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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따라다녔다

[영국] 스토킹 신고했지만 살해된 여성 계기로 2019년 스토킹 보호법 제정, 아는 사람에게 살해 92%, 헤어진 뒤 1년 안에 살해 89%
등록 2021-12-20 00:07 수정 2021-12-23 10:53
2021년 3월 영국 런던에서 현직 경찰관 웨인 쿠전스가 납치·살해한 여성 세라 에버러드를 추모하는 런던 시민들. 에버러드는 친구 집에서 귀가하던 중 실종돼 주검으로 발견됐다. 연합뉴스 AP

2021년 3월 영국 런던에서 현직 경찰관 웨인 쿠전스가 납치·살해한 여성 세라 에버러드를 추모하는 런던 시민들. 에버러드는 친구 집에서 귀가하던 중 실종돼 주검으로 발견됐다. 연합뉴스 AP

1425명. 2009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영국에서 스토킹, 가정폭력 등으로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의 수다. 영국에서는 2016년 발생한 러글스 살해 사건 이후 스토킹 범죄의 심각성이 부각됐다. 2016년 10월, 26살 여성 앨리스 러글스가 헤어진 뒤 스토킹하던 전 남자친구에게 목숨을 잃었고, 가해 남성은 징역 22년형을 선고받았다. 러글스가 살해되기에 앞서 ‘전 남자친구의 행동에 위협을 느낀다’며 경찰에 신고했으나 신고받은 경찰이 어떠한 조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경찰은 가해자를 만나서 조사하거나 스토킹 행위를 강력하게 저지하지 않았다. 경찰의 미흡한 초동 조처가 논란이 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스토킹 의심 범죄가 발생했을 때 경찰의 초기 개입을 허용하는 법안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관련 내용을 담은 스토킹 보호법이 2019년 3월 제정됐다.

연인이거나 아들이거나

남성에게 살해당한 여성 통계를 매년 분석해 발표하는 비영리 단체인 ‘페미사이드 센서스’(Femicide Census)가 2020년 11월 발표한 통계를 보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남성에게 목숨을 잃은 14살 이상 여성은 총 1425명이다. 2015년 출범한 페미사이드 센서스는 정보 공개 청구를 해 얻은 경찰 통계, 경찰에 대한 불만을 조사하는 경찰행동감독위원회 자료, 내무성이 발표하는 가정폭력 살인 보고서 등 다양한 자료를 분석해 페미사이드 통계를 만든다. 영국 수사기관이 발표하는 공식 페미사이드 범죄 통계는 아직 없다.

페미사이드 센서스의 분석 결과, 피해 여성 1425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가해 남성과 부부 또는 연인 관계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해당 기간 전체 페미사이드 사건 중 현재 또는 과거의 연인, 배우자가 가해자인 사건이 62%(888건)로 가장 많았다. 두 번째로 가장 흔한 관계는 가족이나 친척(10%)이다. 피해 여성 111명이 아들에게 살해됐고, 32명은 남성 친척에게 목숨을 잃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살해된 여성은 전체 사건 중 8%였다.

통계는 ‘이별이 살해 동기가 된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과거의 연인이나 배우자에게 살해당한 여성 888명 중 378명(43%)이 이별 이후 또는 헤어지려고 시도하다가 살해됐고, 378명 중 89%인 336명이 헤어진 뒤 1년 안에 목숨을 잃었다.

2019년 3월15일 제정된 영국의 스토킹 보호법은 상대를 병적으로 집요하게 쫓아다니는 스토커를 통제할 수 있는 경찰의 권한을 강화한 것이 핵심이다. 해당 법이 제정되기 전에는 범죄 피해가 발생해야 경찰이 개입할 수 있었다. 이 법이 제정되면서 스토킹 의심 사건에 경찰이 빨리 개입할 수 있어 스토킹이 더 심각한 범죄로 이어지는 걸 막을 길이 열렸다.

임시명령, 한 가지 조건만 충족해도 경찰 개입

스토킹 보호법이 제정된 뒤 2020년 1월부터 스토킹 사건 발생시 경찰의 초기 개입을 허용한 스토킹 보호 명령이 도입됐다. 영국에서 스토킹의 명확한 법적 정의는 없지만, 영국 검찰과 경찰은 ‘상대가 원하지 않는 집착 행동을 지속해서 행하고, 이런 행동이 피해자에게 폭력을 당할 것이라는 위협이나 심각한 피해를 줄 경우’ 스토킹으로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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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 보호 명령의 핵심은 피해자가 과거 스토킹 피해 경험이 없거나 가해자가 스토킹 범죄 혐의를 받은 적이 없더라도 경찰이 적극적으로 사건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찰은 스토킹 보호 명령을 사용하기 전 다음의 3가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가해자가 스토킹하는가 △가해자가 스토킹 피해자를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가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스토킹 보호 명령을 사용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가 이 3가지 기준에 맞으면 법원에 스토킹 보호 명령을 신청할 수 있다.

임시명령도 있다. 스토킹 보호 명령이 최대 2년까지 유효하고 3가지 조건에 부합할 때만 사용할 수 있는 완전한 명령이라면, 임시명령은 지속 기간은 짧지만 ‘스토킹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할 필요가 있을 때’라는 한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돼 경찰이 사건에 더 빨리 개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시명령은 스토킹으로 피해자의 목숨이 위태롭거나 가해자로부터 즉각적인 위험이 있을 때 경찰이 최대한 빨리 개입하기 위해 사용된다.

법원이 보호 명령을 승인하면 스토킹 가해자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라도 피해자에게 접근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 거주지 방문 금지는 물론이고 전화, 우편, 이메일, 문자메시지, 소셜미디어 등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피해자에게 연락해서는 안 되며,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에 피해자를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것까지 금지된다.

영국의 스토킹 피해자 보호 단체들은 상습 스토킹 가해자를 폭력 및 성범죄자 통합정보시스템에 등록해 감시하고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에는 ‘폭력·성범죄자 등록제’(VISOR·Violent and Sex Offender Register)로 알려진 통합정보시스템이 있다. VISOR는 성범죄자는 물론 테러범과 같이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정보가 다 들어 있는 데이터베이스로, 관할구역과 상관없이 모든 수사기관과 보호관찰기관이 정보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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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보호단체 “상습 스토커도 포함해야”

피해자 보호 단체들은 VISOR에 상습 스토커를 포함해 함께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관련 내용을 담은 가정폭력법 개정안이 발의됐으나, 2021년 4월 보수당 의원들의 반대로 하원에서 부결됐다. 영국 정부는 법 개정 없이 현행 제도를 활용해 스토커를 감시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피해자 보호 단체들은 스토킹을 심각한 범죄로 인정하고 스토커 등록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앞으로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황수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영국 통신원(브리스틀대학교 공공정책 석사)

*폭력적인 배우자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은 어떤 선택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한겨레21>의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특별 웹페이지(stop-femicide.hani.co.kr)에 접속해 확인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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