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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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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의 노란봉투법 맹비난…우리 사회는 다른가

제정 때부터 후퇴한 중대재해처벌법도 힘있는 이들만 대변하는 정치의 결과물
등록 2022-10-26 06:17 수정 2022-12-09 07:36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신진욱의 질문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최근의 논의 구도를 지켜보면, 더불어민주당 집권 시절인 2021년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을 두고 벌어진 정치사회적 논쟁을 떠올리게 된다. 한국에서는 왜 유독 노사관계나 노동조건의 변화와 결부된 제도개혁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고 정치적 결실을 얻기 쉽지 않은가.(제1432호)

“정치적 영역에 들어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생명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생명에 대한 너무 지나친 사랑은 자유에는 방해가 되며 이것은 동시에 노예성의 확실한 표시이다.”(해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중에서)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을 인민의 구체적 삶 위에 구현한 정치공동체를 인류는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던가. 이념의 순수 형태를 찾아 아득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도 사정이 달라질 건 없어 보인다. 민주주의라는 정체의 시원에 자리잡은 고대 그리스 민주정부터가 ‘만인을 위한 자유와 평등’이란 현대 민주주의의 이상과는 거리가 먼 정치 시스템이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선택적’ 대의제다

그리스인은 ‘공동의 일’을 다루는 폴리스라는 공간이 생물학적 필연성의 세계, 쉽게 말해 ‘먹고사는 일’로부터 엄격히 분리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폴리스를 자유와 공공의 의제를 다루는 ‘순수 정치’ 영역으로 작동시키려면, 사적 이해관계에 오염되기 쉬운 생존·생계 문제의 틈입을 허용해선 안 된다는 게 당대 지배 엘리트의 확고부동한 신념이었다.

그들이 볼 때 생명과 생계유지에 필요한 활동은 결단코 가정경제의 울타리를 넘지 말아야 했다. 비루한 삶을 간수하는 건 가사와 생계활동에 전념하는 여자와 노예들 몫일 뿐, 폴리스의 가치 있는 활동에 참여하려는 자유민 남성의 제1덕목은 ‘먹고사는 일로부터 초연함’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좋은 삶’의 원형을 찾는 해나 아렌트(1906~1975)는 그리스 정치의 특징을 이렇게 요약했다. “삶의 필연성을 가정에서 극복하지 않고서는 삶도 ‘좋은 삶’도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정치는 결코 삶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앞의 책)

원형의 민주주의가 내장한 ‘분할과 배제’의 메커니즘은 ‘아시아 민주국가의 모범’으로 칭송받는 한국 정치에서도 예외 없이 작동한다. 2021년 중대재해처벌법 제정과 최근 ‘노란봉투법’이라고 불리는 노동조합법 개정을 두고 노사정·여야가 벌인 치열한 공방을 봐도 알 수 있다. 두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힘과 자격을 갖춘’ 이들의 요구만을 선택적으로 대의해온 한국 민주주의의 결손 지점이다.

시간을 중대재해처벌법이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 처리된 2021년 1월8일로 돌려보자. 그날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 표결에 부쳐진 중대재해법안은 원안과 달리 법 적용 대상을 5명 이상 사업장으로 좁히고, 시행 시기를 늦추면서 처벌 수위는 큰 폭으로 낮춘 수정안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생과 먹고사는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던 ‘촛불정부’의 집권여당이 ‘작업장 안전에 사용자 쪽 책임을 강화해 일하는 사람의 생명을 지키자’는 취지로 만든 민생 법안의 원안을 ‘여야 합의’란 명분 아래 큰 폭으로 후퇴시킨 것이다.

이날의 상황은 더불어민주당이 재계 반발이 큰 중대재해처벌법 제정보다 기존 산업안전보건법을 손질하는 선에서 노동계와 유가족의 요구를 무마하려던 입법 논의 초기부터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다. 애초 그들의 관심이 사안의 확대·공론화를 통한 정치적 해결보다 축소·개인화를 통한 비정치적 봉합에 있었다는 뜻이다. 중대재해처벌법 파동은 ‘경제적인 것’이 정치의 핵심 영역으로 진입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특정한 ‘문제’와 ‘집단’에 대한 체계적 배제가 변함없이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례였다.

