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욱의 질문 이태원 참사를 전후해 윤석열 정부가 보여주는 행태를 두고 ‘책임지지 않으려는 정부’의 전형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공론장에서는 ‘왜 그날 그 시각에 이태원에 갔느냐’며 희생자를 탓하거나, 희생된 개인이나 정부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 ‘공동체의 책임’이란 논리도 횡행한다. 왜 우리는 이 미증유의 사회재난 앞에서 ‘개인’도 ‘모두’도 아닌 ‘정부’의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제1438호)
“통치란 어떤 지도자가 개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나 그들이 하는 모든 일에 책임을 지고, 그 지도자의 권위 아래 개인들을 두는, 결과적으로 개인들의 일생 전반에 걸쳐 그들을 인도하려는 활동을 의미한다.”(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이 정권은 ‘환멸’에 빚진 정권이다. 전임 정권의 무능과 오만이 빚어낸 집단적 절망감이 없었더라면 촛불에 쫓겨간 구세력이 5년 만에 정권을 되찾는 희비극적 시나리오는 결단코 현실화되지 못했을 것이란 뜻이다. 그들이 집권을 위해 한 일이 환멸이라는 대중의 정동 위에 올라탄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국가 경영의 원대한 비전과 정교한 통치 테크닉을 그들에게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망한 일이었다.
2022년 10월29일, 이태원의 비극이 폭로한 건 근대국가의 핵심 기능인 ‘살게 만드는’ 능력, 미셸 푸코식으로 이야기하면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과 그들이 하는 일에 책임을 지고, 개인의 삶 전반을 인도하는’ 통치 능력이 이 나라 집권세력엔 결핍돼 있다는, 참담하되 놀랍지 않은 현실이었다.
푸코에 따르면 17~18세기를 전후해 서구에선 권력의 작동 방식에 의미심장한 변화가 일어난다.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것’ 대신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권력이 작동하는 지배적 특징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은 ‘칼의 권력’이다.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 초판 표지에 등장한 주권자의 모습은 이 칼의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왕관을 쓴 주권자는 낮은 구릉들로 이뤄진 자신의 영토 위로 상반신을 드러낸 채 왼손엔 왕홀을, 오른손엔 칼을 쥐고 정면을 응시한다. 군주의 몸을 이루는 건 셀 수 없이 많은 인간의 신체이다.
리바이어던의 칼은 ‘죽게 만드는’ 권력의 징표다. 그는 삶을 빼앗는 권리, 죽일 수 있는 권리(생살여탈권)를 통해 권력을 행사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죽게 만드는 권력’으로 인민의 삶을 보호하는, 역설의 권력이다. 그것이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인 이유는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는 한 누가 어떻게 살든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며, 누군가를 ‘살게 만들’(살릴) 능력 자체가 애초부터 없는 탓이다.
이 권력은 근대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에 점차 자리를 내준다. 푸코는 말한다. “주권은 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뒀습니다. 그리고 이제 반대로, 제가 조절이라고 부르는 권력이,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것으로 이뤄진 권력이 나타났습니다.”(<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살게 만드는’ 권력은 살아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정보를 모으고 이들을 ‘인구’라는 집합 단위로 묶어 건강과 수명, 위생, 출생률 등을 증진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푸코가 여기에 ‘생명관리권력’이란 이름을 붙였다. 생명관리권력의 뿌리는 기독교의 양치기 모델(사목 권력)이다. 그것은 양떼를 돌보는 목자의 권력이자 신도 집단의 영혼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해 다양한 전략과 기예를 구사하는 종교 권력이다. 반면 생명관리권력은 내세의 구원(영혼의 안식) 대신 현세의 구원(인구의 안전, 복지, 행복)을 추구한다. 물론 이것이 선하고 인간주의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생명관리권력의 진짜 목표는 인구의 규모와 질을 인위적으로 조절·통제해 한 사회가 보유한 경제적 생산 능력을 최대한도로 끌어올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
150명 넘는 희생자를 낸 이태원 참사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다시 묻게 한다. 참사가 일어난 그날 밤, 이 땅에 국가는 존재했는가, 통치는 작동했는가. 재난과 사고, 전염병 같은 우발 사태를 예방하고 대처하는 것은 인구의 안전과 행복을 추구하는 근대국가의 핵심 기능이다. 대부분 국가에서 재난과 우발 사태를 다루는 기술과 정책, 매뉴얼, 법규를 촘촘히 배치해두는 이유다.
하지만 참사 이후 드러난 건 구멍이 숭숭 뚫린 재난안전시스템, 재난에 대한 책임 추궁을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공적 주체들의 한결같은 비루함이었다. 그들의 행태와 심리는 핼러윈데이 행사 관리가 자신들의 공무와 무관함을 강변하는 짧은 진술 안에 집약돼 있다. ‘주최자 없는 행사에 대해선 안전관리 매뉴얼 자체가 없다.’ 이것은 ‘왜 사전에 충분한 안전관리 조처를 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관할 용산구와 서울시, 행정안전부가 내놓은 공통된 답변이었다.
참사 이틀 뒤엔 대통령까지 가세했다. “이번 사고처럼 주최자가 없는 자발적 집단 행사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인파사고 예방 안전관리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10월31일, 확대 주례회동) 대통령의 이 말은 이태원 행사의 관리 책임이 정부나 지자체엔 없었으니, 예방과 대처가 부실했던 것에 대해선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정치적 지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참사 발생 사흘 뒤, 상황이 달라졌다. ‘압사 공포’를 호소하는 112신고 전화가 참사 4시간 전부터 현장 접수됐다는 사실, 경찰과 지자체가 아무런 비상 대응 조처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심지어 참사가 발생하고 1시간이 훌쩍 넘어간 시각까지 경찰 수뇌부와 안전 주무부처의 장관은 관련 사실을 인지조차 못했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여론은 충격과 분노로 들끓었다. 행정적·법적 책임을 다했다며 버티던 용산구청장과 경찰청장, 서울시장, 행정안전부 장관이 줄줄이 고개 숙여 사과했다.
