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욱의 질문 꼭 20년 전이다. 미군 궤도차량에 치여 숨진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이 2002년 12월 서울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뒤 촛불은 2000년대 한국의 거리정치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떠올랐다. 촛불은 앞으로도 주기적 출몰을 반복할까? 나아가 한국 민주주의의 궤도 이탈을 막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이어갈 수 있을까?(제1443호)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
한국 정치는 변화무쌍하다. 기성 질서를 뒤흔드는 열정과 에너지가 예고 없이 분출했다 소멸하기를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그 역동성의 상징이 촛불이다. 등장부터 극적이었다. 2002년 초겨울, 길 가던 여중생을 치어 숨지게 한 미군 궤도차량 운전자에게 미국 군사법원이 무죄를 선고했다. 분노한 무명 청년의 호소에 서울 한복판에 3천 개의 촛불이 피어올랐다. 누군가는 횃불이 되기를 포기한 그 섬약한 소시민성을 냉소했으나, 이후의 상황 전개는 경이로웠다. 3천은 3만이 되고, 3만은 다시 30만이 됐다. 보름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추고 밝히는 광원(光源)으로서의 실질 기능은 촛불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이 기능 상실은 부차적이었던 영성적·제의적 기능을 한층 도드라지게 했다. 우연한 계기에 집단적 추모 이벤트와 접속한 촛불은 어느 순간 집합적 소망과 의지를 투사하는 정치적 매체로 진화했다.
한데 모인 촛불은 횃불보다 강력했다. 확산 속도와 파급 범위 모두 압도적이었다. 촛불은 집합행동의 진입장벽을 크게 낮췄다. 희생과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결단 없이도 정치적 항의의 장에 뛰어들 기회를 누구에게나 열어놓았다. 이런 점에서 촛불로 매개된 대규모 평화집회는 리버럴 성향의 고학력 중산층에 최적화된 21세기형 집합행동이었다.
출발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촛불 시대의 개막을 알린 2002년 ‘미선·효순양 추모집회’는 ‘반미’라는 민감한 뇌관을 내장했다. 그런데도 그것이 대중적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데는 촛불이란 매체의 영성적 고유성에 ‘여중생’이라는 희생된 존재의 특수성이 함께 작용했다.
2004년 봄을 달군 ‘노무현 탄핵 반대 집회’는 촛불이 한국 사회의 지배적 항의(의사표출) 형식으로 정착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노무현이라는 ‘곧은 정치인’의 수난 서사가 촛불이라는 매개물을 만나 ‘강자의 횡포에 희생된 의인의 생환’을 기원하는 시민적 제의로 사건화했다.
2008년 여름 펼쳐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집회는 건강·생명이라는 중산층의 안전 이슈가 보수정권에 대한 정치적 불신과 결합해 폭발력을 키웠다. 여기에 정책 결정의 불투명성, 정권의 미숙한 위기 대처가 일을 꼬이게 했다. 외형상 승리로 마무리된 앞선 두 차례 촛불의 기억이 거리의 저항 주체에게 ‘전리품 없는 일상 복귀’를 주저하게 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정권 출범 초기였고 선거라는 열정의 분출구가 부재했다는 점에서 대선과 총선을 앞둔 2002년, 2004년의 촛불과는 차이가 컸다. 반면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이 촉발한 2016년 촛불은 거리의 시민이 ‘탄핵’이라는 제도화된 해결책을 스스로 만들어내 대치 정국을 마무리 지은 경우다.
폭력과 무질서에 대한 완강한 거리두기는 21세기 촛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2002년 이후 거리의 경험을 통해 학습된 ‘전략적 평화주의’인데, 기저에 흐르는 건 섣부르고 부주의한 행동으로 촛불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려는 세력에 반격의 빌미를 제공해선 안 된다는 절박감이다. 이런 점에서 촛불시위의 정확한 대척점에 존재하는 집합행동 유형은 ‘폭동’이다. 폭동은 사회운동에서도 가장 원초적 형태에 속한다. 빈곤이나 불평등, 차별 같은 구조적 요인이 작용하지만 발생이 우발적이고 폭행, 파괴, 방화 같은 폭력이 동반된다. 지도부가 없거나 역할이 미미할 뿐 아니라 목표에 대한 참여자의 공유도가 낮고 지속기간이 짧다는 점에선 ‘봉기’나 ‘항쟁’과도 구분된다.
