‘타이드반 프로젝트’가 구명줄이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투자자들이 발을 빼면서 휘청거렸고, 2011년 프레스턴 시의회는 프로젝트 중단을 공식 선언했다. 당시 시의원이었던 브라운 의장은 “온 도시가 좌절과 절망에 휩싸였다”고 회고한다. “그 일을 계기로 일부 시의원과 관료 등을 중심으로 ‘더 이상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자원과 역량을 활용해 스스로를 구하자’는 생각이 굳어졌다.” 프레스턴 모델의 시작이었다.
프레스턴 모델은 ‘공동체 자산 구축’(Community Wealth Building)을 기본으로 한다. 물이 가득한 욕조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필립 B. 와이먼 센트럴랭커셔대학 경제학과 교수는 “욕조 안에 물을 꾸준히 투입하면서 누수되는 물의 양을 최대한 줄이면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공동체 자산 구축이다. 비영리단체인 지역경제전략센터(CLES)의 세라 롱랜즈 디렉터는 공동체 자산 구축이 “지역의 부가 일자리, 소유권, 토지와 자산 등을 통해 지역 공동체로 재이동하도록 설계함으로써 건강한 지역경제와 주민들의 좋은 삶을 만드는 것”이라고 풀었다. 두 사람이 각기 몸담은 센트럴랭커셔대학과 CLES는 초창기 프레스턴 시의회가 “스스로를 구하는 전략”을 모색할 때부터 함께했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스페인 몬드라곤과 미국 클리블랜드 사례다.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작은 도시 몬드라곤에선 지난 50년간 제조업부터 금융, 정보기술(IT)에 이르는 다양한 종업원 소유 협동조합이 생겨나 지속가능한 지역경제 생태계를 만들어냈다. 클리블랜드에선 2005년부터 비영리단체 ‘협력하는 민주주의’의 주도로, 낙후된 지역 주민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지역의 ‘닻 기관’(지방정부·대학·병원 등 지역에 닻을 내린, 고용과 구매 규모가 큰 공적 조직으로 ‘앵커기관’이라고도 한다)에 상품과 서비스를 공급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공동체 자산 구축’으로 불평등이 크게 완화되고 지역경제에 활력이 생겼다.
프레스턴이 몬드라곤이나 클리블랜드 사례와 다른 점은 공동체 자산 구축을 지방정부(시의회)가 주도해 좀더 폭넓고 장기적인 전략이 수립되고, 여기에 지역의 다양한 경제주체가 참여하고 협력하는 형태로 추진됐다는 점이다. 프레스턴 시의회는 우선 지역에서 얼마큼의 돈이 밖으로 새나가는지 따져봤다. 2013년 CLES는 지역 주요 닻 기관의 지출을 분석해 발표했는데, 당시 닻 기관들이 프레스턴에서 필요한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조달)한 비율은 전체의 5%(3830만파운드, 약 650억원)였고, 랭커셔주로 범위를 넓혀도 39%(2억8천만파운드, 약 4500억원)에 그쳤다. 나머지는 지역을 빠져나가 다국적기업과 대기업으로 흘러들었다. 브라운 의장은 “우리는 기관들의 지역(랭커셔주) 내 구매력이 연간 10억파운드(약 1조6천억원)가량 될 것으로 보고, 시의회를 비롯한 닻 기관들의 지역 내 구매를 확대하기 위한 ‘진보적 조달’ 전략을 세웠다”고 말했다.
프레스턴(영국)=이미경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nanazaraza@makehope.org프레스턴의 주택문제 해결
무주택자 거주지 ‘레이턴스트리트 트래블러 사이트’뿐만 아니라 프레스턴에서는 주택 문제도 ‘공동체 자산 구축’ 방식으로 풀어가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영국도 높은 주택가격과 열악한 주거환경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꼽힌다. 매슈 브라운 프레스턴 시의회 의장이 안내한 두 곳을 더 소개한다.
1. 국유지 이용한 적정주택 ‘더턴그레인지’
프레스턴 도심에서 차를 타고 서쪽으로 30분가량 달리면 아늑한 안뜰이 딸린 2층 단독주택 단지인 ‘더턴그레인지’가 나온다. 국유지(영국 정부기관인 홈스잉글랜드 소유)에 민간기업이 집을 지어 임대·분양하는 것인데, 랭커셔주에 기반을 둔 라우러스홈스가 사업자로 선정됐다. 브라운 의장은 “라우러스홈스는 영리기업임에도 사회주택 건설 등 지역 프로젝트에 꾸준히 기부해온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아 사업자로 선정됐다”고 말했다. 프레스턴시는 대규모 주택개발 사업을 시행할 때 개발업체가 전체 주택 가운데 최소 30% 이상을 ‘적정주택’(중위소득 이하의 주민이 저렴한 가격에 사거나 임대할 수 있는 주택)으로 공급하도록 하는데, 라우러스홈스는 현재 짓는 단독주택 248채 중 50%를 비영리단체인 엘앤큐(L&Q)를 통해 매매가의 80% 선에서 매매 또는 임대하고 나머지 절반을 일반분양할 계획이다. 벤 타운센드 L&Q 이사는 “적정주택의 경우 소득수준과 자녀 수 등을 고려해 입주자를 최종 선정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2. 즐거운 공동체 만드는 사회주택 ‘코트야즈’
2005년 출범한 커뮤니티게이트웨이협회(CGA)는 프레스턴 내에 6천여 채의 사회주택을 소유한 비영리 주택협회이자 프레스턴 모델 초기부터 함께한 앵커기관이다. 주택을 신축하거나 기존 주택을 매입해 리모델링해 저가에 임대하는 일 외에 자투리 공간에 녹지를 조성하거나 취약계층 세입자를 위해 식품·가전·정신건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청소년과 실직자를 위한 건축기술 교육도 한다. 리 게리 CGA 매니저는 이 모든 활동이 “누구나 살고 싶은 집, 살기 좋은 공동체를 만든다는 CGA의 미션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55살 이상 주민을 위한 아파트 ‘코트야즈’에 널찍한 안마당과 커뮤니티 공간, 공용식당을 마련한 것 역시 “입주자가 한 사람도 고립되지 않고 즐거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총 60동 아파트에는 1인가구를 위한 원룸과 가족을 위한 투룸이 있고, 1층과 공용식당은 이웃 주민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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