‘헌법 위의 민법’ 주장하는 이들

노사관계나 노동조건의 변화와 결부된 사안을 ‘정치’가 아닌 ‘사인 간 계약’의 영역으로 밀어내려는 필사적 노력은 노란봉투법 입법을 둘러싼 최근 갈등 국면에서도 여지없이 관찰된다. 2022년 9월 말 경제사회노동위원장에 임명된 김문수는 10월13일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소유권을 침해하게 되면 공산주의가 되는 거다. 공산주의가 소유권 박탈해서 개인의 자유가 없어지는 거로 가면 안 된다”며 노란봉투법을 맹비난했다.

김문수의 발언은 국민의힘 주류나 지도부 생각과 큰 차이가 없다. 권성동 의원은 정의당이 노란봉투법을 당론으로 발의한 9월15일 페이스북에 “노란봉투법은 불법 파업을 조장하는 ‘황건적 보호법’에 불과하다”고 썼다. 정책위의장 성일종 역시 하루 뒤 원내회의에서 “불법과 탈법으로 회사와 국민, 국가에 엄청난 피해를 끼쳐도 처벌과 배상을 못하게 하겠다는 법”이라고 의미를 깎아내렸다.

국민의힘과 재계가 펼치는 주장의 기저에는 ‘사회를 규율하는 최고 규범은 민법이어야 한다’는 논리가 깔렸다. 파업 등의 쟁의행위에 ‘계약 자유’와 ‘재산권 불가침’이라는 민법 원칙을 적용해 결과에 대한 책임을 엄격히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18~19세기 서구 유산계급의 논리다. 이들에게 민법은 사회법인 노동법 위에, 심지어 노동권을 기본권으로 보장한 헌법보다 우위에 있는 절대 규범인 셈이다.

사실 재산권에 신성불가침의 지위를 부여한 근대적 입론은 1689년 출간된 존 로크의 <통치론>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은 타인의 침해와 공격으로부터 그의 재산, 곧 생명, 자유, 자산을 보존할 권리를 (…) 갖고 있다. 어떤 정치 조직도 재산을 보존할 권력 그리고 이를 위해 그 사회의 모든 범죄를 처벌할 권력을 갖지 않고서는 존재하거나 존속할 수 없다.” 하지만 재산권 절대화론자들이 간과한 부분이 있다. 재산권을 자연권 수준으로 끌어올린 로크의 텍스트에서 재산은 단순히 물적 자산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생명과 자유를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며, 그 안에서 물적 자산은 생명·자유보다 순서상 뒤에 등장한다.

대한민국의 헌법 역시 재산권에 대해선 법률 유보 조항을 둔다. “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제23조 1, 2항) 반면 노동권을 규정한 헌법 제33조는 별다른 유보 조항이 없다.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가진다.”

문제는 헌법적 기본권인 노동삼권 보장을 위해 제정된 노동조합법이 어지간한 파업을 불법으로 만드는 단서 조항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노동조합법은 100여 개 조항으로 구성됐는데 대부분이 노동권을 제약하거나 부정하는 내용이고, 형벌과 과태료 부과 항목이 40여 개에 이른다. 어떤 파업도 웬만해선 다 불법이 되니, 사용자 쪽은 ‘고의 또는 과실로 인한 위법행위로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자는 그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는 민법 조항을 근거로 손해배상 소송을 남용한다.

웬만한 파업은 꿈꾸지도 말라

물론 노동조합법에도 ‘면책 조항’이 있다.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하여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하여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제3조가 여기에 해당한다. 논란이 되는 건 ‘이 법에 의한’이란 문구다. 파업을 불법화하는 내용으로 법조문을 빼곡히 채워넣은 뒤 ‘이 법을 지키는 파업’의 경우에만 배상 책임을 면제해주라는 것이다. 월급통장이 압류되고 가계가 거덜나 남은 생마저 포기하고 싶지 않으면 어지간한 파업은 꿈도 꾸지 말라는 협박이나 다름없다.

