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현민(50)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이 청와대를 나간 지 8개월 만에 청와대와 관련한 책(<미스터 프레지던트>, 메디치미디어)을 가지고 돌아왔다. 2022년 5월10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경남 양산 자택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본 뒤 탁 전 비서관은 제주도로 훌쩍 떠났다. 바다와 가까운 작은 집에 살았고 바다로 가끔 나가 낚시했다. 그러나 현실 정치와 멀어질 수는 없었다. 뉴스를 보지 않으려 했지만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에게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냈다. 그가 문 전 대통령의 ‘과정’을 함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2023년 1월10일 서울에 온 그를 만났다.
“지난 5년 내내 ‘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미스터 프레지던트>에서 발췌)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가 명확히 달라 보이는 점은 ‘의전과 일정’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행사를 치를 때마다 구설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국군의날 행사에서 구령을 잘 못하거나 외국 순방에선 영국 여왕 조문 불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굴욕’ 만남 등 논란이 계속 불거졌다.
반면 문재인 정부는 광복절과 삼일절 등 국경일 행사를 매해 장소를 바꿔가며 열었고, 국군의날 기념식은 5년 동안 육해공 부대를 모두 돌며 치렀다. 시작은 집권 첫해인 2017년 광복절 행사가 끝나고 나서 던진 문 전 대통령의 한마디였다고 그는 책에서 밝혔다. “앞으로 국가 기념식은 그 취지를 드러낼 수 있는 장소에서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탁 전 비서관은 “비극의 시작이었다”며 웃었다. “그 이후부터는 어떤 국가 행사도 같은 장소에서 두 번은 안 했을 것”이라고 했다. 제대로 ‘쇼’를 했는데 그의 힘만으로 진행된 것은 아닌 셈이다. 그는 청와대 근무를 마친 뒤에도 ‘쇼만 보여줬다’는 비판이 “별로 아픈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가 책임진 일정은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1195개(2022년 상반기 제외)에 이른다. <미스터 프레지던트>는 1195개 행사의 후기 같은 책이지만 현 정부에 대한 비판도 군데군데 묻어난다. “‘퇴근길 한잔’ 행사는 날짜 선택부터 쉽지 않았다.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퇴근이 있을 수 없고, 대통령은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 늘 대처해야 하는데, 자칫 국민에게 대통령이 한가로워 보일 수 있었다.” “(파병부대를 방문하며 장병 약혼녀를) 공군 1호기(대통령 전용기)에 태우면 좋겠지만 민간인 신분에 수행원 역할도 아니니 다른 비행편을 찾아봐야 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8월 수도권에 집중호우가 내려 반지하 침수 사고가 발생한 날 집으로 곧장 퇴근한 일, 유럽 순방 뒤 대통령 전용기에 민간인인 대통령실 인사비서관의 아내를 태우고 돌아온 사건이 바로 떠오른다.
탁 전 비서관은 “초고는 훨씬 더 비판적이거나 (두 정부를) 비교하는 식으로 썼는데 엄청 자제했다”며 “어쩔 수 없이 언급해야 하는 부분이 좀 남았던 것”이라고 했다.
대신 문재인 정부 행사 뒷이야기를 빼곡히 기록했는데 특히 대통령 순방 이야기가 쏠쏠하다. 다자 정상회의가 열리는 국제회의장에는 정상 등 극소수 인사만 들어갈 수 있다. 의전비서관은 그 가운데 한 명이다. 2021년 영국 글래스고에서 열린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6) 회의장에선 문 대통령이 각 나라 대표단이 부러워하는 가운데 도시락을 까먹은 것 등은 알려지지 않았던 뒷이야기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때는 회담장을 잡기 위해 각 나라 의전관들이 문고리를 붙잡고 눈치싸움하는 일화도 흥미진진하다.
탁 전 비서관은 치열한 외교 전쟁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9할을 차지한다고 했다. “한국 대통령은 무조건 다자회의에 가서 미국 대통령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국민이 불안해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다자회의에 참석하는 정상들이 모두 만나고 싶어 하는 정상도 미국 대통령이다. 빠른 판단과 함께 대담하고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의전비서관이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서 대통령과 미국 대통령을 딱 마주치게까지는 할 수 있다. 그다음이 대통령 역할이다. 몇 분 동안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지는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사실 그가 맡은 의전비서관 역할은 전임자들과는 달랐다. 탁 전 비서관은 “이전에 의전비서관은 정말 대통령 문 열어주는 사람이거나 지근거리에서 얼굴을 많이 비춰야 하는 정무적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윤 대통령 취임 뒤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탁현민 같은 전문가 어디 없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탁 전 비서관은 윤석열 대통령실의 잇따른 행사 실수는 자신과 같은 역할의 부재 때문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문제의 핵심은 시나리오나 형식이 안 갖춰져서가 아니라 대통령이 정해진 형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낸 그에게 정치할 생각이 있는지도 물었다. 그는 “전혀 없다”며 “요즘 정치를 보면 서로 자신이 제일 잘할 수 있다고 손을 드는데 이런 게 나한텐 멋져 보이지도 않고, 내가 그들 중에 한 명이 된다는 것도 별로다. 내 분야에서 난 썩 나쁘지도 않고 재미나게 살 수 있는데 현실 정치인이 돼야 할까”라고 되물었다.
그는 민간 문화행사부터 정부 행사까지 안 치러본 게 없는 행사기획자다. 이명박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누구도 경험하기 힘든 평양과 판문점의 남북한 행사 뒤에도 있었다. 그는 앞으론 프랑스에서 파리올림픽 관련 행사와 멘토링 관련 행사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1월18일 발간될 책에는 평양과 판문점, 평창 등 남북대화 중에 있던 일은 거의 담기지 않았다. “지금은 사람들이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분위기라고 생각해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다고 봤다.” 검찰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을 두고 서훈 전 국가안보실장을 기소하는 등 문재인 정부를 겨냥하는 탓이다. 다만 그는 “이 책이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하다”고 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는 문재인 정부가 끝난 뒤 처음 나오는 청와대 관계자의 ‘회고록’이다. 그는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문 전 대통령이 2022년 제주도에 오셨을 때 자서전을 어떻게 하실 생각이냐고 여쭤봤다. 그때 본인이 자서전을 쓰기 전에 주변 사람들이 먼저 회고록을 쓰는 게 좋겠다고 하시더라. 대통령은 항상 결론만 보고받다보니 그 과정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데 그 과정을 먼저 써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였다”고 말했다.
“시작이기도 하고 끝이기도 하다”라고 한 건, 책에 대한 반응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와 직결됐다고 여겨서다. 반응이 좋다면 다른 책 출간으로 또 이어질 수 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면서도 책이 얼마나 팔릴지 무척 걱정했다.
이완 기자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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