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영의 질문 정치인들은 경제와 일자리, 교육, 고령화 등 사회문제에 누구보다 많은 말을 하지만 실제 그것을 해결하는 데서 정치가 이토록 무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식과 기술, 조직 등 모든 면에서 고도로 합리화한 현대사회에서 왜 유독 정치는 맹신과 증오, 집단감정에 휘둘리는가? 그럼에도 사회는 정치 없이 작동할 수 있는가? 정치가 끝내 역할을 하지 못한 우리 사회와 지구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좋은 정치의 이상은 왜 긴급한 현실인가? (제1445호)
윤석열 정부는 출범 뒤 수개월이 지나면서 반노동 검찰국가로서 실체를 더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대통령은 파업노동자를 북한에 빗대어 ‘적’으로 부르더니, 곧이어 공식적으로 노조를 ‘3대 악’의 하나로 규정했다. 여당은 전 정권과 야당을 계속 ‘북한’과 연결된 집단으로 몰아가고, 대통령실과 검찰·감사원 등 권력기관이 정치를 대신해 정국을 주도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계층, 이념, 문화, 거버넌스 등 여러 면에서 우리 사회를 퇴행시킬 가능성이 크다. 윤석열 정부를 무능·무지·무책임 등 ‘무’(無)로만 규정하는 관점은 이런 위험을 놓칠 수 있다. 나아가 지금 노동·연금·교육·선거법 등 일련의 ‘개혁’을 내걸고 미조직노동자, 비정규직, 청년, ‘약자’를 지지층으로 초대하는 전략은, 박근혜 정부의 ‘4대 개혁’보다 속도가 빠른 것이다.
그러나 단지 비난하고, 항의하고, 저지하는 것만으로는 정치 현실을 바꾸기에 충분하지 않다. 지금 한국 정치의 문제 상황은 그보다 깊기 때문이다. ‘촛불’의 국민적 열광 뒤에 온 환멸의 시간, ‘좋은 정치’의 가능성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가 지금도 계속된다는 문제 말이다.
문재인 정부는 민주주의와 헌법주의의 기본 가치에 대한 공감대로 묶인 좌우 유권자 촛불연합을 토대로 사회개혁을 하리라는 기대 속에 출범했다. 이후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전쟁 위기와 코로나19라는 복합위기를 극복하는 등 역량을 발휘했지만, 촛불연합을 적폐/개혁, 보수/진보, 친일/반일로 갈라서 분열시켰고, 그러면서도 정작 과감한 구조개혁은 회피해 진보층까지 잃었다.
특히 임기 하반기의 지지율 추락 과정은 격렬했다. 집값 폭등과 자산 격차 심화, 정권 실세의 자녀 입시 비리와 재임 중 고액 자산 증식, 진보세력 내부의 분열, 정권 지지자와 반대자의 집단적 대결, 극우세력 준동 등 이 모든 것이 ‘촛불 명예혁명’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해체시켰다. 환희는 실망으로, 배신감으로, 분노로, 종국엔 냉소와 무기력으로 변해갔다.
무기력한 사회와 권위주의적 검찰국가의 조합은 대단히 위험하다. 에리히 프롬은 나치 집권 몇 년 뒤인 1937년 ‘무력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개인들이 정치사회적 과정에 그저 종속될 뿐 거기에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무력감이야말로 권위주의 지배의 사회심리적 기초라고 썼다. 그런 무력감에서 벗어나려면, 여기에 이르게 된 과정과 구조를 냉정히 인식해야 한다.
우선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권력 지형 변화가 중요하다. 과거에 주변부였던 진보·민주화 세력의 일부가 중심부로 진입하고 주류에 동참하는 과정이 꾸준히 진행됐는데, 특히 문재인 정부 출범으로 이 새로운 시대 상황이 명확해졌다. 그에 따라 민주·진보·평등을 표방하는 권력 내부에 특권과 사익을 취하는 자가 생겨남으로써 자기모순이 심화됐다. 그 결과는 모든 정치적 진정성에 대한 신뢰의 붕괴였다. 공익을 사칭한 사익의 요소가 더 큰 공익을 파괴하는 비극이 반복됐다.
프랑스 정치학자 모리스 뒤베르제에 따르면, 정치는 한편으로 사회 일반이익과 공동선을 실현하는 것,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의 결속과 통합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많은 사람에게 정치는 또한 지배를 통해 사익을 취하려는 집단들 간의 투쟁, 권력을 쥔 소수의 특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비친다. 정치는 이처럼 공과 사의 이중성을 갖는데, 그에 대한 성찰을 거부하고 자신을 순수한 공동선의 구현으로 자임할 때 그 권력은 진정 위험한 것이 된다.