흥미로운 건 한국의 집합행동에서 폭동이라 이를 만한 사례를 찾기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한국전쟁 이후로 한정하면 1971년 경기도 성남에서 일어난 광주대단지 사건과 1980년 강원도 태백에서 터진 사북사태 정도다. 도시 폭동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과 차이가 크다. 이 특이성을 누군가는 ‘문민 우위’ 전통에서 비롯한 폭력에 대한 거부감, 국가의 강한 억압을 통해 내면화된 준법 강박 등의 요인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보수 집권기에 발생한 2008년, 2016년 촛불 모두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과격 행동을 주도한 소수의 ‘전투적 행동주의 그룹’ 역시 존재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이들 역시 절박함의 강도에선 평화주의자들 못잖았다. 그 절박감의 배후에는 촛불에 위축된 구세력이 언제 다시 반격을 가해올지 모른다는 불안, 짧았던 열광의 순간 뒤엔 지루하고 건조한 일상의 시간이 기다린다는 초조함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한국의 거리정치는 5년 안팎 주기로 도래하는 집단 퍼포먼스에 가까웠다. 초기의 설렘과 열광 뒤에는 초조와 불안, 낙담과 환멸의 시간이 어김없이 꼬리를 물었다.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 가능성이 열려 있고, 보수-자유주의 정당체제가 안정적으로 자리잡은 ‘아시아 민주주의의 모범국가’에서 의회의 대의 시스템을 우회하려는 거리의 촛불은 왜 주기적 출몰을 반복했을까.
유력한 설명을 최장집의 뒤를 잇는 정당정치론자 박상훈이 제공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1987년 민주화는 ‘미완의 민주화’였으며, 거리정치는 불완전한 87년 민주주의 체제의 불가피한 산물이다. 그는 촛불의 주기적 명멸 원인을 “민주화가 사회운동에 의해 이뤄졌지만, 그 운동의 에너지가 1987년 ‘민주화 이후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소외됐다”는 데서 찾는다. 진보적 운동세력이 배제된 보수 독점적 정당체제가 고착되면서 의회와 사회적 요구 사이에 괴리가 생겼고, 체제가 흡수하지 못한 열정과 에너지가 정치적·도덕적 발화점을 만나면 어김없이 거리로 분출돼 나온다는 것이다.
촛불은 앞으로도 출몰을 반복할까. 촛불집회가 정치적 항의의 지배적 형식으로 자리잡았음을 고려하면, 그럴 가능성이 크다. 변수는 촛불의 명멸과 함께 반복돼온 열광과 환멸의 사이클이다. 노무현의 정치적 부활을 가능하게 한 2004년 촛불은 2007년 이명박의 집권으로 이어졌고, 반이명박 전선을 성공적으로 복원시킨 2008년 촛불의 정치적 귀결은 2012년 박근혜의 대선 승리였다. 2016년 초겨울의 광장을 밝힌 촛불은 어떠했던가.
2016년 촛불이 남달랐던 건 사실이다. 촛불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세력이 집권에 성공한 뒤 부패한 전임 정권의 실력자들이 차례로 심판대에 섰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은 환호했다. 그러나 열광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촛불이 추방하려던 반칙과 특권과 불평등의 변함없는 편재가 확인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9년 조국 사태는 특권과 불평등에 대한 무감각이 ‘촛불 정권’을 표방한 세력 내부에도 만연해 있음을 드러냈다. 그 결과는 민주화 이후 처음 현직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반기득권 포퓰리스트 연합’(촛불동맹)의 붕괴였다.
