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통령 윤석열과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총리가 2023년 3월16일 일본 도쿄에서 정상회담을 열었다. 대통령실 제공
“한국 분이신가요?”
적막을 깨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10년이 넘는 도쿄살이 동안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층 가시나요?” “실례합니다” 외에 다른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아… 네.”
말끝을 흐리며 머리를 도로록 굴렸다. 내가 뭘 실수했나? 혹시 저 사람 혐한인가? 몇 초 동안 오만 가지 생각이 피어올랐다. 말 한마디에 위축되고 소심해지는 건 외국인의 심장에 새겨진 본능 같은 거다.
“제가 요즘 한국어를 배우거든요. 아까 한국말을 하시길래 반가워서요.”
“어머나 그러시군요!”
활짝 미소를 지었지만 머릿속은 아까보다 더 복잡해졌다. 일본 제일의 새침데기 도쿄 사람이, 한국인이란 이유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고? 그럴 리 없다. 운이 트이면 주변 사람들이 다정해진다는데, 그렇다면 꽉 막힌 수챗구멍 같던 내 운세가 드디어 뻥 뚫린 것인가!
기이한 현상은 다른 곳에서도 이어졌다. 얼마 전 한국에서 가족들이 놀러 와 이곳저곳 돌아다녔다. 커피숍에서도, 식당에서도 우리의 한국어를 들은 일본인들은 살갑게 말을 걸어왔다. 본인도 마침 한국어를 배우고 있노라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요즘처럼 살기 좋은 때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건 전적으로 대통령 윤석열 덕분이다.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일본인이 한국에 호감을 갖는 건 한류 열풍 때문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한류가 이미 거세던 2019년 도쿄는 지금과 천지 차이였다. 2018년 10월 강제징용 일본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한국 대법원 판결로 촉발된 한-일 간의 갈등은 전후 최악이라고 일컬어질 정도였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야마노테선 지하철 안에서 딸아이가 내게 한국말을 했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우리에게 쏟아지던 그 눈빛들을. 일본에서 생활하려면 ‘공기를 잘 읽어야’(분위기를 파악한다는 뜻의 일본어 표현) 하는데, 그때 내가 읽은 공기는 ‘혐오’에 가까웠다. 양국 국민의 감정은 의외로 정치권의 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할 때가 많다.
대통령 윤석열은 파국으로 치닫던 한-일 관계의 방향을 단숨에 틀었다. 2023년 3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갖가지 ‘결단’을 내린 것이 주효했다. 최대 쟁점이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에서 ‘제3자 변제안’을 제시했고, 일본의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의 수출 규제에 대한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취하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의 정상화도 약속했다. 한-일 간 협의에 참여한 일본 외무성 간부는 엔에이치케이(NHK)에 “한국이 이런 해결안을 갖고 오다니. 솔직히 대단하다고, 윤 대통령이 잘 결단했다고 생각했다”는 감상을 전했다. 골치 아픈 사안들을 들이밀며 싫은 소리를 했던 역대 대통령들에 견주면 윤석열은 ‘신인류’나 다름없었을 터다.
그래서일까. 일본에선 윤석열의 탄핵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은근히 존재한다. 일본 언론은 2024년 12월3일 비상계엄이 선포된 이래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움직임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워낙에 엄청난 사안이기도 했지만, 일본에 호의적인 윤 정권이 무너지지 않을까 경계하는 기류도 읽혔다. 노무라종합연구소는 2024년 12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대통령이 바뀌면 한-일 관계가 다시 냉각될 가능성이 있다.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 일본의 연간 국내총생산(GDP)이 0.227% 감소할 것”이라며 경제적 파장도 염려했다.
일반 국민도 윤석열을 응원한다. 일본과 사이좋게 지내준 대통령이기 때문에 지지한다는 것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윤 대통령이 아니면 일본의 우리 모두도 곤란합니다. 윤 대통령으로 남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재명 대표가 정권을 잡으면 다시 반일로 돌아가서 일본 기업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지지율도 50%가 넘는다는데 부정 체포라니. 한국의 법치는 붕괴했네요”라는 글이 올라와 있다. 이달 초 법원의 구속 취소 결정으로 윤석열이 석방됐을 때, “정말 잘됐다”는 반응이 대다수였다.
윤석열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탄핵소추와 내란죄 기소를 당했는지 잘 아는 한국통 지인들조차 “그래도 윤 대통령이 낫다”고 수줍게 고백해온다. 문재인 정부 시절의 한-일 관계를 지켜보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지금의 좋은 분위기를 이어나가고 싶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옛날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면서.
걱정스러운 건 이 ‘윤석열 사랑’의 저류에 한국 일부 극우 유튜버의 선동도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본어로 콘텐츠를 만들어 한국 좌파는 반일, 우파는 친일이라며 우파를 응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좌파 정권의 반일 교육에 세뇌됐던 젊은이들이 윤석열 덕분에 깨어나고 있으니, 이들을 지키자는 것이다. 대표적인 한 채널의 구독자는 71만 명, 다른 채널은 83만 명으로 적지 않은 숫자다.
나는 지금의 이런 분위기가 무섭고 두렵다. 45년 만의 비상계엄으로 한국 사회에 큰 상처를 남긴 대통령 윤석열은 한-일 관계에도 되돌릴 수 없는 하나의 분기점을 만들었다. 이제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어떤 정권이 탄생하든 윤석열 수준의 ‘통 큰 양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과거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윤석열의 빈곤한 철학은 한-일 관계의 ‘뉴노멀’이 돼버렸다. 윤석열 탓에 한-일 간 과거사는 이제 영원히 청산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지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배상, 그것을 바탕으로 양국의 선린 우호 관계를 쌓고자 한 많은 이의 노력은 물거품이 됐다.
특히나 한국인과 어깨를 겯고 함께 싸워온 일본인 활동가들을 떠올리자면 목이 탁 막히고 가슴이 미어진다. 일본 사회의 질시와 고령에도 불구하고 활발하게 활동해오던 이분들의 자리를 윤석열이 없앤 거나 마찬가지다. 이 활동가들을 포함해 일본에서 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사라지고 있다. 태평양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전후세대는 전쟁의 기억도 이웃 나라의 아픔도 깡그리 잊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공허한 말만 되풀이할지도 모른다.
윤석열이 탄핵된다면, 한국의 차기 정부는 그런 일본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윤 정권 이후 한-일 관계가 더욱 격랑에 휩싸일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일본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요즘처럼 살기 좋은 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도쿄(일본)=김민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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