한국에서 그런 이중성은 예전 보수우익 독재세력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보주의를 표방하는 세력도 마찬가지다. 사회특권층과 인맥을 맺고 부정과 남용을 행하는 자가 생겨나는 구조적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진보는 도덕적 신뢰라는 자산을 잃었고, 보수는 진보의 위선에 대한 공격이라는 무기를 얻었으며, 대중이 얻은 것은 환멸이다. 여기서 정치는 도덕과 별개라는 항변은 답이 아니다. 모든 권력에 대한 견제와 엄격한 자정 장치가 절실하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선 ‘적과 동지’의 적대관계가 사회 전체로 퍼져 쌍방적인 비난의 정치를 더욱 악화하고 있다.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는 이 상황을 정확히 감지하고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고유한 목적과 동기가 ‘적과 동지’의 구분을 특징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는 집단적인 결속과 대결로 작동하며 그 점에서 도덕적인 선과 악, 미적인 아름다움과 추함, 학문의 참과 거짓, 경제적 이익과 손실이라는 코드로 작동하는 다른 사회 영역들과 구분된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제까지 ‘단지’ 사회적 사안이던 것이 국가적·정치적 사안이 되는 반면, 국가적·정치적 사안이던 것은 사회의 관심사가 되어 지금껏 ‘중립적’이던 종교·문화·교육 등 다양한 사회 영역이 정치화되는 경향이 있다고 슈미트는 봤다.
그의 관찰을 심화해보면, 이 과정에서 ‘적과 동지’ ‘선과 악’ ‘미와 추’ ‘참과 거짓’의 코드가 혼합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즉, 내 당파는 단지 나와 같은 편일 뿐 아니라 또한 선하고, 아름답고, 참이다. 상대 당파는 단지 내 당파와 대결할 뿐 아니라 또한 악하고, 추하고, 거짓이다. 이런 상황은 모든 것이 정치가 되는 과잉정치화를 뜻하기도 하지만 사회갈등을 조직해 협상·조정하는 정치의 실종을 뜻하기도 한다. 이 선악 구도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이처럼 정치행위자들이 비난과 대결에 몰두하는 가운데, 사회의 복잡한 이해갈등을 풀어갈 정치의 능력은 약화된다. 공적 행위로서 정치는 공동선을 표방하는 동시에, 사회집단의 특수한 이익을 접합해야 한다. 그처럼 정치에는 보편성과 특수성이 공존하기에, 정치집단은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집단의 이익을 연결해 넓은 동의 기반을 구축하려 경합한다.
아르헨티나 출신 정치이론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의 언어를 빌리면, 특수하고 부분적인 이익을 접합해 그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 또는 만인의 해방과 등가인 것처럼 여겨지게 할 때 ‘헤게모니’가 구성되고, 대중이 그런 등가성을 납득할 수 없을 때 헤게모니는 해체된다. 바로 그러한 헤게모니 기획을 수립할 야심과 능력이 한국 정치에서 사라지고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 정치는 현시대의 새로운 문제와 균열 구조에 대응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노동계급은 생산·서비스·사무직으로 분화되고, 노동시장은 대·중소기업, 정규·비정규직으로 분절됐으며, 플랫폼·긱경제 등 다양하게 정의되는 새로운 고용관계와 노동형태가 늘어났다. 그 결과 정치가 대변해야 할 ‘국민’ ‘시민’ ‘민중’의 처지와 이해관계는 대단히 복잡해졌다.
경제적 이해갈등이 전부가 아니다. 계급, 젠더, 지역, 세대 등 다중적인 격차와 갈등이 심화됐다. 자본/노동, 남성/여성, 자가/임대, 서울/지방 등 여러 균열이 교차하기에 노동의 연대가 남녀로 찢어지고, 여성의 연대가 계급으로 찢어지며, 계급과 젠더의 연대가 지역 격차로 찢어진다. 이런 현실은 정치가 고도의 종합적인 조정 능력을 발전시킬 것을 요구한다.
궁극적으로 문제의 핵심은, 주요 정치집단들이 양극화된 증오와 대결을 반복하는 가운데 한국 사회의 복잡한 갈등과 구조적 문제를 풀어갈 정치의 공간이 소멸한다는 데 있다. 그 빈자리에 민중 없는 포퓰리즘, 배타적 팬덤정치, 증오와 극단주의가 번성하는데, 이것은 상대를 파괴할 수는 있지만 상대보다 나은 대안을 갖고 있진 않음을 누구나 알기에 무기력에 빠지게 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짚고 일어설 땅이 있는가?
필자는 2022년 7월에 인천대 박선경 교수, 고려대 길정아 박사와 함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지원으로 실시한 인식조사에서 놀라운 결과를 발견했다. 2016~2017년 촛불집회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한국 민주주의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이 각각 77%, 76%로, 촛불 당시 여론과 정확히 같았다. 헌법적 가치가 훼손되면 항의행동에 참여하겠다는 응답도 72%에 이르렀다.
불능 상태가 된 정치에도, 모든 선한 의지를 조롱한 지난 수년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촛불’의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만 수많은 개인이 가슴에 품은 이 소망을 어떻게 승화시켜 집합적 힘으로 만들어낼지가 우리 앞에 놓인 질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썼듯이, 진정한 자유는 타인의 동석(同席)을 필요로 한다.
신진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정치 크로스’ 연재를 마칩니다. 1년 동안 날카로운 시각의 글을 보내주신 신진욱, 이세영 두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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