2002년 이후 반복된 열광과 환멸의 주기적 교대는 한국 민주화의 분석틀로 사용돼온 안토니오 그람시의 ‘수동혁명’ 개념을 다시 소환한다. 수동혁명은 위기에 처한 지배세력이 대중으로부터 통치에 대한 지지와 동의를 회복하기 위해 위로부터의 자기혁신에 나서는 정치 기획이다. 수동혁명의 시기는 지배세력에는 체제의 점진적 수선기에 해당하지만, 진정한 변화를 열망해온 이들에겐 좌절과 환멸의 시간이다. 용출하던 변화의 에너지가 체제가 감당할 만한 정치경제적 한계선 안으로 흡수되면서 흔들리던 지배질서도 안정을 회복하기 때문이다.
이런 열광과 환멸의 이중주에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이는 시인 김수영이다. 자신을 그토록 흥분시킨 4·19가 이승만 하야 뒤 등장한 허정 과도내각에 의해 ‘반쪽짜리 혁명’으로 추락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김수영은 썼다. “기성 육법전서를 기준으로 하고/ 혁명을 바라보는 자는 바보다/ 혁명이란/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 할 터인데/ 이게 도대체 무슨 개수작이냐”(‘혁명과 육법전서’)
시민의 힘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권력자를 큰 희생 없이 끌어내렸다는 점에서 2016년 촛불은 분명 성공한 정치운동이다. 하지만 승리가 확인된 순간, 정국은 조기 대선 국면으로 급격히 전환됐고 사회개혁의 열정과 에너지는 지배질서의 재편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누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인가’를 둘러싼 권력 게임의 장 안에서 빠르게 소진됐다. 결국 ‘촛불 확산→박근혜 탄핵→조기 대선’으로 이어진 2016년 촛불의 ‘1국면’과, 적폐청산이란 이름으로 문재인 집권 2년차까지 이어진 ‘2국면’은 5년 단임의 대통령중심제와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에 기반한 리버럴-보수 양당체제에 어떤 균열도 내지 못한 채 2019년 조국 사태와 함께 종결됐다. 가장 성공적이었던 2016년의 촛불조차 제6공화국 헌정체제에 미세한 수선만 가하는 또 한 번의 수동혁명에 그치고 말았다. 그것은 1960년의 김수영이 그토록 우려했던 ‘육법전서 혁명’이었다.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정치 지형이 ‘탄핵 이전’으로 회귀한 것은 육법전서 혁명을 넘어서지 못한 2016년 촛불의 예정된 결말이다. 하지만 육법전서 혁명이라는 바로 그 한계가 촛불의 재생을 이끄는 동력이 된다는 사실 역시 놓쳐선 안 된다. 억눌리고 배제된 열망을 담아낼 새로운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는 한, 그 열망은 항상 기성 시스템의 틈새를 비집고 거리로 분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밝혀질 미래의 촛불이 열광과 환멸이 교대하는 현대사의 카르마를 벗어날 수 있을지는 예단하기 어렵다. 지레 비관할 필요는 없으나 방식과 목표는 새로워야 한다. 육법전서 혁명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는 길은 제6공화국 헌정체제의 종식이다.
“아아 새까맣게 손때 묻은 육법전서가/ 표준이 되는 한/ 나의 손등에 장을 지져라/ (…) 차라리/ 혁명이란 말을 걷어치워라”(김수영, 앞의 시)
이세영 <한겨레> 기자 monad@hani.co.kr
이세영의 질문 정치인들은 경제와 일자리, 교육, 고령화 등 사회문제에 누구보다 많은 말을 하지만 실제 그것을 해결하는 데서 정치가 이토록 무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식과 기술, 조직 등 모든 면에서 고도로 합리화한 현대사회에서 왜 유독 정치는 맹신과 증오, 집단감정에 휘둘리는가? 그럼에도 사회는 정치 없이 작동할 수 있는가? 정치가 끝내 역할을 하지 못한 우리 사회와 지구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좋은 정치의 이상은 왜 긴급한 현실인가? (제1447호로 이어집니다.)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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