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어찌하다 ‘자유’가 보수의 전유물이 되었나

자유는 권위주의 정부 시절 반공주의의 동의어, 민주화 이후엔 시장지상주의와 등치…
보수 헤게모니에 맞서기 위해 진보는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 밀고 나가야
등록 2022-06-01 11:16 수정 2022-06-02 04:51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일러스트레이션 이강훈


신진욱의 질문
윤석열 대통령 취임사의 키워드는 ‘자유’였다. 진보의 가치였던 ‘자유’가 보수의 전유물이 돼버린, 이 한국적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제1413호)

“나의 학습 노트 위에/ 나의 책상과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내가 읽은 모든 책장 위에/ 모든 백지 위에/ 돌과 피와 종이와 재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황금빛 조상 위에/ 병사들의 총칼 위에/ 제왕들의 왕관 위에”(폴 엘뤼아르, ‘자유’)

물과 공기처럼, 인간의 존엄한 삶을 위해 어디든 항상 존재해야 하는 것. 그것의 이름은 자유다. 폴 엘뤼아르(1895~1952)의 시 ‘자유’는 원래 ‘단 하나의 생각’이란 제목의 연시(戀詩)였으나, 얼마 안 가 제목을 ‘자유’로 바꿨고, 점령군과 싸우는 레지스탕스의 애송시로 알려지며 프랑스 전역에 확산됐다. 1970년대 불문학자 오생근에 의해 <이곳에 살기 위하여>란 시집에 묶여 소개된 뒤 국내 시단에도 묵직한 반향을 일으켰는데, 김지하가 1975년에 쓴 대표작 ‘타는 목마름으로’는 사실상 ‘자유’의 모작이란 평가가 있을 정도다. 엘뤼아르와 가장 근사한 삶을 살았던 ‘전사 시인’ 김남주의 시편에도 그에 대한 오마주로 읽힘 직한 표현이 가득하다.

자유, 근대정신의 상징이자 지고의 해방 이념

초현실주의 시인이자 완고한 공산당원이던 엘뤼아르에게도 자유란 평범하고 비루하고 고귀하고 위대한 모든 것 위에 찬란히 빛나는 지고의 이상이었다. ‘황금빛 조상’이 상징하는 금력도, ‘제왕들의 왕관’으로 형상화된 권력도 시인에겐 자유의 지고함을 돋보이게 하는 세속의 오브제에 불과했다. 자유는 인류사를 통틀어 질곡과 결핍 속에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 강력한 투쟁의 무기이자 슬로건이었고, 근대정신의 상징이자 해방의 이념 자체였다.

‘자유’와 ‘자유주의’라는 고전적 주제가 한국 정치의 화두로 재부상하기까지는, 검사 출신 대통령 윤석열의 구실이 작지 않다. 자유는 검찰총장직을 내던지고 정치 참여를 선언했을 때부터 윤석열의 핵심 어휘였다. 그는 말했다. “이 정권은 헌법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내려 한다.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독재요 전제다.” 이후 윤석열은 틈날 때마다 집권세력의 반자유주의적 편향을 공격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진정한 수호자를 자임했다. 결국 그는 대선의 최후 승자가 됐고, 자신의 취임사를 자유라는 추상언어로 빼곡히 채웠다.

흔히 보수우익의 사상으로 오인되지만, 자유주의는 진보성과 보수성을 동시에 갖는 이념이다. 자유주의의 스펙트럼은 시장의 압도적 자유를 옹호하는 신자유주의부터, 국가 개입의 불가피성과 분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회적 자유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물론 역사에 실존해온 자유주의는 사유재산제를 신성불가침의 제도로 간주하고 시장과 사적 영역에 대한 국가 개입의 최소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유산계급의 세계관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차별 철폐와 언론·집회의 자유, 법치, 관용 같은 해방적·인간주의적 가치를 강력하게 옹호하고 발전시킨 것도 자유주의였다. 자유주의는 근원부터 보편적 해방의 이념이었다.