재계와 보수 진영은 노란봉투법을 ‘노조가 불법을 저질러도 배상 책임을 면제해주는 법’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불법과 합법의 판단 근거는 현행법이다. 법이 바뀌면 불법과 합법의 경계도 바뀐다. 노란봉투법은 불법을 면책해주자는 게 아니라, 합법적 쟁의행위의 범위를 넓혀 사용자가 ‘손배 폭탄’으로 노조의 교섭력과 조합원의 삶을 옥죄는 상황을 ‘법의 힘으로’ 막자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노란봉투법 입법을 위한 시민사회 움직임은 ‘약자들의 정치’가 추구하는 ‘갈등의 사회화’ 전략에 충실하다.

미국의 현실주의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1892~1971)에 따르면 정치의 본질은 ‘갈등’이고, 정치전략의 성패는 이 갈등의 범위를 어떻게 통제하고 변화시키냐에 달렸다. 갈등은 당사자뿐 아니라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까지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하는 강력한 전염성을 갖는다. 따라서 특정한 갈등에 얼마나 많은 구성원을 연루시키는지가 싸움의 결과를 좌우한다.

예컨대 민법 논리에 기초한 자유기업체제는 사적 소유권을 절대화하면서 기업이 연루된 갈등의 범위를 기업 안에 묶어두려 한다. 따라서 이 체제는 기업 외부의 공적 개입을 차단(사사화·Privatization)하는 데 주력한다. 반면 노동자는 갈등을 ‘사적 계약관계’ 너머로 확장(사회화)해 공적 의제로 만들고 더 많은 공동체 구성원의 관심과 공감, 정치적 개입을 끌어내야 한다.

노동계의 숙원이던 노란봉투법을 2022년의 정치사회적 의제로 만든 것도 삶의 벼랑에 내몰린 존재에 대한 인간적 연민과 사회적 공감이다. 그 공감에 불을 붙인 것은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라는 심정으로 한여름 0.3평 철창에 들어가 농성을 벌인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유최안과 그의 동료들, 그들에게 기어코 470억원의 ‘손배 폭탄’을 안기려는 원청 대기업의 대응이다.

스물세 번째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며 최후의 행동에 나선 인간에게 마지막 삶의 희망조차 놓아버리게 하는 사회가 오래 지속될 리 없다. 노란봉투법은 배달호, 김주익, 그리고 수십에 이르는 쌍용차 노동자의 부고장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집자해 성안한 ‘시대 안건’이다. 그 법안이 ‘스물세 번째 인간’*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료하다. 정치냐 계약이냐, 존재냐 소유냐, 문명이냐 야만이냐.

“스물세 번째 인간이여/ 첫 번째 인간의 동지여/ 두 번째 인간의 동생이여/ 세 번째 인간의 친구여/ 스물두 번째 인간의 부활이여/ 죽음의 죽음이여/ 삶의 삶이여”(심보선, ‘스물세 번째 인간’ 중)

*2012년 시인 심보선이 쌍용차 해고노동자의 스물두 번째 죽음을 목격하고 쓴 시의 제목. 여기서 ‘스물세 번째 인간’은 시를 읽는 독자 모두를 가리킨다.

이세영 <한겨레> 기자 monad@hani.co.kr

이세영의 질문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 지도부 및 공공기관장들은 최근 “김일성주의자” “종북주사파” “총살감” 등 극단적 언사를 계속하고 있다. 우익 단체들은 독재 시대의 색깔론을 다시 꺼내어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적으로 몰고 있다. 이러한 극단주의 이데올로기와 행동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파괴하는가? 극단주의는 실제로 얼마나 위험한가? (제1437호로 이어집니다.)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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