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소 판결이 있기까지) 많은 영혼들이 나를 도왔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55년 만에 처음으로 법원에서 인정된 2023년 2월7일,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배상소송을 낸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63)은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이사에게 이렇게 소감을 말했다고 한다. 법원 판결이 혼자만의 승리가 아니라 모든 희생자의 승리였다는 뜻이다. 법정에는 응우옌티탄만 섰지만, 법정에 오지 않은 수많은 피해자에게도 한국 정부가 속죄할 방법이 있을까.
응우옌티탄의 승소 소식이 알려진 뒤, 다른 피해자들의 추가 소송이 이어질지 언론의 관심이 집중됐다. 응우옌티탄이 살았던 퐁니·퐁녓 마을만 해도 희생자가 74명에 이른다. 그러나 베트남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시민사회단체는 전쟁범죄 피해자들이 제각기 소송에 나서기 어렵고, 국가 대상 소송만이 정답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퐁니 사건처럼 증거가 많은 학살 사건은 이례적이다. 통상 마을을 초토화하고 학살 흔적까지 지우려는 게 학살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구수정 이사의 말이다.
퐁니·퐁녓 사건은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사건 중에서도 증거자료가 특히 많은 사건이다. 생존자 응우옌티탄과 사건 목격자인 삼촌 응우옌득쩌이가 한국을 방문해 총격 전후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했고, 당시 작전을 수행한 참전군인 류진성씨도 학살을 법정에서 증언했다. 학살에 대한 주민들 진술과 사진이 담긴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문화통신청 자료집과 주베트남 미군사령부 감찰보고서도 있다. “다른 사건들도 피해자 진술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퐁니 사건만큼은 아니죠. 이번 승소는 20여 년에 걸친 시민사회의 노력이 축적된 결과물이에요.”(구수정 이사)
전쟁범죄 피해자들이 개별 소송을 내더라도, 반드시 승소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현재 진행 중인 일본 ‘위안부’ 손해배상소송과 강제동원 피해자 손해배상소송이 대표적이다. 법원의 판단은 엇갈린다. ‘위안부’ 소송에선 피해 사실이 같은데도 1심 판결에서 한 사건만 승소하고 다른 사건은 각하됐다. 강제동원 소송은 대법원이 ‘피해자들에게 배상청구권이 있다’고 판단했음에도, 하급심 법원이 소멸시효를 적용해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해 논란이 됐다.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는 “추가 소송전으로 가면 어떤 피해자는 상황에 따라 입증에 실패할 수 있고 어떤 피해자는 아예 소를 제기하지 못할 수도 있다. 똑같은 죽음이 어떤 것은 양민 학살로 인정받고 어떤 것은 그러지 못하는 위계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판결은 ‘한국과 베트남 정부가 이 문제를 직면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이제 체계적인 진상조사로 나아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을 오랫동안 지원해온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 역시 국가 차원의 정확한 진상조사를 한국 ‘속죄’의 출발점으로 제시한다.
현재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은 피해자 규모도 가늠하기 어렵다. 2000년 구수정 이사가 제주인권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80여 건, 희생자는 9천여 명이었다. 그 뒤 한베평화재단이 20년에 걸쳐 발굴한 피해자와 <한겨레21> 현지 취재 보도 등을 더해 2020년 8월 집계한 사건은 130여 건, 희생자는 1만여 명으로 늘었다. 퐁니·퐁녓 마을(74명)을 제외하고도 하미(135명), 빈호아(430명), 푹미(4명), 호앙쩌우(22명), 푹룻(4명) 등 수많은 마을에서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과 자료가 나왔다. 한베평화재단 쪽은 아직도 발굴하지 못한 피해자가 더 많을 것이라고 본다.
응우옌티탄 소송을 맡은 변호인단의 임재성 변호사는 국가가 진상조사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제까지는 민간단체가 알음알음 피해자를 찾아나설 뿐 체계적이고 광범위한 국가 차원의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4·3 사건에 대해 사과할 수 있었던 건 김대중 대통령 때 이미 진상조사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사과하려면 그 전에 실태조사부터 해야 한다. 피해자가 20년 가까이 문제제기했는데 정부가 깔아뭉개고만 있으면 어떡하나.”
국회에서는 강민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베트남전 민간 학살 피해 진상조사를 벌인 뒤 종합보고서를 내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베트남전쟁 시기 대한민국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사건 조사에 관한 특별법’을 대표 발의할 예정이다. 특별법 법안은 2020년 김종대 정의당 의원이 대표 발의했다가 폐기된 바 있다.
재판과 국회를 통하지 않고 진상조사를 하는 통로도 있다.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벌어진 ‘하미마을’의 생존자와 유가족 5명은 2022년 4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에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10개월이 지난 현재도 조사 개시 여부를 ‘검토’만 하고 있다. 진상조사를 개시하려면 과거사위 전원회의에서 통과돼야 하는데 아직 안건으로도 상정되지 못한 것이다. 과거사위 쪽은 “사안이 특수해 검토에 시일이 걸린다”고 밝혔지만, 위원회 안팎에선 외교적·정치적 부담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온다.
2월7일 판결 이후 외교부는 “한-베트남 정부는 양국 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더욱 발전해나갈 수 있도록 제반 현안에 대해 긴밀히 소통하고 있다”고, 국방부는 “항소 여부와 관련해선 법무부와 함께 논의해 결정할 것”이라고만 밝혔다.
“참전군인도 국가에 의해 동원됐는데 전쟁을 수행한 뒤에는 악마가 된다. 병사 개인에게만 가해자의 자리를 짊어지게 하지 말고 우리나라가 왜 그 전쟁에 참전했고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남겼는지, 동원된 한국 군인 32만 명의 전쟁 경험은 어떠했는지 사회가 들어야 한다.” ‘베트남전쟁 문제의 정의로운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네트워크’의 심아정 연구활동가가 말했다.
과거사 해결에 있어 정치와 제도만큼 중요한 것이 공동체의 반성이다. 심 활동가가 참전군인 개인의 성찰을 넘어서는, ‘참전국’ 한국의 경험 전반을 돌아보는 공론장을 열려는 이유다. 그는 조만간 응우옌티탄 사건의 판결문을 시민들과 함께 읽는 모임도 만들 생각이다.
“(학살 사건이) 1960년대 다 지나간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베트남전 참전해 번 돈으로 경부고속도로 닦았다’는 식으로, 잘못된 전쟁 복무의 수혜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시대에 산다. 이제 그런 것을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심아정 연구활동가)
신다은 기자 downy@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명태균에 아들 채용 청탁…대통령실 6급 근무” 주장 나와
‘미국 최고 의사’ 84살 김의신 “암에 좋은 음식 따로 없어, 그 대신…”
법원, KBS 박장범 임명 효력정지 가처분신청 기각
“대통령 술친구 이긴 ‘김건희 파우치’…낙하산 사장 선임은 무효”
탄두가 ‘주렁주렁’…푸틴이 쏜 ‘개암나무’ 신형 미사일 위력은
관저 유령건물 1년8개월 ‘감사 패싱’…“대통령실 감사방해죄 가능성”
“회장 자녀 친구 ‘부정채용’…반대하다 인사조처” 체육회 인사부장 증언
‘야스쿠니 참배’ 인사 온다는 사도광산 추도식…‘굴욕 외교’ 상징될 판
다 ‘내가 했다’는 명태균, 이번엔 “창원지검장 나 때문에 왔는데…”
비행기 창밖 “불꽃놀인가?” 했는데 미사일…위태로운 중동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