그러나 냉전의 최전선이자 시장경제의 진열장이던 대한민국에서 자유주의는 빈번하게 오인되고 오용됐다. 권위주의 정부 시절엔 반공주의의 동의어였고 민주화 이후엔 시장지상주의와 등치됐다. 이는 자유주의가 절대왕정, 봉건적 신분질서와의 투쟁을 통해 자생적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근대의 충격과 함께 외부로부터 이식됐다는 한국적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상하의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유교 전통의 잔재, 분단과 전쟁을 경유하며 만들어진 반공주의의 완강한 규율 시스템 역시 한국의 자유주의를 상당 기간 불완전한 상태로 연명하게 한 내적 제약 요인이었다.

광주, 전두환 그리고 ‘자유주의의 주변화’

그러나 역사가 부과한 한계에도 김대중 같은 야당 지도자와 장준하·함석헌 같은 재야인사, 저항적 문인집단과 종교인으로 대표되는 1970년대 자유주의자들은 군부가 주도하는 과두제 권력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자유주의를 독재를 정당화하는 체제 이념이 아니라 유력한 저항 이념으로 자리잡게 했다. 이들에게 ‘자유’는 “만인을 위해 싸”우고 “몸부림칠 때”(김남주, ‘자유’) 비로소 주어지는 실존의 전리품이었다. 시인 정희성은 썼다.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 자유여”(‘너를 부르마’)

문제는 이들의 자유주의가 여전히 시민권적 자유를 요구하는 정치적 자유주의의 경계 안에 완강하게 머물렀고, 이런 정치적 자유주의마저 반공주의의 억압과 정면으로 대결하며 사상과 신념의 자유를 요구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한계는 1980년대에 이르러 이념으로서의 지적·도덕적 헤게모니를 급진주의에 내주는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했다.

결국 1980년대 저항 엘리트 세력은 1970년대 자유주의적 저항운동의 한계를 비판하며 급진주의로 빠르게 기울었다. 1980년 광주의 경험과 전두환 정권의 폭압 통치는 당대의 저항 주체들이 개인의 자유와 법치, 다원주의를 기본 원리로 삼는 자유주의를 평등과 인민주권이 핵심인 민주주의보다 하위의 이념 범주로 간주하게 했다. 눈여겨볼 점은 1980년대 저항 엘리트 세력에 의한 ‘자유주의의 주변화’가 30년이 더 지난 오늘날까지 끈질긴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뒤 적폐 청산 정국과 조국 사태를 거치며 집권 엘리트 세력 및 이들과 이념적·정서적 일체감을 갖는 정권의 핵심 지지층 내부에선 자유주의 가치의 왜소화가 한층 심화된 단계로 나아간다. 이른바 ‘노무현 트라우마’에 뿌리를 둔 ‘피해자 서사’와 민주화투쟁 경험이 빚어낸 ‘정치적 선민의식’이 보수야당 세력과 검찰·언론 등 ‘비선출 권력’ 내 비우호 세력에 대한 ‘악마화’와 결합하면서 타협과 절제, 균형이라는 자유민주주의 원칙이 무력화되는 상황까지 치달았다.

이런 점에서 윤석열이 대통령선거에 뛰어들며 ‘자유’와 ‘자유민주주의’를 가치 전쟁의 최전선에 내세운 건, 정치 전략 차원에선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그의 ‘자유’ 담론은 극우에서 진보층 일부까지 포괄하는 폭넓은 유권자층에서 호소력을 발휘했다. 그 담론적 위력의 상당 부분은 문재인 정부의 민주주의가 법치, 견제와 균형, 개인의 자유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에서 이탈한다는 대중의 막연한 공통 감각에 근거해 있었다. 여기엔 검찰개혁, 의회 운영, 선거 관리 같은 민감한 이슈에서 문재인 정권이 보인 미숙하고 성급한 대처가 빌미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었다.

