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3일 밤 10시30분.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다.” 단체대화방 메시지를 보고 시계를 봤다. 최근 어린이집에서 유행 중인 감기에 걸린 딸이 한참을 콜록거리다가 겨우 잠든 참이었다.
현기증이 났다. 딸과 함께 잠든 아내를 조심스럽게 깨우고 상황을 설명한 뒤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내려가 미리 싸뒀던 배낭과 물, 음식 등을 차 트렁크에 실었다.
짐을 미리 싸둔 건 2023년 5월 마지막 날, 새벽부터 서울 시내에 공습경보가 울려 “어린이와 노약자가 우선 대피할 수 있게 하라”는 대피령이 떨어진 직후였다. 당시는 오발령으로 판명 났지만, 그때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경험을 하면서 ‘충동적이고 즉흥적인 윤석열 정부라면 임기 내 사고를 칠 수 있는데 왜 아무 준비를 안 했지?’라고 후회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최악의 경우를 항상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한겨레21 기자들은 여의도 국회 현장으로 달려갔고, 편집장은 “회사로 오라”고 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내에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최대한 빨리 차를 몰아 서울을 나가”라고 당부한 뒤에야 길을 나섰다.
천만다행(?)으로 국회가 계엄 해제 요구안을 결의하면서 가족이 피란길에 오르지는 않았다. 경찰들이 통제하고, 무장한 군인들이 총구를 겨눠도 국회 담장을 넘어 달려간 사람들과 늦은 밤까지 잠들지 않고 윤 대통령의 계엄을 비판하며 압도적인 여론을 형성한 시민 덕분이었다.
두려움을 잊고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195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가 1948년 집필한 희곡 ‘계엄령’이 떠올랐다. 독재자 ‘페스트’(스페인 독재자 프랑코의 은유)가 구축한 계엄 체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자 그의 비서는 “내가 기억하는 한, 단 한 사람이 공포를 극복하고 반항하기만 해도 기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페스트에게 말했다.
무리한 계엄을 밀어붙인 윤 대통령은 시민의 용기와 이들을 연결하는 언어의 힘을 간과한 것 같다. 마침 12월10일(현지시각)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서 한강은 수상 소감에서 “언어는 우리를 서로 연결시킨다. 문학을 읽고 쓰는 작업은 생명을 파괴하는 모든 행위에 맞서는 행위이기도 하다”고 했다.
우리는 ‘12·3 내란사태’를 일으킨 윤석열에게 지지 않았지만, 아직 안심하고 ‘긍지’를 느끼기엔 이르다.
페스트는 자신의 계엄 체제가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면서 “긍지 역시 힘이 빠지고 말걸. 두고 보라고, 너희는 결국 진력이 나고 말 거야. 잔혹한 것을 보면 반항심이 생기지만 어리석은 것을 보면 용기가 꺾여버리는 법”이라고 저주하듯 말한다. 잔혹한 계엄에 저항한 우리의 용기가 계속해서 어리석은 정치적 결정을 막아낼 것이란 보장은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 앞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게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윤석열의 반동적 쿠데타는 6시간 만에 막을 내렸으나, 우리의 진보는 이제 시작이다.
이재호 기자 p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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