이후 정부 대응은 경찰과 지자체에 대한 법적·행정적 책임 추궁이 정부와 대통령의 정치적 책임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맞춰졌다. 대통령이 먼저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엄연히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한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지,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11월7일, 국가안전시스템 점검회의) “과학에 기반한 강제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이태원 참사의 실체적 진상을 규명하고,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막연하게 정부 책임이라고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11월10일, 대통령실 수석비서관 간담회) 참사를 예방하거나 조기에 수습하지 못한 책임은 현장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실무진의 부적절한 대처에 있었던 만큼 주무장관과 총리, 대통령에겐 행정 각료와 수반으로서 도의적 책임을 통감하는 것 이상의 반응은 기대하지 말라는 투였다.
정치권력의 위기를 초래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다. 하나가 정치적 정당성을 의심받는 경우다. 정통성 위기다. 하지만 심각한 선거부정을 저지르거나 민주적 기본질서를 훼손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무리 정권의 인기가 떨어져도 정치적 정당성을 문제 삼기란 쉽지 않다. 집권 뒤 위기는 대체로 ‘통치의 정당성’이 흔들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원인은 부패와 무능이다.
정권의 무능은 주로 정책 실패를 통해 가시화된다. 집권 마지막 해까지 문재인 정부의 발목을 잡았던 주택 전세·매매가 폭등, 일자리·소득 양극화가 대표적이다. 그 무능함에 유권자는 선거로 정치적 책임을 물었다. ‘촛불 정부’를 자임했던 문재인 정부는 결국 국민이 촛불을 들어 탄핵한 세력에 5년 만에 정권을 넘겨줬다.
정책 실패가 ‘주기적 선거’를 통해 정치적 책임을 추궁받는 것과 달리 생명·안전과 직결된 국가기능이 오작동해 발생한 사회재난은 즉각적인 통치 위기로 비화할 가능성이 크다. ‘(잘) 살게 만드는’ 데 실패한 정권은 선거를 기다려 책임을 묻지만, 피할 수 있었던 재난을 방치해 누군가를 ‘죽게 만든’ 권력에 대해선 정치적 인내심을 갖고 지켜봐줄 국민이 많지 않은 탓이다.
집권세력으로선 국가기능 오작동이 통치 위기로 비화하는 상황만은 필사적으로 막아야 한다. 여기엔 오작동 책임을 행정의 하부단위로 위양(委讓)하는 수준 이상의, 한층 근본적인 ‘프레임 전위(轉位)’가 필요하다. 국가의 개입 이전 불행한 사태를 촉발한 원인이 피해 당사자의 선택에 있는 것처럼 ‘개인화’하거나 공동체 전체의 책임으로 문제를 ‘윤리화’하는 것이다.
이런 전위 메커니즘은 이태원 참사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한다. 희생자를 조롱하고 비난하는 언설이 주로 ‘위장된 솔직함’으로 자락을 깔고 들어가는 사적 대화와 익명의 온라인 세계에 횡행한다면, ‘누구의 잘못을 탓할 것 없는,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란 진술은 대체로 보수적 레거시 미디어의 공론장에서 환영받는다. “정작 물어야 할 것은 ‘공동체적 책임’이다. 이 사고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이는 아무도 없다. 모두가 공범이다.”(11월3일 <중앙일보> ‘진중권 칼럼’)
재난은 그 파괴성과 충격으로 인해 희생자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당하는 개인에게는 갑작스럽고 돌발적인 경험이지만, 사회적·국가적 차원에선 예측 가능했던 위험이 현실화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 책임을 개인에게 오롯이 떠넘기는 것은 무책임할뿐더러 부도덕하기까지 하다.
사회적 재난에는 공동체 전체의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는 말 역시 틀린 게 아니다. 하지만 그 말이 ‘국가’나 ‘권한을 가진 공적 주체’에 대한 책임 추궁의 부당함을 지지하는 논거로 채택되는 순간, 무책임을 방조하고 국가의 실패를 변론하는 보수적 국가주의의 언어로 타락하고 만다.
국가는 잠재적 위험에 대비할 정책 생산을 위임받은 주체로, 그것을 실행할 자원과 권력을 독점적으로 소유한다. 따라서 재난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국가의 오류와 실패를 하나하나 되짚는 것부터 이행돼야 한다. 무엇보다 재난에서 보호받을 권리를 정치적으로 공론화하는 것,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을 바로잡기 위해 공동의 행동을 조직하는 것이야말로 재난에 책임지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그게 아니라면, 모두의 책임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닌 게 된다.
이세영의 질문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모든 연령대에 대중화하면서 한편으론 시민의 정치 지식과 참여 기회가 많아졌지만, 다른 한편으론 가짜뉴스나 증오표현, 끼리끼리 확증편향 등 해악도 점점 더 심각해진다. 디지털·정보화 시대에 정치의 문법과 역학은 어떻게 달라졌는가? 그 장점을 살리면서 위험을 완화할 대안은 무엇인가? (제1442호로 이어집니다.)
이세영 <한겨레> 기자 monad@hani.co.kr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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