자유민주주의 앞세운 보수의 헤게모니 프로젝트

발터 베냐민(1892~1940)이 역사유물론의 혁신을 제안하기 위해 쓴 에세이 도입부에는 ‘체스 두는 자동기계’ 이야기가 등장한다. “들리는 얘기로는, 체스를 두는 자동기계가 있었는데, 이 기계는 누군가 수를 두면 정확히 그 반대 수를 두어 언제나 승부에서 이기게끔 만들어졌다고 한다. (…) 그런데 그 기계 안에는 체스의 달인인 곱사등이 난쟁이가 숨어 상대가 말을 움직일 때마다 줄을 당겨 인형의 손놀림을 조종했다.”(‘역사철학테제’)

베냐민은 이 글에서 파시즘의 득세로 위기에 빠진 역사유물론과 사회주의 운동이 ‘억눌린 자들의 구원 서사’인 신학적 종말론을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역사의 최종 승자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말하자면 자동기계는 역사유물론이요, 그 안의 ‘왜소하고 못생긴’ 난쟁이는 신학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쇄신을 위해 베냐민이 천착했던 신학적 종말론처럼, 오늘날의 한국 진보를 정당성 위기의 덫에서 탈출시킬 구원의 서사는 무엇인가.

5년 전 광장의 촛불이 꿈꾼 건 반칙과 특권 없는 정의로운 연대의 공동체였다. 그 촛불의 열망 위에 등장한 리버럴 정권이 오만과 독선에 취해 스스로 무너졌다. 역설적이게도 그 부끄럽고 쓰라린 패배 덕에 한국의 진보와 리버럴에겐 성찰과 쇄신의 시간이 열린 것도 사실이다. 윤석열식 자유민주주의를 앞세운 보수의 헤게모니 프로젝트 앞에서 진보와 리버럴이 선택 가능한 대안은 하나로 수렴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자신의 것으로 전유하기 위한 사고와 행동 유형의 전환이다.

애초 자유민주주의는 법의 지배와 권력분립, 개인의 자유 보장을 핵심 원리로 삼는 자유주의와, 평등과 인민주권이 기본 원리인 민주주의가 결합해 만들어진 정치 레짐이다. 절대주의에 맞서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가 함께 투쟁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이 정체(政體)는 지난 세기 좌·우익 전체주의와의 대결에서 모두 승리하며 지구적 차원의 지배정체로 자리매김했다. 더 이상 반공주의나 시장지상주의라는 협소한 경계 안에 가둬두는 게 불가능할 만큼 정치적 의미지평이 확장된 것이다.

봉건제의 속박과 종교적 도그마, 절대주의의 억압에 맞섰던 ‘해방의 이념’ 자유주의가 시장주의자와 보수의 전유물이 되도록 방치한 건 한국 정치와 한국 민주주의의 불행이자 진보의 뼈아픈 실책이었다. 서구 좌파는 이미 자유민주주의를 자신들의 대안적 정체 안에 포용한 지 오래다. 1970년대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논쟁의 주역이었던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노르베르토 보비오(1909~2004)는 사회주의의 목표를 ‘자유민주주의 가치의 심화’로 정의하면서 보편적 자유, 권력분립, 대의제를 사회주의가 방기해선 안 될 핵심 원칙으로 제시했다. 이 원칙은 대부분의 좌파 정당들에 의해 명시적·암묵적으로 수용됐다.

승리하는 진보, ‘자유민주주의 좌파’를 향하여

역사와 세계로 시선을 돌려도 ‘자유(민주)주의의 바깥’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라면, 진보의 임무는 명확하다. ‘모두를 위한 자유와 평등’이란 자유민주주의의 윤리와 원칙을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지금 한국의 진보에 자유주의란, 80여 년 전 한 유대인 마르크스주의자가 혁명이론의 쇄신을 궁구하며 붙잡았던 그 왜소한 난쟁이, 신학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만약 그것이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그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어서는 안 되는 신학을 자기의 것으로 이용한다면, 누구하고도 한판 승부를 벌일 수가 있을 것이다.”(베냐민, 앞의 글)

이세영 <한겨레> 기자

이세영의 질문
시민단체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사회적 신뢰가 예전 같지 않다. 정부지원금을 타거나 정치권에 가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의 사회참여는 점점 더 다양해지고, 각종 단체와 네트워크의 양적 성장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 시민사회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정치 변화를 이끌어낼 저력이 있는가? (제1417호로 이어집니다)


*신진욱X이세영의 정치크로스: 정치사회학자인 신진욱과 정치부 기자 출신인 이세영이 한국 정치에 대해 서로 묻고 답하는 형식의 정치칼럼입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